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저 두 사람, 예전에도 저랬습니까?
일한이 정한 반경과 범위를 따라 공간이 살짝 어긋났다.
딱, 3초. 지상에서 45cm 위.
살짝 어긋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인데 훈련장 안에 있던 몬스터들에게 붉은 선이 그어졌다.
꺼, 거걱…….
일한을 향해 내달리던 대형 몬스터의 코끼리만 한 네 다리와 꼬리에 붉은 빗금이 쳐지더니, 3초 동안 움직인 만큼의 뼈와 근육, 혈관이 어긋나면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웅!
고통에 찬 괴성과 함께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일제히 쓰러졌다. 어느 것은 팔다리, 어느 것은 머리, 또 어느 것은 허리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사람,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만 멀쩡했다.
“허, 헉…….”
갑작스럽게 여기저기서 터지는 피 보라에 기자들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을 뿐이었다.
“아! 다들 밟히지 않게 피하세요. 낙하까지 3, 2, 1…….”
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얀 빛무리가 번쩍였다.
선봉대는 부대 밖으로 이동시키더니만 강이 속한 후발대는 정확히 훈련장 위로 떨어졌다.
“악!”
“허억! 죄, 죄송합니다!”
훈련장 위에 엎드려 있는 사람 위로 떨어진 병사들은 행운아였다.
피 분수를 일으키며 꿈틀거리는 몬스터 위로 떨어진 에스퍼는 이동하자마자 날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중 나리는 날벼락과 행운, 그 복불복에서 벗어난 유일한 예외였다.
강은 몬스터의 머리를 콱 짓이기며 착지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축 늘어진 나리의 팔다리가 흔들렸다.
“최강, 많, 이…… 늦었네?”
일한은 백지장처럼 새하얀 나리의 얼굴을 보고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최강이 나리에게 뭔 짓을 한 건가, 또 나리의 스위치를 건드려서 프로그램이 발동한 건가, 아니면 박주환 때문에 컨트롤 리밋을 돌파하고 기력이 다한 건가.
“어떻게 된 거야?”
일한은 강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일한의 온건한 가이딩이 무섭게 날이 선 강의 파장을 스윽 감싸며 훑었다.
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한의 팔을 뿌리쳤다.
“상황 보고는 내가 먼저 들어야 하지 않나?”
그러고는 자신에게 손도 대지 말라는 듯이 파장을 가시처럼 뾰족하게 세우며 따졌다.
“오후 2시경 EMP 공격 후, 공군의 제트기가 저공비행으로 위협했어. 다행히 공격은 없었지만 그사이에 저 손님이 군부대에 침입했지. 그리고 해가 지니까 몬스터가 쳐들어오면서 난장판이 된 상황이야.”
“하, EMP라…….”
그제야 일한과 연락이 되지 않았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캄캄한 건물과 타오르는 철창, 부대 안으로 넘어오는 몬스터들까지 가관이었다.
“솔개 팀은 부상자들 병동으로 인계하고, 알파 1팀은 동쪽 숙사에 있는 팀과 합류, 알파 2팀과 3팀은 본관과 별관 건물 쪽을 맡는다.”
“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원들과 달리 주환은 강을,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리를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강은 할 말 있냐는 듯이 주환을 쏘아보았다.
“이나리 중사, 부상자입니다. 병동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주환은 터진 입술을 쓸면서 강을 노려보았다.
쌤통이다, 박주환.
일한은 누가 봐도 한 대 맞은 듯한 주환을 보며 픽 입꼬리를 올렸다.
“나리 중사, 괜찮아요? 어쩌다가 안색이 이리 새하얗게 질렸어요? 박 소령이 가이딩 제대로 한 거 맞아요?”
일한이 걱정스럽게 말하며 나리에게 손을 뻗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가이드 놈들은 속이 다 시커멨다.
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환과 일한을 피했다.
“유일한 소령과 박주환 소령은 저기 민간인들, 그리고 황에덴도 맡아서 병동으로 이송한다. 이나리 중사는…….”
강은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리는 양 뺨에 불만을 한가득 부풀린 채로 삐죽삐죽 욕을 하고 있었다.
“넌…….”
나, 뭐? 나 부상자라며?
나리는 강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만 있으라고 해서 손가락 한 마디도 까딱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예 못 움직일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지만, 기운도 없고 속은 메슥거리고 아직 어깨도 성하지 않은 부상자는 맞으니까.
최강에게 나 없는 전투가 얼마나 힘들고 곤란한 건지 상기시켜 줄 겸 10년간 쌓인 울분을 다해서 아무것도 안 할 것이다.
내 발로 걷지도 않을 거고, 총도 안 쥘 거고, 입 다물라고 했으니 말도 안 할 거고!
“상황 봐서 쉴드나 쳐.”
“네.”
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리는 제 피부 위에 두껍게 쉴드를 쳐서 강과 닿는 곳이 없게 했다.
“…….”
강이 나리를 쏘아보았다.
“…….”
나리는 단단히 삐졌다는 티를 내며 강의 시선을 피했다.
두 에스퍼의 살벌한 분위기에 담당 가이드 두 사람은 서로 힐긋 눈치를 봤다.
이게 과연 좋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 ❖ ❖
“두 사람, 예전에도 저랬습니까?”
주환이 앞서가는 일한에게 넌지시 물었다.
“예, 뭐. 매번 그랬죠? 그래서 나리 중사 별명이 개나리입니다. 미친개처럼 강한테 덤벼든다고 해서, 개나리.”
일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하하 웃었다. 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예전에 둘이 사귀었을 때도 저랬냐고.”
“…….”
일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왜 갑자기 그때를 묻는 걸까.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걸 왜 묻습니까?”
역시나 일한이 순순히 얘기해 줄 리가 없었다. 주환은 일한을 쓱 훑어보고는 터벅터벅 그를 지나쳤다.
하, 됐다.
나리도 기억 못 하는 옛날 일을 들어서 뭘 어쩌려고. 내 기분만 상할 일 말고 더 있겠나.
“강이 못 참고 또 나리 중사를 몰아세웠어요? 과거를 들먹거리면서?”
일한이 주환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주환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김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왜 이 시기에 특수 연대 작전에서 에스퍼들을 묶고 다치게 했는지 몰라도 나리가 최강과 얽혀 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건 분명했다.
3개월 내에 해군으로 복귀하라고 했던가. 이제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그래야겠어.”
주환은 혼자 중얼거리며 철컥, 탄창을 장전했다.
“박 소령?”
일한이 불렀지만 주환은 대꾸 없이 앞장섰다.
“하!”
일한과 주환의 말을 들은 에덴이 혀를 차면서 이죽거렸다.
“뭐야. 최강이 저 여자랑 사귀었었어? 그래서 나랑 페어도 안 하겠다 한 거야? 어쩐지.”
일한은 두 팔이 묶인 채 들것에 실린 에덴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랑 나리 중사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니까.”
“지금 내 앞에서 그 여자 감싸려고 하지 말지?”
“황에덴 생도. 최강 녀석은 나한테도 가이딩을 안 받거든요. 가이딩포비아라서.”
“…….”
에덴은 강을 처음 보았던 패닉룸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자신이 아직 어려서 실험 차원으로 가이딩을 주입한 줄 알았는데.
“여태껏 나랑 페어인 이유도 내가 남자이고 이성애자이고, 그리고 꽤나 유능한 가이드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계약 해지해서 여자, 가이드랑 붙어먹을 걸 생각하면 연구소에서 당한 게 생각나서 공황 발작 올걸요?”
“……뭐?”
“황에덴 생도가 저 녀석을 많이 배려하고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그보다도 저만큼 유능해야 강과 페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을 드린 겁니다.”
일한이 싱긋 웃었다.
에덴은 기가 찼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걸까. 그전에는 강의 가이딩도 해 보라면서 자리를 비켜 주기까지 했는데!
“황에덴 생도가 조급하게 판단을 내린 바람에 오늘 다친 사람들이 저리 많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반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별것도 아닌 B급, C급 에스퍼잖아?”
에덴은 당사자들 앞에서도 아주 당당했다.
연구소에서 자란 애들은 다 왜 저리 정신적인 이상이 있는 건지. 일한은 에덴의 턱을 쥐고 올렸다.
“황에덴 생도님, 지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나 봅니다?”
“윽.”
“가이딩은 그렇게 하는 게 아냐.”
웃음기가 지워진 일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어두워졌다.
“저렇게 에스퍼의 파장을 갉아서 맞추면 전투 불능이 될 정도로 정신이 나가는데…… 누가 생도님이랑 페어 하고 싶겠어?”
“……으윽.”
짓눌린 에덴의 입에서 침이 흐르며 일한의 손을 적셨다.
“그런 가이딩은 센터에서도 못 써먹을 텐데 황현균 대통령님은 황에덴 생도를 어떻게 하려고 이러시는 걸까……?”
에덴은 일한의 팔을 잡고 손톱을 세웠다. 일한이 씩 웃으며 공중에 충만히 흐르는 강의 파장을 끌어왔다.
흥.
에덴도 파장을 끌어와 제 주위를 돌게 했다. 별의별 파장이 에덴의 주위를 돌며 띠를 이뤘다.
“내가 더 뛰어난데 어디서 훈수질이야?”
에덴은 제 능력을 자랑하며 위협했지만 일한은 못 본 척 에덴의 어깨를 툭 밀었다.
에덴은 무게 중심을 잃고 들것 밖으로 떨어졌다.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코가 깨질 줄 알았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땅이 푹신했다.
“?”
창으로 달빛만 들어오는 캄캄한 병실의 침대 위였다.
“으윽.”
에덴은 아픈 다리를 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여긴. 유일한! 최강! 야아악!”
에덴이 소리치며 몸을 뒤틀었다. 등 뒤로 묶인 팔목 때문에 침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진짜로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누구, 누구 없어? 아무도 없냐고! 아파! 여기 총 맞아서 아프단 말이야! 이러다 과다 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무도 없었다.
제 몸에 두르고 있던 파장의 띠도 사라지고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