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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53)화 (5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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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절대로 죽지 않게 할 겁니다

400m 떨어진 곳에서 투덜대는 불평은 강의 귀에도 들렸다. 강도 열불이 활활 일어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움직여 파장을 쓰면 몬스터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려들 것이고, 호흡 맞추기도 싫은 꼬맹이의 가이딩은 SS급이라도 믿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작전에 넣긴 했지만 강은 에덴이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할 심산이었다.

나리는 어둡게 일그러진 강의 옆모습을 보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다른 때와 달리 뾰족뾰족하게 날이 선 강의 태도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을 심었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생존 확률을 떨어트리니까.

“박 소령님.”

나리는 씁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주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주환이 돌아보자 나리는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한눈팔아서 정말, 죄송합니돠악!”

“예?”

어떻게 가이딩을 효율적으로 컨트롤하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던 주환은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랬다.

나리는 허리를 90도로 굽힌 채 고개를 들어 주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한눈팔지 않겠습니다! 가이드님은 저만 믿고 가이딩 컨트롤만 하십시오!”

씩씩함을 넘어선 우렁찬 목소리가 시뮬레이션 훈련장에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나리와 주환에게 향했다. 나리는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님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절대로 죽지 않게 할 겁니다.”

오오올…….

어디선가 부러움과 시기가 섞인 야유를 보냈다. 당황한 주환은 주위를 흘끔거리며 붉어진 목덜미를 쓸었다.

“아…… 알겠습니다.”

나리가 씩 웃으며 허리를 폈다. 턱 밑에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올리고 총을 단단하게 고쳐 잡으며 돌아서는 모습 하나하나가 천천히 주환의 눈에 새겨졌다.

허!

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동요하던 에스퍼들의 귀에 맴돌던 불안감이 나리 때문에 싹 사라졌다. 정 팀장과 알파 01팀 조 팀장까지 나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강은 사람들 틈에서 멋쩍게 웃는 나리에게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으휴…….

남한테는 방긋방긋 잘 웃던 나리가 눈을 반으로 게슴츠레 접더니 자신에게는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닌가.

내가 뭐.

너도 잘한 게 하나도 없으면서, 네가 해야 할 일을 남들에게 다 떠벌리며 유난 떨어야 했나?

강이 팔짱을 낀 채로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여 인이어에 손을 댔다.

“C11 소탕 작전, 시뮬레이션 04, 준비!”

❖ ❖ ❖

여섯 번째 시뮬레이션이 끝나고 나서야 강은 해산하라는 명령을 했다. 쉬지 않고 내리 훈련만 했는데 벌써 저녁 시간을 훌쩍 지났다. 모두 기진맥진해서 식당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허, 허억.

나리는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이들을 지켜보며 양 무릎을 짚고 서서 거친 숨을 골랐다. 페어가 생기면 좀 더 편하게 임무 수행한다고 떠벌리던 사람의 명치를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이 중사.”

강이 나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다.”

헐, 웬일이래?

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을 올려다보다가 후다닥 자세를 고쳤다.

“아, 예. 대령님 입도 오늘 하루 아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강의 잇새로 싱거운 웃음이 샜다.

“가서 가이딩받고 쉬어.”

“…….”

나리는 가만히 강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은 그냥 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지나쳤는데 왜애…….

“예. 그…… 제 멱살 좀 놔주십시오.”

잘했다는 칭찬도 듣기 거북한데 멱살까지 잡힌 건…… 싸우자는 시비인 걸까?

안 그래도 목덜미에 새긴 주환의 잇자국을 가려 본다고 방한용 마스크 머플러로 꽁꽁 싸맨 나리였다. 이 따듯한 날씨에 여밀 곳이 더 어디 있다고 옷깃을 추켜올리는 건지.

강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나리의 뒤에 선 주환을 쳐다보았다.

“박 소령도 잘하고.”

“……예.”

한마디 말보다도 더 묵직한 시선이 오갔다. 사이에 낀 나리만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부하 가이딩까지 이렇게 간섭하는 상관은 온 세계를 통틀어 최강, 한 사람일 것이다.

해란은 강의 눈 밖에만 나지 말고 두 가이드와의 선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미 강의 눈 밖에 난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 편하게 좀 가이딩받게 허락해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속이 좋지 않아서, 강의 기분이 좀 나빠 보여서……. 별의별 핑계가 생기는 바람에 나리는 말할 타이밍을 자꾸 다음으로 미뤘다.

가이드한테 휘둘리지 말라는 강의 말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접촉 가이딩에 감정이 싹트고 깊게 빠져들다가 페어를 잃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유대감 때문일까. 페어를 잃었을 때 그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은 일반인보다 컸다. 해서 충격과 죄책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대개는 전역했다.

혹시 모를 극단적인 선택을 방지하기 위해 상담 치료, 장기 유급 휴가를 주기도 했고, 페어를 자주 바꾸는 가이드들도 있었다.

그만큼 30살 넘게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능력자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그래서 강은 다른 부대의 이능력자 팀보다도 더 엄격했다.

아무리 지랄맞게 굴어도 그렇지,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A급 쉴드 어빌리티 에스퍼 귀한 줄도 모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 않나, 초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기복이 널을 뛰고, 그리고 또…….

“…….”

나리는 장갑을 벗다 말고 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줄곧 봤었던 뒷모습이었다. 앞장서서 부대를 이끌던 강인하고도 듬직한 등이었고, 때로는 섬뜩하고 범접할 수 없는 파장으로 경외심이 들었던 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아프고 어쩐지 씁쓸해 보여서 나리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런 강의 등 뒤로 에덴이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연대장님, 오늘 가이딩은 어떻게…….”

“필요 없어.”

강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에덴을 떨어트리고 성큼성큼 가 버렸다. 종일 벌서듯이 서 있기만 했던 에덴은 씩씩대며 강을 째려보았다.

화가 났다.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와 시선도 맘에 들지 않았다.

“황에덴 생도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장대신 소령과 가깝게 지냈던 에스퍼들이 다가와 멀뚱멀뚱 서 있던 에덴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치레는 됐어요! 사흘 내내 뭐 한 것도 없는걸.”

씩씩거리던 에덴의 눈에 주환과 같이 서 있는 나리가 보였다.

쉴드 어빌리티밖에 쓸 것이 없는 A급 에스퍼가 이 작전의 중심에 있었다. 에덴은 SS급 가이드인 자신이 아니라 저 여자가 중심이라는 것이 제일 맘에 들지 않았다.

에덴은 빠른 걸음으로 강의 뒤를 따라갔다. 에덴이 훈련장을 빠져나가자 나리가 한숨을 푹 쉬며 군모와 통신 장비를 벗었다.

“에휴, 큰일입니다.”

다들 통감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중사가 아니었으면 오늘 저희 몇 번 죽었을 겁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이 작전이 이해가 안 간다니까? 아까 독수리 쪽에서 저 생도가 대통령 사생아라던 말, 정말인가 봐. 장 소령이랑 같이 왔다며? 장 소령이 대통령 처남이라는 건 다 알고 있는 거잖아.”

“연대장님 원래 윗분들에게 찍힌 건 우리 연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아, 혹시 유 소령님 근신 먹은 것도…….”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리는 군대 내의 줄타기와 정치에 대해서는 밝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하는 상관이 더 문제였으니까.

나리는 다시 불붙은 화제를 돌렸다.

“그게 아니라……. 최 대령님 말입니다.”

“연대장님이 왜?”

“최 대령님은 가이드 복도 좋으면서 다 싫다 하니 말입니다. 복에 겨운 것도 몰라. 하여튼 저러다가 한번 큰일 날 것 같습니다.”

❖ ❖ ❖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과연 나리의 말대로였다.

“저녁 식사, 말입니까?”

강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온 전화에 미간을 찌푸렸다.

- 에덴 아가씨와 같이 6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경호팀과 운전기사가 30분 전에 출발했으니 10분 내로 도착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젠장.

강은 일방적으로 끊긴 통화 창을 보며 이를 갈았다. 꾀병도 부릴 수 없게 수를 쓴 현균의 지시에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유일한.”

강이 일한을 불렀다.

“왜.”

게으름을 피우는 건지, 자숙하는 건지 거실 한가득 웹 화면만 펴 놓고 과자를 먹고 있던 일한이 고개를 들었다.

“정장 좀 빌려줘.”

“엥?”

일한은 입에 물고 있던 막대 과자를 툭 떨어트렸다.

“내 정장을? 너 어디 가?”

“저녁 식사.”

“누구랑?”

“…….”

강은 똥 씹은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아.”

강과 붙어 있은 지 15년, 일한은 일생의 절반을 함께 보낸 페어의 반응을 단번에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이 상대하기 싫어하면서 정장까지 차려입어야 하는 상대는 물어보나 마나 뻔했다.

“나도 같이 갈까?”

“너 오라는 말은 없었어.”

“이런…….”

일한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자신의 옷장을 열었다. 빽빽하게 걸린 옷들을 뒤적거리던 일한이 강에게 맞을 만한 정장 두어 벌을 골라 주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연대장님께서 내 처우에 대해서도 잘 말해 주길 바라. 유일한 소령이 제안했던 건이 대통령 각하께 해가 될 것이 없으니 꼭 심사숙고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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