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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87)화 (8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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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나 지금 가이딩 중이야. 바빠. 나중에 걸어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보낸 정신계 에스퍼 요원이라는 걸.

그녀가 파장을 쓰기 전에 쏴 죽여야 했다. 그러나 방아쇠에 걸린 장대신의 손가락이 얼어 버린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할.

장대신은 이를 갈면서 낮게 탄식했다. 그리고 바로 태세를 바꿔 활짝 웃었다.

“아아. 국, 국정원에서 왔나? 위에서 연락은 받았지? 내가 그 장대신 소령일세. 어, 언제…… 악!”

그가 버벅거리며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여자는 두세 걸음 더 다가왔다.

“아, 씨X. 이 아저씨 말 X나 많네.”

여자가 여유롭게 장대신의 총을 쳐 내고 엄지와 검지를 펴서 그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그러더니 씹던 껌으로 풍선을 불어 터트렸다.

“증거 있냐고.”

여자는 자신의 검지로 장대신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없지?”

껌을 씹고 있는 붉은 입술에서 비아냥거림이 새어 나왔다.

쉽게 얻은 권력에 취해 허세만 부리고 실속은 없는 사람. 그게 장대신이었다. 편하게 입만 놀린 그가 증거를 모아 놨을 리 없었다.

“……그, 옆에서 18년을 보좌한 심복인 내가 산증인인데, 아무것도 없겠나?”

장대신은 나지막이 웃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창밖의 불꽃이 화르륵 치솟았다. 옥상에서 땅을 훑는 빛줄기가 어지럽게 오가며 모자챙에 가려졌던 여자의 싸늘한 눈이 드러났다.

“미친 개새끼는 제 능력을 밝히지 않는 법인데, 내 능력은 보다시피.”

장대신의 쭉 뻗어 있던 팔이 덜덜 떨리면서 움직이더니 자신의 턱밑에 총구를 들이댔다.

“……이렇거든?”

“…….”

“군인 아저씨, 내가 좀 바빠서 시간이 5분밖에 없어.”

“으…….”

장대신은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자신의 손가락을 저지하려고 했다.

여자가 껌을 씹는 소리가 초침이 지나가는 소리처럼 정적 속에 크게 울렸다. 여자가 장대신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얘기하기 싫어? 그럼…… 나랑 같이 우리 회사에 좀 갈까? 거기에 빙의를 아주 잘하는 언니가 있어. 그 언니가 요즘 군부 침투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그랬는데 잘되었네.”

총구가 장대신의 두꺼운 턱살에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덜덜 떨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집 금고에 이, 이능력자 연구소 MGQ 프로젝트, 케이스 넘버 00015SS08이고 액세스 코드는…….”

타앙!

총성이 복도를 울렸다. 장대신이 털썩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후.”

무심하게 검지를 거두고 풍선껌을 터트린 여자가 얼굴과 옷에 튄 핏자국을 슥 닦았다.

그리고 장대신이 열어젖힌 옆문을 똑똑 두드렸다.

여자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계세요?”

조용했다.

여자는 다시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저는 부대에 억류된 기자님들을 안전 구역으로 모시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거기 계신 거 다 알고 있었어요. 해치지 않을 테니까 나오실래요?”

“…….”

“문 너머에 있다고 제가 파장을 못 쓰는 게 아닌데……. 참 번거롭게 하시네요.”

여자가 손을 뻗어 문에 대었다. 그리고 손끝에서 뱀과 같은 파장을 흘려보냈다. 종이 1장 들어갈까 했던 문틈으로 파장이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헉.

문 너머 안에 있던 기자들과 호위병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두 손으로 비명을 막고 구석으로 가서 덜덜 떨었다.

“어, 어, 어어…….”

벽에 붙어 있던 기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자 겁먹은 기자가 다른 사람들을 붙잡으며 애걸복걸했다.

“나…… 나 좀 어떻게 해 줘요. 어, 어떡해. 어떡해……!”

그러나 사람들은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벽에 더욱 바짝 붙었다. 중년의 여자 기자는 비척비척 이상한 걸음으로 문 앞까지 다가가 덜덜 떠는 손을 뻗었다.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 아줌마 뭐 해!”

“어흐윽! 나 좀 잡아 달라고요! 내, 내 몸이 말을 안 듣는다고!”

기자가 흐느끼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제야 놀란 호위병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달칵, 잠금 쇠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문 밖에 서 있던 여자는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멨다.

그때였다.

“윽!”

하얀 노끈이 여자의 목을 감아 바닥으로 넘어트렸다.

불시에 습격한 남자는 버둥거리는 여자의 다리를 누르며 옴짝달싹 못 하게 제압했다.

여자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괴한의 손목을 잡고 파장을 침투시켰다.

어?

그런데 그녀의 파장이 남자의 피부를 꿰뚫을 수가 없었다.

“가, 가이드……?”

“그쪽 회사에 인재가 없네요.”

일한이 말했다.

“일 처리도 너무 과격하고.”

일한은 바닥에 놓인 장대신의 팔과 검게 번져 나가는 피를 보면서 혀를 찼다.

여자가 바르작거리며 일한을 차고 구속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쥐새끼 씨가 파장을 쓰는 바람에 쉽게 찾았어요.”

일한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얼마나 운도 좋은지. 제가 찾던 미니 마우스 씨가 직접 올 줄 전혀 몰랐거든요.”

미니 마우스?

“크……윽.”

“반갑습니다.”

일한이 생긋 웃었다.

“윤소민 씨, 아시죠?”

일한의 질문에 여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윤소민이라면.

전에 회사에서 데려오라고 했던 그 조그마한 가이드였다.

“모릅니까? 그러면 내가 찾던 분이 아니시네. 죄송합니다.”

일한은 무심하게 사과하면서 끈을 더 당겼다.

“끄으윽…….”

여자는 이제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급하게 일한의 팔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윤소민 씨 아십니까?”

알아. 안다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한이 손을 풀었다.

“케엑! 켁, 콜록콜록, 흑! 콜록, 콜록…….”

여자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끔벅거리며 자국이 난 목을 잡으려고 했다.

“아, 워치.”

일한은 바로 그녀의 팔을 꺾어 손목에 찬 워치를 빼냈다.

“아악.”

“EMP 떨어지고 나서 오셨군요. 멀쩡하게 작동하네. 이것 좀 빌릴게요.”

“미, 미친!”

여자는 일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일한이 더 빨랐다.

일한이 두 손으로 에스퍼의 머리를 잡고 씩 웃었다.

“쥐새끼 씨는 내가 여기 정리할 동안 한숨 주무세요.”

여자는 머릿속이 갑자기 멍해지면서 나른하게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고 시야가 검게 물들어 갔다.

풀썩 쓰러지는 에스퍼를 잡고 일한은 워치를 두드렸다.

[생체인식부적합.]

에이.

요원들의 워치는 또 뭔가가 다르긴 다르구나.

일한은 다시 여자의 손목에 워치를 채우고 여자의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생체인식통과.]

[메시지 1개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여자의 손끝으로 ‘확인’을 눌렀다.

[김민희, 너 어디야. 자료는?]

쯧쯧. 아무리 몰래 침투해서 정보를 빼내 오는 작전이지만 어떻게 군부대에 혼자 보낼 수가 있지?

일한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그녀의 무능한 상사를 탓했다. 그녀를 찾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제일 급한 사안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나리 중사?”

- 유, 유 소령님?

당황한 나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

“네. 접니다. 나리 중사, 왜 이렇게 복귀가 늦습니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 예? 으, 그…… 무, 무슨 일이라뇨. 작전 성공했습니다. 그, 런데…….

무슨 일이 있는지 나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흐음.

일한은 눈을 반쯤 뜨고 낮은 침음을 길게 흘렸다.

“……그런데에?”

- 잠시만, 최 대령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부스럭거리며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 가이딩 중이야. 바빠. 나중에 걸어.

뚝, 끊겼다.

“…….”

일한은 여자의 팔을 툭, 떨어트렸다.

창밖의 불꽃이 화르르륵 치솟았다.

“박……즈화안…….”

이 자식이.

일한은 다시 매섭게 워치의 잠금장치를 풀고 통신을 걸었다.

“최강. 나다.”

- 유일한? 뭐야, 이 워치는.

“박주환이랑 나리 중사 어디 있어? 좌표 당장 불러.”

- 부대는 어떻게 됐어?

“야! 부대가 활활 타오르든 몬스터가 지랄을 하든 지금 그게 중요해? 당장 좌표 안 불러!”

- 씨X.

그러고는 뚝, 끊겼다.

서로 딴말만 하다가 7초 만에 말이다.

“…….”

일한은 부들부들 쥔 주먹으로 벽을 쾅 내리쳤다.

이 자식들, 부대 복귀만 해 봐라.

너 죽고 나 죽는 개싸움이 뭔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일한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하아, 아, 박 소령님……!”

이, 이건 안 되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나리가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부상자 천막 뒤, 풀숲이라고 해도 바로 저기에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가이딩은 아주 곤란했다.

굳은살이 박인 서늘한 주환의 손이 나리의 맨허리를 쓸어 올렸다. 풀어진 앞섶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잇자국을 새기던 주환이 눈을 들어 나리를 쳐다보았다.

왜.

그 한마디를 내뱉는 짙은 시선에 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 주환을 말리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자신의 두 다리를 저주했다.

“그……만해도 될 거 같습니다.”

아직 뭐 한 것도 없잖아.

주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리의 가슴을 죄던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었다.

“……!”

서늘한 탈력감에 나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주환은 보드라운 가슴살을 한 움큼 베어 물고 혀를 굴렸다.

나리는 입술을 악물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환의 어깨를 밀었다.

기력이 다해서일까. 팔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고 오히려 제 가이드를 끌어안으라고 온몸이 성화였다.

저항력 제로.

빨라지는 심박 수와 함께 이성이 녹진하게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

주환이 꽉 다문 나리의 입술을 쓸었다. 홧홧하게 번지는 노골적인 가이딩에도 나리는 두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꾹 만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주환이 나지막이 말했다.

“입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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