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내 이름은 유일한, 이 구역 천재죠!
“아직 작전 안 끝났어.”
“압니다! 그러니까 전투 복귀하려고 가이딩 받는 중이잖아요!”
“내가 언제 너더러 전투 복귀하라고 했어? 부상자는 그냥 저기 누워 있어!”
“허어? 가이드 없는 대령님께서 제 쉴드 없이 파장 쓰시다가, 에스퍼들 다 파장 엉키고 역류하면, 그대로 죽으라는 소립니까? 부상자들은요? 부대에 있는 일반인 행정관분들과 군의관님들, 연구소 관리자분들은요?”
“그걸 네가 왜 걱정해! 이나리, 네가 연대장이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복귀 준비를 하던 사람들 모두 얼어붙은 채로 숨을 죽였다.
나리는 시큰해지는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무리 굴리고 구박해도 강의 결정은 언제나 옳았었는데…….
이젠 모르겠다.
머리와 심장이 저 모순덩어리 때문에 뒤죽박죽된다.
나리는 울컥 목이 메어 왔다. 강 때문에 미칠 듯이 화가 나는데 그런데도 강을 걱정하는 자신이 짜증 나고, 제멋대로 가슴이 지끈거려서…….
“흐읍.”
꼿꼿하게 서서 저 싸가지에게 따져야 하는데, 이럴 거면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 먹겠다고 100번째 전역 지원서를 던져야 하는데. 쏘아 댈 말이 너무너무 많은데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뭘 봐. 복귀 준비하랬지!”
강이 나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리는 풀어 헤쳐진 앞섶을 움켜쥐고 휘청거렸다.
아씨, 심장이 찢어질 거 같다.
이건 분명 가이딩 부족 때문이 아니라 화병 때문일 거다.
❖ ❖ ❖
철컥.
기자들이 피신한 본관 창고 문이 열렸다. 벽에 붙어서 덜덜 떨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다친 곳은 없었지만 지금 당장 죽을 정도로 놀라서 심장이 펄떡거렸다.
하나, 둘……. 머릿수를 세던 호위병이 이상 없다고 보고했다. 일한은 밖을 한 번 더 살폈다.
불이 붙은 몬스터들이 철창을 넘어 군부대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가이딩으로 불길을 잡고 몬스터를 쏴 죽여도 불붙은 몬스터가 뒹굴면서 마른 화단과 천막에 불이 옮겨붙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일한이 정신을 잃은 민희를 꽁꽁 묶어서 호위병에게 넘겼다. 그리고 두 손을 펼쳐 순간 이동을 했다.
이번엔 창고가 아니었다.
매캐한 연기와 총성, 괴기한 비명이 실린 바람이 뺨을 스쳤다. 무수히 많은 별이 촘촘하게 박힌 밤하늘 아래, 울퉁불퉁 꺼지고 무너져 내려 허허벌판으로 변해 버린 훈련장 위였다.
“허, 허억!”
“꺄아악!”
기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주저앉았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겠다고 하더니 정작 도착한 곳은 몬스터가 날뛰는 전장 한복판이었다.
그냥 전기가 나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전자 기기가 먹통이었다. 신고는커녕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어디 지하실에 숨어 있어도 살까 말까인데. 저 자식이 미친 게 아닌가?
“전 지, 집으로 보내 주세요.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죽어도 내 새끼랑 가족들은 보고 죽는 게 낫지……. 어흐윽!”
“그, 여기, 전기도…… 끊기고……. 저희가 가진 통신 장비도 다, 작동이 안 되는데 군 지원은 받을 수 있는 거겠죠? 아니면, 꼼짝없이 죽는 거 아닙니까? 저흰, 일반인이에요…….”
“으흑! 아아아……! 난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아아, 겨우 이 정도에 공황이 올 줄이야.
일한은 한숨을 쉬었다.
일한과 같이 어려서부터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훈련된 군인과 몬스터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마치 제 세상이 마지막 낙원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가 제일 안전한 곳 맞습니다. 제 말만 잘 들으시면 절대 안 죽을 겁니다.”
일한은 제 발목을 잡고 애원하는 기자에게 총을 넘겨주었다.
“인생은 장비발이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예, 예?”
“이 괴수용 총만 있으면 꼬부랑 할머니도 몬스터와 싸울 수 있어요.”
일한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생긋 웃으며 총을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상냥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게 잠금장치고, 총은 이렇게 잡고 어깨에 견착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스코프에 눈을 대고, 좋아요.”
이 아수라장을 통제할 수 있다는 S급 가이드의 자신감에 안도하기는커녕 그냥 미친놈 같아서 무서웠다.
“자, 이제 검지에 살짝 힘을 실어서 방아쇠를 눌러 봅시다.”
탕!
“악!”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과 함께 엉성한 폼으로 덜덜 떨던 기자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켁, 퀘에에!
“오, 맞히셨네요.”
맞힌 건지 아닌지 알 게 뭔가! 사방에 널린 게 몬스터인데!
“훌륭한 에임입니다. 저희 연대 훈련병보다도 소질이 있어 보이시네요. 진지하게 입대를 고려해 보세요. 공무원, 아주 좋은 직업입니다. 기자보다 군인이 연봉도 높고 군인 가족 혜택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S급 가이드에게 칭찬과 함께 입대 권유를 받았지만,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오, 온다! 온다! 몰려오잖아!”
“아아악!”
일한은 무너져 내린 훈련장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엎드리세요.”
일한의 말 한마디에 호위병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잡아 땅바닥으로 바짝 내렸다. 그리고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총을 겨눴다.
땅이 울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두 눈을 질끈 감았던 기자가 살짝 실눈을 떴다.
훈련장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일한이 두 팔을 걷어 올리고 크게 심호흡했다.
화르륵!
철책을 따라 흐르던 불의 파장이 일한의 가이딩을 따라 채찍처럼 휘며 땅을 할퀴었다.
파츠즉!
불꽃을 피해 도망치던 몬스터가 반대쪽에서 휘몰아치는 불길에 삼켜졌다.
몬스터도 타고, 삭막한 군부대 분위기를 설레게 해 주던 꽃나무도 타고, 족히 100년은 더 살았을 소나무도 타고, 뜨거운 자외선을 가려 주던 천막들도 타고, 지상 주차장에 세워 둔 차도 펑펑 터지고, EMP에 고물이 되어 버린 전자 현수막도 활활 탔다.
“후으…….”
일한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나마 자신과 매칭률이 높게 나올 만한 에스퍼의 파장을 끌어왔는데도 컨트롤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고 몬스터의 수는 많았다.
일한의 가이딩 범위 밖으로 물러난 몬스터들은 건물 위에서 쏟아지는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쿠워어어!
트럭보다 큰 거대한 몬스터가 다른 몬스터들을 걷어차면서 쿵쿵 뛰어왔다.
그것의 눈에, 한데 모여 있는 기자들과 S급 가이드는 환상적인 뷔페요, 임금님의 12첩 반상이었다.
타다다당! 타다다다!
호위병들이 총을 쏘고, 멀리서 저격수가 몬스터의 머리를 노렸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손에 잡히는 몬스터들을 사방으로 집어 던졌다.
얼마나 힘이 센지 개만 한 몬스터가 종잇장처럼 날아가 두꺼운 방호 필름을 씌운 창문을 깼다.
아아, 저게 얼만데!
일한은 턱을 툭 떨어트렸다.
벽을 기어오르던 거미 몬스터까지 뚫린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쯧쯧, 저거 봐요. 내 말이 맞죠? 건물 안으로 이동했으면 큰일 났었습니다.”
몬스터 잡겠다고 건물 안까지 불을 지를 수는 없었다.
일한은 밤하늘 위로 넘실거리는 에스퍼들의 파장들을 쳐다보았다.
밤을 밝히기 위해서 쓴 불의 파장, 발화와 폭발 어빌리티, 말고 그다음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파장은 힘의 파장, 염력이나 파장력 어빌리티.
일한은 파장 어빌리티를 끌어와 땅 위를 내리쳤다.
쿵!
땅이 들썩거리자 내달리던 몬스터들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대형 몬스터도 비틀거리며 무게 중심을 잃는가 싶더니 다시 일한 쪽으로 내달렸다.
빠르다.
일한은 중력을 가하며 몬스터를 짓누르고 불타오르는 차들을 움직여 길을 막았다.
“강아, 빨리 좀 와라. 공간 제어에 쉴드만 있으면 이 녀석들 금방 처리하는데.”
강은 아직도 멀리 있는지 겨우 단거리 이동만 할 수 있을 정도로 파장이 약했고, 캄캄하게 꺼진 워치 덕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
일한은 갑자기 훅 나타난 새로운 파장을 보고 씩 웃었다.
웬만한 상급 가이드가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가 없는 은밀한 파장이었다.
“그냥 다 같이 오지, 선발대부터 보냈냐?”
일한은 투덜거렸다.
출렁거리는 살가죽이 짓이겨지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형 몬스터 녀석은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쿵! 쿠웅! 쿵!
화염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길을 막은 차량을 밀치던 녀석이 몸을 낮추더니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팔로 차체 밑을 잡아 홱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높이 추켜든 차체를 일한에게 던졌다.
“소, 소령님!”
뒤에서 지원 사격을 하던 호위병들이 일한을 불렀다.
일한은 두 팔을 뻗어 공중에 던져진 차량의 궤도를 틀었다.
콰앙! 쿵! 쿵…… 파아앙!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비껴 나간 차체가 폭발했다. 그리고 몬스터들을 짓누르던 중력이 사라졌다.
갑자기 씨름하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대형 몬스터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굴렀다.
방어선이 뚫렸다.
뒤로 물러나 있던 몬스터 떼가 눈에 불을 켜며 들이닥쳤다. 그러나 화염과 연기가 가신 훈련장 중앙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퀘에엑!
이곳저곳 그을린 몬스터들이 신경질적으로 주둥이를 쩍쩍 벌리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
이제 죽는 줄 알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떨고 있던 기자들은 몬스터들의 이상 행동에 하나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쉿, 일한이 손짓하며 그들에게 조용히 몸을 낮추라고 지시했다.
몬스터들은 그들의 바로 옆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지나갔다.
은신.
좀 전에 발견한 반가운 파장이었다. 일한이 해란의 파장을 잡아 모두에게 씌워 몬스터의 시야와 감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피잉, 픽!
건물 옥상에서 쏴도 닿지 못할 정도로 먼 가장자리부터 영문을 알 수 없는 은밀한 죽음이 서서히 다가왔다.
일한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해란 중위, 그대로 제1 훈련장 쪽으로 몬스터를 몰아오세요.”
일한의 지시를 들은 해란은 소음기를 장착한 총구를 내리고 뒤따라오는 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넓혀서 천천히 몬스터를 훈련장 쪽으로 몰았다.
퀘엑! 쉬쉬익!
형용하기 힘든 여러 괴물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훈련장 철책 안까지 몬스터를 몰면 땅에 엎드리십시오.”
일한은 조용히 무릎 꿇고 앉아 해란의 신호를 기다렸다.
잠시 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섬광탄이 쏘아 올려지고 자신의 머리 위로 강의 파장까지 또렷하게 느껴졌다.
온다.
일한은 양손을 땅 위에 대고 가이딩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