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폭주하는 게 무서워?
강은 자신의 워치를 풀고 일한의 손목시계들을 쓱 훑어보며 물었다.
“무슨 제안?”
“그런 게 있어.”
“…….”
강은 일한의 다리를 뻥 찼다. 예고도 없이 무릎이 꺾인 일한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옷 빌려 달라며! 왜 사람을 차?”
일한이 싸울 기세로 욕을 입에 물고 강을 홱 돌아보았다. 강은 싸늘하게 일한을 내려다보았다.
“그 제안이 뭔데. 이나리랑 페어 하겠다는 거?”
“아니.”
“……?”
“결혼은 나리 중사랑 할 거니까, 맞선 못 보겠다고 했는데?”
일한의 뻔뻔한 낯짝에 강은 바로 발을 들었다. 또 발길질이 날아올 것을 알았는지 일한은 옷장 위로 순간 이동 해 버렸지만.
“야, 미쳤냐?”
강이 송곳니를 세우고 일한을 쏘아보았다. 강이 아무리 따가운 파장을 흘리며 위협해도 배짱이 두둑해진 일한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찬 모임인 양 사람들 다 불러 모아 놓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자 친구는 있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우리 딸 좀 만나 봐라, 우리 조카딸이 예쁘고 괜찮다.’ 하면서 너도나도 달려드는데 어떡하냐? 대충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니까?”
추켜 올라간 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일한은 천장 모서리에 매달려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부모님도 갑자기 전역하고 결혼이나 하라면서 본가에 오라고 하고. 매칭 시스템을 만들더니 이젠 내 와이프까지 골라 주려는지 작정하신 듯한데, 너라면 하고 싶겠냐?”
“씨, 그렇다고 이나리를 끌어들여? 걔 의견은 묻지도 않고?”
“아니, 그 많은 맞선 리스트에 있는 분들이 다 내가 좋다고 있는 거겠어? 그중에 나리 중사가 없다는 게 말이 더 안 되는 거지!”
저 새끼를…….
강은 입술을 물더니, 일한의 명품 손목시계와 가지런히 놓인 슈트 커버 중 제일 비싸 보이는 것으로 집어 들었다.
헉.
옷장 주인이 질겁하며 옷장 위에서 뛰어내렸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훌쩍 사라진 자리에는 강의 워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일한은 부들부들 떨면서 창문을 홱 열어젖혔다.
“야! 내 옷 내놔아아!”
일한의 사자후가 숙사를 넘어 다른 건물까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쳤다.
❖ ❖ ❖
나리는 자신의 손을 잡고 앞서 걷고 있는 주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탄탄한 목선과 넓은 어깨 밑으로 떨어지는 단단한 등은 군복 속에 가려져 있어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목을 가다듬고, 걸음을 늦춰 보았지만 ‘제대로’, ‘제때제때’ 받기로 한 가이딩은 아직도 부담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저어, 박 소령님.”
나리가 작은 목소리로 주환을 멈춰 세웠다.
“저는 잠시 들렀다 갈 곳이 있는데, 가이딩은 그 후에 받아도 되겠습니까?”
“아, 마침 저도 통화할 일이 있어서……. 통화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나리는 주환의 손을 놓고 본관 쪽으로 향했다. 손바닥 안에 얼얼하게 남은 주환의 가이딩이 아직도 심장을 간지럽혀서 자꾸 손을 쥐락펴락 움직였다.
“후우.”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차오른 피로와 파장의 잔여물을 입으로 내쉬며 터벅터벅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언제 저분이 정장 모델이 되었나 싶어 나리는 눈을 비볐다.
“연대장님, 이 시간에 외출하십니까?”
스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강이 손에 넥타이를 쥐고 소매에 커프스 링을 달며 걷는 게 딱 봐도 바빠 보였다.
“넌 왜 여기 있어?”
강이 눈꼬리를 삐죽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주환은?”
“박 소령님은…….”
나리는 주먹을 꽉 쥐고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잠시 통화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강은 오른쪽 커프스 링을 채우고 소매 깃을 바로 다듬으며 나리를 지나치려고 했다.
“저기 최 대령님.”
“……?”
강이 나리를 돌아보았다. 바쁜 사람 왜 멈춰 세웠냐는 듯이.
나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쭈뼛거렸다.
‘저 이번 작전 정말 잘할 테니, 가이딩은 편하게 받게 허락해 주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입은 제멋대로 굴었다.
“저어…… 유일한 소령님과 페어 계약 해지하실 겁니까?”
“…….”
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리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사, 사람들이 유 소령님 근신 처우 받은 것도 그렇고, 이번 작전이 바뀐 것도 그렇고……. SS급 가이드 생도 때문일 거라는 말이 많아서요.”
“그래서, 너도 신경 쓰여?”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던 나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나리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네.”
신경 쓰여요.
대령님이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들잖아요. 자려고 하면 뒤치락거리면서 사람 신경 곤두서게 하고, 안 하던 칭찬을 하고, 괜히 유 소령님이랑 박 소령님께 시비를 거시고.
제때제때 안 다닌다고 화를 내더니만 구박하기는커녕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방문 단속해라, 꽁꽁 껴입고 다녀라, 맨날 멱살 잡고 틱틱 잔소리하시는 바람에 제 꿈에도 나온다고요.
로또 맞는 꿈도 아니고, 대령님이 내 꿈에 나온다고 뭐가 좋겠어요?
나리는 터질 것 같은 속마음을 꿀꺽 삼키고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내색 안 하려고 하는데……. 대령님이 걱정됩니다.”
“……걱정?”
강은 넥타이를 주머니 속에 끼워 넣고 삐딱하게 섰다.
“네가 내 걱정을 왜 해?”
“가이드가 바뀌어도 가이딩을 안 받으실 거 아닙니까.”
“…….”
역시나 정곡을 찔렀나 보다. 강은 아무 말도 없이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저한테는 꽁꽁 싸맨 채로 박 소령님 손만 잡고 가이딩받으라고 윽박지르시면서, 왜 대령님은…… 가이딩 안 받으십니까. 그러다 정말 폭주하시면 어쩌시려고요?”
하,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강은 어이없다는 듯이 픽 혀를 찼다. 이내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생도님, 지금 제 걱정 하는 겁니까?〉
옛 기억 속 나리가 얄궂게 웃으며 강을 놀렸다. 매칭 테스트를 계속 거부하던 나리가 변명을 빙자해 그렇게 고백했었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습니다. 페어가 있든 없든, 가이딩을 받든 안 받든 못 받든…… 괜찮습니다. 최 생도님과 함께 싸우다 죽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낮에도 캄캄하게 일그러진 지옥 같은 하늘 아래서 발버둥 치며, 차라리 죽는 게 편안하겠다고 한탄하던 절망적인 싸움이었다.
한계까지 힘을 소진하고 그의 등에 업힌 주제에 페어는 필요 없다 쇠고집을 부리는 일병은 이나리뿐이었다.
〈죽더라도 나랑 죽어요. 생도님이 먼저 폭주하든, 내가 먼저 폭주하든. SS급으로 발현했는데 저 빌어먹을 차원의 균열 하나는 없애고 죽어야 할 거 아닙니까.〉
나리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그 순간을 강은 잊은 적이 없었다.
혹시 그때 나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면, 너는 잊어버린 마음을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강은 자신을 부르는 비서실장과 에덴의 메시지를 뒤로하고 나리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이 중사.”
“넵. 중사, 이나리.”
“폭주하는 게 무서워?”
나리는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강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폭주하는 건 안 무서운데, 대령님께서 폭주하는 건 피해가 상당하지 않을까요……?”
“내가 폭주하면 네가 옆에서 막으면 되잖아.”
“아…….”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나리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망부석처럼 굳어 버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닌가.
“그 말은, 저를 순장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니라, ‘나 죽으면 너도 죽어라?’ 허…… 제가 언제까지 대령님 옆에 붙어 있을 줄 알고 그런 무지막지 심한 말을 하십니까?”
“…….”
또 기대했던 내가 병신이지.
강은 한숨을 내리쉬며 머리를 짚었다. 뭔가 의미가 많이 와전되었는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했다.
“됐어. 넌 네 걱정이나 해.”
강은 신경질을 내며 가던 길을 성큼성큼 갔다. 본관 앞 현관에 검은색 세단들과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그리고 하얀 원피스 정장을 입은 에덴이 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격이 좋은 경호원이 세단의 뒷좌석을 열어 강과 에덴을 에스코트했다. 강이 먼저 세단에 타고, 에덴이 그의 옆에 앉았다.
경호원들이 선두와 후미에 있는 세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
기분이 이상했다. 나리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강을 보다가 굳은 얼굴로 울렁거리는 속을 쓸었다.
강과 일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강이 일한과 페어를 해지하고 에덴과 페어가 된다면 일한은?
근신이 풀리면 다른 부대로 옮겨질 수도 있다는 걸까. 아니면 일한도 다른 에스퍼와 페어를 맺게 되는 건가.
나리는 입가를 가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싫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두근거리며 읽었던 독자로서, 그리고 10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전우로서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작가님. 이 소설 해피 엔딩이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갑자기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 하차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요.”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그런가. 결말이 어땠는지, 이 소설 제목과 누가 쓴 이야기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나리는 머리를 쥐고 끙끙거렸다.
“하아, 이거 제목이 뭐였더라.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한 가이드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었나? ‘멸망한 세계 속 나 혼자만 최강 집착광공?’이었나, 아닌데……. 멸망…… SSS급? 뭐가 더 들어갔었는데…….”
띵.
제목을 검색하시겠습니까?
워치 알림창이 떴다. 나리는 별생각 없이 AI와 주절거렸다.
띵.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한 가이드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이와 유사한 제목 검색 결과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어, 그러면…….”
띵.
‘멸망한 세계 속 나 혼자만 최강 집착광공’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이와 유사한 제목 검색 결과 219883건, 내용 검색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나리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검색창을 내리려고 했다.
한국 육군 사관 학교 이능력자부 어둠의 익명 게시판-2xxx.03.01 이번 2708기 애들 중 SS급 있음.
오래전에 박제된 게시물이었다. 그것보다도 나리가 입교한 적도 없는 사관 학교 익명 게시판을 조회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뭐지? 내가 언제 이런 걸…….”
호기심 반, 심심풀이 반. 나리는 무심코 게시물을 열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