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자기야, 일 다 했으면 우리 방에서 자야지
“박 소령님 다리 안 저리십니까? 보고서 작성 다 하셨으면 가서 주무십시오. 내일 훈련도 빡셀 겁니다.”
“……꼭 이 상황에서 유 소령이랑 자라고 날 내쫓아야 직성이 풀립니까?”
“박 소령님 가이딩에 잠이 솔솔 오긴 오는데.”
나리는 픽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주환의 허벅지를 세게 두드렸다.
“박 소령님 허벅지가 너무 탄탄해서 그런가……. 아니면 여태 혼자 자는 버릇 때문에 그런가, 졸리긴 졸린데 정신이 더 말똥말똥하더라고요.”
주환은 나리의 어깨를 잡고 가까이 상체를 기울였다.
가까이 와 닿는 숨결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에스퍼와 가이드, 서로 의존하고 공생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이 이끌리는 이 유대 관계를 네 생각처럼 쉽게 넘길 수 없을 거라는 듯이.
“바, 박 소령님, 아까 최 대령님한테 불려 가셨잖아요.”
이런 분위기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을 끌어안을 법한데도 어떻게든 기를 쓰며 빠져나가려는 에스퍼라니.
“갔는데, 바쁘다며 별말도 없이 내보냈습니다.”
주환은 뻣뻣하게 굳어 버린 나리의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가와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나리는 숨을 멈추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동그랗게 만 등에 맞닿은 단단한 가슴, 예민한 목덜미에 와 닿는 코와 숨결이 간지러워서 잠이 확 달아났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주무십시오. 이대로 안고만 있을 테니까.”
으힉. 나리는 저도 모르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몸을 더 웅크렸다.
“이, 이, 이렇게, 주무신다고요?”
“응…….”
오 마이 갓!
나리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밖에서 시간을 재며 그 모든 걸 지켜보던 일한은 핏줄이 도드라진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남자 새끼들이 다 똑같지, 뭐!
이 야심한 시간에 다른 숙실 사람들까지 다 깨울 수는 없었다. 일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최대한 조용히 평화적으로 처리하자고 다짐했다.
끼이이이…….
일한은 천천히 문을 열고 주환을 불렀다.
“자기야아…….”
악문 잇새로 한이 서린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일 다 했으면 우리 방에서 자야지, 왜 여기에 있어?”
“…….”
주환은 고개를 들어 일한을 흘긋 쳐다보더니 쉴드를 쳤다.
아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불투명한 막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일한은 미소를 뚝 멈추고 양 손가락 관절 마디마디를 오도독오도독 풀었다.
“우리…… 이 시간에 어빌리티는 쓰지 말자. 응?”
일한은 열 손가락을 펴서 쉴드 파장을 해제하고 주환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가자! 자기야.”
“이거 아, 안 놓……!”
“쓰흡! 박주환 소령, 저 정말 화냅니다? 이 야심한 시간에 훈련장에 가서 신명 나게 참호 격투 할까요?”
으아으아!
나리는 두 사람을 말리려고 팔을 뻗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답답해서 느슨하게 풀어져 버린 붕대를 끌어 내리고 안대를 벗었다.
어둡고 희뿌옇게 번져 보이던 시야가 점점 초점이 맞춰지면서 윤곽선이 나타났다.
“잘 자요. 나리 중사.”
일한은 상큼하게 눈웃음을 치더니 문을 닫아 주었다.
❖ ❖ ❖
- 이번 작전의 목적은 C11 구역의 몬스터 소탕이다. C9과 C8 구역까지 독거미들을 밀어낸 위험도 A등급 까마귀 변종과 위험도 B등급의 독개구리 변종이 주를 이루고…….
인이어에서 작전 브리핑이 흘러나왔다. 나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스크를 썼다.
전방에 있는 솔개팀 정 팀장, 그리고 그의 페어인 오 상사, 그리고 자신과 주환까지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3개 돌격조의 가이딩을 맡기로 했던 일한이 빠지면서 그 역할을 주환이 맡게 되었고, 강의 가이드는 에덴으로 바뀌었다.
실전 경력이 없는 가이드가 둘이나 배치되면서 팀과 전략도 모두 변경되었다.
- C12 소탕 작전, 시뮬레이션 3. 알파01 출격.
- Team 알파01 출격.
강의 지시에 선두에 선 조가 움직였다. 파앙, 팡, 몬스터를 한 곳으로 유인하는 섬광탄이 쏘아졌다.
- Team 독수리, 섬광탄 확인. 127°19′9.″ 38°1′40.79″ 동쪽 66도 방향으로 독개구리 떼 이동 확인.
- Team 알파02, 알파03 출격. Team 솔개도 이동해.
대기하고 있던 모든 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강의 뒤에 서 있는 에덴만 빼고.
“하아암.”
작전 시뮬레이션만 나흘째. C12의 상황이 새로 보고될 때마다 C11 소탕 작전도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돌격조인 병사들이었고, 강은 진두지휘만 해서 에덴은 슬슬 작전 시뮬레이션이 지루해졌다.
“아저씨랑 나랑 그냥 둘이서 싹 쓸어 버리면 되는 걸, 왜 여러 사람 고생시켜야 하는 거지?”
에덴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주위를 쓱 둘러본 에덴의 눈은 강의 팔에서 멈췄다.
저 손을 잡고 저 팔에 안기고 싶었다. 작전 중에 손이라도 스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은 팀원들을 적재적소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만 할 뿐, 한 발짝도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에덴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뭐야? 황에덴 생도.”
강이 뒤를 흘끔거리며 무섭게 쏘아 말했다. 에덴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뭐긴요. 가이드가 가이딩…….”
강은 사납게 에덴을 쏘아보더니 에덴을 홱 밀어냈다.
“자세 똑바로 하고 열중쉬어.”
“아이 씨…….”
그 바람에 에덴은 멀리 밀려나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누가 안 봤길 바라면서 에덴은 다시 뒷짐 지고 섰다.
“나는 총도 안 주고. 그렇다고 작전 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고……!”
“싫으면 퇴교해.”
“아닙니다.”
에덴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솔개 A-09, AA 빨리 중앙으로 이동해서 가이드들 막아. 알파 A-05 폭파 준비는?”
나리는 쉴드를 펴면서 뒤처진 가이드에게 덤벼드는 들쥐를 쏘았다.
이름만 들쥐지, 크기는 멧돼지였고, 털이 하나도 없는 피부 위에 검붉은 진액이 흐르는 괴물이다. 실전이었다면 생긴 것만큼이나 냄새도 고약했을 것이다.
“오 상사님, 다치셨습니까?”
“괘, 괜찮습니다.”
실전이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괴수용 무기라도 몇 발로 죽을 괴물이 아니니까.
나리는 오 상사를 부축해서 중앙으로 이동했다.
주환은 엄호 사격을 하며 나리와 다른 가이드들이 쉴드 안으로 피할 수 있게 했다.
쿠구궁!
전투 시뮬레이션 AI가 무슨 변수를 만들어 낸 건지 브리핑에는 없던 대형 흙아귀가 지표면으로 튀어 올라 가이드와 에스퍼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페어를 잃은 에스퍼들의 파장이 거세지면서 진형이 흐트러졌다.
- AA 가이딩! 쉴드 해제하고 Team 알파02 가이딩 커버해야지 뭐 해!
주환은 탄창을 바꿔 끼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독개구리를 쐈다.
진형이 깨지고 몬스터는 계속 밀려드는데 어떻게든 A급 에스퍼 3명에, 많은 수의 쉴드를 쓰고 있는 나리의 가이딩까지 한꺼번에 해야 했다.
- 솔개 A-09, 네 페어나 경호해!
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나리는 수류탄 핀을 뽑아 흙아귀가 튀어나온 구멍을 향해 던졌다. 쿠웅, 하고 폭발음이 울렸다.
강의 명령에도 나리는 꿋꿋하게 오 상사를 둘러업고 주환이 선 고지대 쪽으로 이동했다.
강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어 시뮬레이션을 멈췄다. 통제 팀에서 시뮬레이션 일시 정지를 알리는 부저를 울렸다.
몬스터와 자연 지형물 홀로그램이 멈췄다.
“허억, 허억, 헉…….”
“뭐야. 왜 멈췄지?”
두 발로 선 사람, 쓰러진 사람 할 것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이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나리와 주환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강은 나리 앞에 멈춰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무섭게 쏘아보았다.
“이나리 중사.”
“예. 중사, 이나리.”
“왜 내가 지금 작전 중지시킨 거 같아?”
“……저희 진형이 무너져서 중지시킨 것 같습니다.”
“아니지. 네가 네 페어 안 챙기고 다 죽어 가는 남의 페어 하나 챙기는 바람에 박주환 소령이 혼자 떨어졌고, 나머지 세 팀이 전멸하는 순간이라서 중지시켰어.”
적막이 감돌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네 페어는 유일한이 아니잖아.”
주환은 입 안을 질끈 깨물었다. 일한과 비교해 자신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선우 팀장, 진형 흐트러지는 걸 봤으면 제때제때 지시해. 아니면, 박주환 소령과 팀장 바꾸고. 팀 알파03, 너넨 가이드가 한꺼번에 몰려가는 게 작전이었어?”
강의 호통을 멀리서 듣고 있던 해란은 마이크를 끄고 헬멧을 벗었다.
“아이고, 힘들다. 우리 유 소령님도 없고 최 대령님은 뒷방 노인네처럼 있으니 너무 힘들어.”
“이 작전 정말 괜찮을까요? 항상 최 대령님이 전방에 나가서 싹 쓸어 버리고 이 중사가 대령님 파장 막아 주면 우리가 잔챙이들 처리하는 식이었는데, 갑자기 180도 바뀌는 이유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윗분들은 이렇게도 해 보고 싶었나 보지.”
해란은 저 멀리서 팔짱 낀 채로 바닥을 차고 있는 에덴을 보았다.
첫눈에 보아도 못 미더워 보이는 아이가 어떻게 일한을 대신해서 강의 가이드로 있는 건지. 어떤 분의 입김인지 몰라도 저 생도 하나 때문에 강이 보디가드가 되었다.
“미치겠구먼. 우리 이 중사랑 정 상사만 탈탈 털리고.”
다른 임무도 아니고 구역 하나의 몬스터들과의 전쟁이었다. 실전을 코앞에 두고 주요 인력과 진형까지 바꿔가며 최전방에 서게 되자 사기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저 생도 말입니다. 황현균 대통령의 사생아라던데요?”
“야야, 입, 입! 없는 말 만들지 말고 가만있어.”
해란은 팀원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에스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 뭐야. SS급 가이드라고 해서 작전 투입된 거 아니었습니까?”
“씹, 어쩐지…….”
우려가 현실이 된 듯, 다들 ‘X됐다’라는 표정으로 땅을 찼다.
해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한숨을 뱉었다. C11 작전에 성공해도 저 꼬맹이 가이드의 공로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