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구속
나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을 게워 냈다. 과거를 엿본 후유증이었다. 기계음이 울리는 비좁은 화장실, 변기를 잡고 신물만 뱉어 내던 나리가 고개를 들고 세수부터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턱을 손등으로 훔치고,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다가 손끝에 흉터가 걸렸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안 떠오르다가, 왜 이제야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걸까? 그것도 하필이면 주환과 키스할 때마다 강에 대한 기억이 말이다.
“박 소령님 가이딩 때문에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 거라면, 하아…….”
나리의 입에서 터진 입김이 거울 위에 뽀얗게 번졌다. 나리는 손으로 거울을 닦아 내고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뜬 얼굴과 벌겋게 터진 입술이 비쳤다.
“…….”
수도꼭지에서 물이 똑, 똑, 떨어지며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가 울렸다. 나리는 물에 비친 듯이 흐릿한 과거를 상기해 보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기억을 전부 되찾아야 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 했다.
나리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리고 크게 심호흡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나리.
이대로 답도 없는 재판대에 최 대령님을 세울 수는 없어. 아직 부대원들과 최 대령님, 모두 살릴 수 있는 무슨 방도가 있을 거야.
아무리 최강이라도 C15에 있는 균열까지 단번에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생도였던 일한, 강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있던 균열을 닫았던 날을 기억해 내면, 그들이 이번 C15 황혼 작전도 어떻게 접근할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기억을 떠올릴 만한 모든 단서를 빨리 모아야 했다. 10년 전의 사진이나 물건들부터 찾아서 말이다.
“‘멸, 집, 세’ 그리고 또 단서가 될 만한 게 뭐가 있지?”
워치를 톡톡 두드려 보았지만,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해저는 통신이 터지지 않았다. 나리가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주환뿐이었다.
“가이딩, 밖에 없나?”
나리는 화장실을 나왔다.
기기들로 엉켜 있는 미로같이 복잡하고 좁은 복도 사이사이를 지나 주환을 찾았다. 사방이 시끄러운 기계음으로 가득했지만, 본능적으로 주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박주환 소령님!”
나리는 통제실로 올라오자마자 주환의 품에 뛰어들었다. 주환의 가이딩이 땀을 뻘뻘 흘리는 나리를 시원하게 감쌌다.
“이 중사, 무슨 일입니까?”
주환은 갑자기 달려든 나리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통제실에 같이 있던 나이 지긋한 함장과 장교들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주환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이능력자가 스킨십을 통해 이능력을 발휘한다고는 들었지만, 계급장과 상황도 가리지 않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나리는 주변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주환의 옷깃을 붙잡은 채로 말했다.
“좁고 시끄럽고 숨쉬기 답답해서 말입니다.”
두근거리는 주환의 심장 소리가 나리의 귀에 닿았다. 나리는 주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박 소령님 곁에 있어도 됩니까?”
“……?”
지금, 여기에?
주환은 곤란한 표정으로 함장을 쳐다보았다.
“크흠……!”
함장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불편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만 참으면 곧 도착할 겁니다.”
갑자기 어색해진 통제실 내 분위기를 본 주환은 나리를 부축하며 통제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나리의 귀에 기계음이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서 오가는 명령은 물론 잠수함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통신 소리까지 잡혔다.
[전방 880m, 해저 1km에 A급 해수 몬스터 발견.]
[어뢰 발사 준비 완료.]
[타깃의 바이탈은 큰 고비를 넘기고 대체로 안정적입니다만, 아직 황혼 작전에 투입할 정도로 큰 회복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태평양 연합군의 괌 해상 기지에서 정확한 검사를…….]
나리는 통신을 타고 들리는 바깥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발끝을 들어 올리고 주환의 목덜미에 쪽, 입을 맞췄다.
“이 중사……?”
벌게진 주환이 멈칫거리는 때를 놓지 않고 그대로 먼저 입술을 열어 포갰다.
나리가 밀어붙이듯 키스하자, 주환이 휘청거리며 통제실 장교가 앉은 의자를 붙잡았다.
“으음.”
나리의 혀가 감기고 치열 사이사이를 오갔다. 말캉거리는 감촉을 빨아들이고 가이딩을 삼켰다.
모두 못 본 척, 전방에 있는 해수 몬스터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두 입술 사이에서 혀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해 신경이 쓰였다.
나리는 계속 귀를 쫑긋 세우고 통신에 집중했다. 그러나 강과 황혼 작전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가죠.”
주환이 입술을 떼고 나리를 안아 들었다. 조금이라도 바깥 상황을 알고 싶었던 나리는 발끝을 세워 버둥거리며 다급하게 주환을 불렀다.
“박 소령님. 잠깐만요.”
그러나 이미 주환은 긴 다리로 성큼 통제실에서 나와서 선실이 있는 아래층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A급 대형 몬스터와 해수 몬스터 떼를 피해서 우회하면 시간이 더 걸릴 텐데, 제가 쉴드를 펴고 고속 전진하는 건 어떻습니까?”
주환은 나리를 벽에 밀어붙인 후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나리의 등골을 따라 내려갔다. 그 손길을 따라 나리의 파장이 뭉텅 움직였다.
“아…….”
심장도 함께 쿠웅,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통신을 엿듣고 있던 걸 주환에게 들킨 것이다.
통제실 쪽으로 퍼져 있던 나리의 파장이 주환에게로 쏠리기 시작하더니, 그 이외의 것들이 모두 차단되었다.
그리고 손에 닿는 그의 단단한 어깨, 옷감 아래 촘촘하게 짜인 근육의 작은 움직임, 펄떡거리는 혈류를 따라 에스퍼의 감각을 끌어당기는 심장 박동만 선연했다.
“하아.”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나리의 예민한 귓가를 간지럽히며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감정까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이나리. 나만 봐.’
‘평소 최강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잖아.’
‘매번 널 짜증 나게 하는 사람에게서 뭘 찾고 싶은 건데?’
주환은 나리의 하얀 목덜미를 깨물었다. 나리는 제 심장을 움켜쥔 가이딩에 움찔거리며 주환을 붙잡았다.
“바, 박 소령님…….”
또다.
아무리 가이딩에 휩쓸리지 않게 자신의 파장에 제동을 걸어 보려고 해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나리의 쉴드가 화악 넓게 퍼져 나가며 잠수함 전체를 단단하게 감쌌다.
쿵쿵, 쿵쿵!
빨라지는 심장 소리가 뇌를 내리치고 까맣게 묻힌 나리의 기억을 뒤흔들었다.
컨트롤 리밋을 돌파했던 때처럼, 나리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지럽고 뜨겁고, 주환의 가이딩을 더 들이켜야만 숨이 쉬어질 것만 같았다.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
나리는 주환의 어깨를 꽉 움켜잡은 제 손등을 깨물었다.
그의 혀끝에 닿는 곳곳마다 붉은 열꽃이 피어났다. 나리가 어지럽고 아프다고 하더라도 주환은 가이딩을 멈출 수가 없었다. A급 심해 몬스터가 어느새 잠수함의 속도를 따라잡은 것이다.
쿠우웅!
잠수함이 크게 흔들렸다. 쿵, 쿠웅. 쉴드에 부딪힌 몬스터가 뒤로 물러나는 듯싶더니, 커다란 입을 벌리며 계속 달려들었다. 쉴드가 없었더라면 반파되었을지도 모른다.
“윽!”
그 충격에, 주환은 나리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통제실 쪽을 돌아보니, 화면 가득히 철갑을 두른 듯한 외형의 몬스터가 비쳤다. 어뢰를 맞고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놈은 턱을 벌리고 긴 꼬리를 움직였다.
“최대 출력! 35노트로 올려!”
함장의 말이 쩌렁쩌렁 울렸다.
삑삑! 울리는 기기의 경고음, 컨트롤 리밋을 알리는 워치까지 시끄러웠다. 그래도 작전대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상황을 파악한 주환이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자신의 심장 위를 움켜쥔 채 굳어 있었다. 멍하니 벌어진 붉은 입술이 뭐라고 웅얼거렸다.
“이 중사?”
주환이 나리를 흔들었다.
초점이 흐릿한 나리의 두 눈에 주환이 비쳤다. 나리의 긴 속눈썹이 천천히 날갯짓하더니,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떨어졌다.
“괜찮습니까?”
하나도 안 괜찮아.
나리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컨트롤 리밋까지 간 탓에, 나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한 우주 속에 첨벙 빠졌다가 건져진 것처럼 온몸이 뻣뻣했다.
결국 나리는 찬 바닥에 옆으로 돌아누워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덜덜 떨었다.
주환은 다정하게 나리를 끌어안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리의 파장을 보듬어 주었다.
“최고 속도로 운행하고 있지만, 또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
“선실로 내려가죠.”
“…….”
주환은 삽시간에 기력을 잃고 늘어진 나리를 안아 들려고 했다. 그러나 나리는 바들거리는 두 팔로 주환을 밀어내더니, 바닥을 짚고 엉금엉금 비켜났다.
“콜록! 큽, 콜록콜록.”
가이딩이 이런 거였나?
나리는 막힌 숨을 몰아쉬면서 기침을 해 댔다. 주환의 가이딩은 에스퍼의 파장을 돌보지 않고 심장을 쥐고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겨우 멀쩡해진 사람 진을 다 빼놓고 또 다 괜찮아질 거라며 다독이듯 손을 대겠지.
“이 중사, 잡으십시오.”
주환이 손을 내밀었다.
“…….”
나리는 주환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손을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묻어 둔 기억을 볼 수 있었다.
나리는 씁쓸한 입 안을 혀로 쓸면서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제게 가이딩 고지하시는 겁니까? 파장 수치를 정상으로 만든 다음에 또 한계까지 끌어 내릴 거라고?”
나리의 딱딱한 말투에 주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의 손을 밀쳐 낼 것처럼 말한 것과 달리, 나리는 주환의 손을 꽉 쥐고 몸을 일으켰다.
“제 어빌리티는 제가 더 잘 씁니다.”
“윽……!”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에 주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나리는 코앞 정도로 가까워진 주환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제 쉴드 어빌리티도 컨트롤만 잘하면 적을 공격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박주환 소령님께서는 저 몬스터 녀석의 약점 좀 알려 주시죠.”
“…….”
주환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