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97)화 (97/148)

1664277666301.jpg

098. [66F, CODE RED.]

나리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무슨 질문부터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입만 뻐끔거리던 나리가 주환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유 소령님과 최 대령님 연락처가…….”

- EMP 공격으로 작동되지 않는 물품이 많아 워치를 전면 교체했습니다. 최 대령과 유 소령이 바빠서 새 워치를 셋업할 시간이 없었나 봅니다.

“그, 랬습니까?”

나리는 C12 벙커 앞, 기자 회견장에 나란히 선 강과 일한, 황에덴을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이능력 특수연대에 이렇게 빵빵한 물자 지원이 있었나? 작전 성공 기념 포상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딘가 석연치가 않았다.

사람이 죽었다. 강력하지만 미숙한 가이드의 가이딩으로 에스퍼가 정신 줄까지 놓으며 불구가 되었다. 군에서 개입한 방해 공작으로 말이다.

사흘 동안 분명 보고가 올라갔을 건데도 상부는 이 일을 덮고 있었다.

“…….”

정황이 더욱 분명해졌다.

나리는 눈꼬리를 치켜뜨고 자신의 오감 신경과 신체 강화 어빌리티를 최대로 올렸다. 그러자 간호병인 가이드가 군의관을 뒤로 물리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나리 중사. 군 병동 내입니다. 파장을 거두십쇼.”

- 이 중사?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5분, 아니 3분만 진정하고 기다리십시오.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다 설명할 테니까…….

“통화 종료.”

나리는 주환의 통화를 껐다.

주환의 목소리 너머로 들리는 공간의 울림, 빵빵하고 울리는 차 소음, 바람 소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 중사가 벌써 깨어났다고?’, ‘부함장님, 아직 배가 준비되지 않았는데요.’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나리는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는 C1 구역의 군 병동이 아니다.

자신이 잠에 빠진 사이, 누군가 옷을 갈아입혔고 어디론가 옮겼다.

“이나리 중사, 군 병동 내입니다. 파장을 거두고 의료진의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왜 어느 소속인지 대답을 못 하십니까? 두 분 모두 어느 소속인지 왜 밝히시지 않으십니까?”

“…….”

군의관과 간호병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나리는 침대 위에서 문 쪽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이나리 중사!”

“코드 레드부터 눌러!”

나리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애애앵거리며 코드 레드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66F, Code Red, 66F Code Red. 에스퍼 4201A001, 이나리. 66F Code Red…….]

“으윽!”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공격적인 알람 소리와 번쩍번쩍 시야를 교란하는 불빛에 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출구는 마취 총을 꺼내 든 간호사들과 가이드가 막아서고 있었다.

[박주환 소령의 통화 연결(2)]

시끄러운 알람이 번쩍거리는 중에도 주환은 나리에게 계속 통신을 걸었다.

나리는 반대편 복도 쪽으로 뛰었다.

“66층…….”

빈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보이는 광경은 아까 자신이 봤던 것이 아니었다. 까마득한 고층 빌딩들이 불빛을 환하게 비추며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으로 내려갈 수 없다. 저 창문을 깨고 유리 틈새를 잡아 가면서 내려가야 한다. 한 번의 실수로 추락하면 쉴드와 부유 어빌리티로 살 수 있을까?

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멈춰! 이나리 중사!”

전기 충격기와 마취 총이 쏘아졌다. 나리는 벽에 있는 난간을 밟고 올라 복도 벽을 짚고 천장에 달린 환풍구를 발로 차올렸다.

카앙!

얇은 철창이 구겨져 떨어지고 나리는 반동을 이용해 환풍구 안으로 들어갔다.

“윽.”

생각보다 좁았다. 겨우 어깨와 골반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꽉 끼었다.

[박주환 소령의 통화 연결(4)]

“위에 있어! 위에!”

[박주환 소령의 통화 연결(5)]

다급하게 몰려드는 소리가 환풍구 안을 울렸다. 나리는 이를 꽉 깨물고 기었다.

핑! 팅!

열린 환풍구를 통해 마취탄이 튀는 소리가 나리를 뒤쫓았다.

띵.

[이 중사, 진정하고 내려와! 지금 그 위에서 저항해 봤자 도망칠 곳은 없어.]

“…….”

나리는 손목에 건 워치를 물어뜯어 내듯이 짓씹었다. 잠금 걸쇠도 없는 실리콘 재질의 시곗줄이 어찌나 질긴지 손목에 걸려 밀려나지도 않았다.

“읏!”

나리가 워치를 벗겨 내려고 하자 갑자기 손목 안쪽에서 따끔하게 무언가가 찔러 들었다. 그게 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계속 앞으로만 나가던 나리는 서너 발짝 기어가다가 푹 쓰러졌다.

❖ ❖ ❖

으, 으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리의 온몸이 스트랩에 묶여 있었다. 발목에서부터 이마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눈에는 안대,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하는 것, 손가락을 까닥까닥 꼼지락거리는 게 다였다.

“정신이 듭니까?”

“…….”

꿈인가…….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래,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던 거 같아.

눈앞을 가리는 섬유 가닥의 틈으로 보이는 흐릿흐릿한 형체가 주환인 듯했다. 주환은 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나리를 주시하더니 자기 손목을 들어 나리의 바이탈을 확인했다.

“목마르지 않습니까? 궁금할 것도 많을 거고……. 재갈만 풀겠습니다.”

화한 가이딩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리의 심장은 쿵쿵 달음박질쳤다. 나리는 차오르는 숨을 색색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머리는 어지럽고 몸은 무겁게 늘어졌다. 거리가 한 뼘 안으로 가까운 것뿐인데 핏줄을 따라 흐르는 파장이 맹렬하게 반응하면서 배 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주환의 소맷귀가 귓가를 스치자 나리는 움찔거렸다.

분명 가이딩을 받았던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어지럽고 몸이 달아오르는 걸까.

툭, 입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물질이 사라지자 나리는 끅끅 차오르는 숨을 마른기침처럼 거칠게 뱉어 냈다.

주환은 나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나리의 입가에 빨대를 가져다 대었다.

“물 좀 마시죠.”

“…….”

나리는 입술을 오므리지 않고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이 중사.”

“…….”

주환은 다른 손으로 나리의 목덜미를 잡아 턱을 들어 올렸다. 쩍쩍 갈라진 입술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X월 9일, 저녁 9시입니다.”

“여기는…… 어디죠?”

“해군 기지 지하 격리실입니다.”

“아, 그렇구나? 백 번째 보직 변경 신청서를 제출한 기억이 없는데, 언제 수리된 겁니까? 소령님께서 제출해 주셨습니까?”

나리는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웃었다. 그 마른 웃음 속 쓴 비난이 주환에게 닿았다.

“소령님, 에스퍼에게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귀가 예민해서 눈치 빠르고 감도 좋거든요.”

“……남서해 해저 50M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

주환은 대답 대신 물 한 모금을 머금고 나리의 입술에 밀어 넣었다.

칼칼하게 마른 입 안에 들어오는 차가운 물이, 부드럽고 말캉한 혀의 감촉이 나리를 더 목 타게 만들었다.

나리는 이를 세우며 주환의 혀를 밀어냈지만 화하게 번져 가는 가이딩이 목구멍 안으로 꿀꺽 넘어갔다.

“으읏. 응…….”

입술을 떼자 물기를 머금어 발갛게 색이 달아오른 나리의 도톰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벌어진 채 달싹거리던 나리는 입술을 씹어 또 상처를 냈다. 역한 피 냄새, 쇠와 같은 비린 맛이 입 안에 감도는 다디단 주환의 맛을 씻어 낼 수 있게끔.

“일부러 상처 내지 마시죠.”

주환은 검은 스트랩에 묶인 채로 씩씩 숨을 내쉬는 나리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쓸어내렸다.

“소령님이야말로 가이딩하겠다는 말도 없이 에스퍼 만지지 마시죠.”

“형식적인 말이 듣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이제 제가 싫어진 겁니까.”

나리는 군법과 의무, 도덕, 개인적인 신념으로 만들어진 정형화된 틀에 잠가 놓았던 주환의 정복욕을 끓게 했다. 피 흘리며 사람이 죽어 나가는 극적인 장면보다도 지금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주환은 가냘픈 하얀 목선을 따라 입을 맞췄다.

나리는 홧홧하게 터지는 감각에 움찔거리며 제 피를 빨아들였다.

정신 차려. 가이딩에 휩쓸리면 안 돼.

〈좋아?〉

낮은 웃음소리가 섞인 물음이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나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주환이 자신을 만질 때마다 머릿속을 울리는 저 다디단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설마 박 소령님의 속마음? 아니면 내 안에 사는 엉큼한 악마의 유혹? 그것도 아니라면 환청이 들릴 정도로 심각한 정신병일까.

〈여기? 아니면…… 여긴?〉

입술에서 귓가로, 귓가에서 다시 목과 빗장뼈 아래로…… 심장 위를 지나 배꼽 근처를 훑는 촉촉한 혀의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고도 생경했다.

너, 뭐야?

대체 뭔데 내 머릿속에 있는 거야!

“아, 읏, 하으…….”

나리는 묶인 발을 바르작거리며 허리를 휘었다.

〈그러게 이병 주제에 왜 자꾸 까불어? 내가 너네 부대로 임관받으면, 어쩌려고.〉

뭐? 이병……?

나리는 우뚝 멈추고 눈을 홉떴다.

〈이나리.〉

거뭇거뭇 어른거리는 시야, 눈을 가린 이 안대 너머로 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을 저렇게 담담하게, 싸가지 없게 부를 사람이 그 남자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머릿속에 강이 스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얼기설기 뚫려 있던 작은 틈새로부터 강보다 앳된 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봐. 나랑 같이 균열 끝까지 가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