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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6)화 (1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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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왜 이 중사는 나한테 안 그렇습니까?

“후으으…….”

콩콩, 콩.

나리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태블릿에 이마를 삼세번 박았다. 그러고는 무광택 슬림한 디자인, 깃털 같은 초경량 무게, 라면 받침과 도마로도 쓸 수 있다는 튼튼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최신 태블릿으로 펄럭펄럭 부채질했다.

덥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초봄인데 너무 더웠다.

“이, 일해야지. 일…….”

나리는 태블릿을 켜고 페어 훈련 기본을 실행시켰다.

눈앞에서 ‘몬스터의 유형에 따른 효율적인 페어 전략_01’이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게끔 3D 홀로그램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나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딴생각만 하다가 결국은 머리를 움켜쥐고 발을 굴렀다.

하아, 나 이제 일한을 어떻게 보지? 열에 약 기운까지 있어서 실수한 거겠지? 그게 아니면, 나는 앞으로 최 대령한테 더 심한 갈굼을 받는 건가? 이 김에 확 해군 쪽으로 옮겨?

“나 수영 못하는데에…….”

사령탑 사무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좀 이상하긴 하네. 에스퍼더러 사무 보라고 하는 게……. 누구 호위도 아니고.”

군복 벗겠다고, 인제 그만두겠다고 몇십 번을 우겼지만 막상 떠날 날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리는 턱을 괴고 꿍하게 입술을 내민 채, 의미 없이 태블릿을 휘적거렸다. 일시 정지 한 홀로그램 영상이 상하좌우로 어지럽게 움직였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빨리 씻고 나온 건데.”

주환이 하얀 해군복 단추를 잠그면서 들어왔다.

아,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까 남들 다 입는 군복도 달라 보인다. 해군 정복이 더 예뻐서 그런가……. 나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중사?”

“아, 넵!”

나리는 퍼뜩 일어났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태블릿을 옆구리에 붙였다.

“가시죠.”

나리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해란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가, 전에는 못 느꼈던 시선들 때문에 살갗이 따가웠다. 정확히는 나리의 뒤를 따라오는 주환에게 향하는 거였지만.

“휘유!”

건물 3층 창문 너머로 누가 휘파람을 불어 댔다. 또, 누군가는 ‘나리나리 개나리’를 힘껏 열창하며 군대식 박수를 쳤다.

“……이 중사 인기가 이렇게 많았습니까?”

같은 부대에서 10년 동안 복무하면서 잘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자신의 인기를 실감한 나리는 자신 있고 뻔뻔하게 굴었다.

“큼! 딱 봐도 인기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아, 예…….”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습니다? 아니, 이런 에스퍼 어디 있다고! 박 소령님 완전 계 타신 거 아십니까?”

“…….”

“박 소령님?”

대답이 없어서 뒤를 돌아보니 능글맞은 어린 에스퍼들이 주환을 둘러싸고 같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외부인 출입이 엄격한 몬스터 경계 지역 내 부대라 그런가, 무슨 연예인이 온 듯한 광경에 나리는 어이가 없어 풋, 하고 웃었다.

“어우! 무슨 가이드가 에스퍼보다 몸이 좋아요? 키도 엄청 커! 기깔난다. 해군 제복, 와……!”

“박 소령님, 이나리 중사님이랑 매칭률 몇 나오셨습니까? 저랑도 한번…….”

“솔직히 매칭률 웬만큼 나오면, 이나리 중사님보다 더 파릇파릇한 에스퍼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우우우! 소 상병님, 너무 팩폭!”

“뭐가 팩폭이야?! 정설이지. 아직 페어 등록도 안 했는데?”

허, 저것들이!

나리가 입술을 꾹 말고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주환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여자와 연애 경험이 전무한 주환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몸을 비켜 억지로 길을 열면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덩치로도 페어 없고 혈기 왕성한 에스퍼들을 당해 낼 수 없는지 다시 길이 막혀 곤혹에 빠졌다.

주환이 두 손을 든 채로 쩔쩔매며 나리를 쳐다보았다. 그 의외의 모습에 나리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큼큼, 나리는 무섭게 표정을 다잡고 성큼성큼 다가가 주환의 팔을 잡아당겼다.

“밥 다 먹었으면 빨리 자리 복귀합니다. 소지은 상병, 넌 페어 어디에 두고 여기서 뭐 합니까? 페어 챙겨서 훈련 준비할 시간 아닙니까?”

나리는 주위에 몰린 에스퍼들을 향해 무섭게 파장을 뿜었다. 남자 여자 따질 것 없이 주환의 주변을 둘러싼 에스퍼들이 나리의 묵직한 파장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강의 옆에 있을 때엔 작은 애완견처럼 보였는데, 개나리도 A급 에스퍼라는 걸 모두 뒤늦게 상기했다.

으휴, 이래서 강 옆에만 따라다니면 손해 보는 게 많다니까.

“박 소령님, 뭘 그렇게 쩔쩔매십니까?”

“에스퍼에게 사전 고지 없이 신체적 접촉은 하지 말라고…….”

“아니, 그렇다고 소령님께서 벌서듯이 계실 겁니까?”

나리가 눈을 흘기며 따지자 주환의 가무잡잡한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이렇게 속이 숙맥인 남자가 어떻게 가이드가 된 건지. 나리는 삐딱하게 주환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환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뜸을 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에스퍼는…… 대개 저렇습니까?”

남자 에스퍼만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줄 알았는데, 여자 에스퍼들도 못지않게 대담했다.

“예. 가이드만 보면 시커먼 욕망과 정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몸조심하십시오. 가이드님.”

“그런데, 왜…….”

이 중사는 나한테 안 그렇습니까?

주환은 무심코 툭 흘러나온 말을 손으로 막으면서 나리를 쳐다보았다. 나리는 잘 못 들었는지 눈썹을 삐죽 들고 되물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이러다 늦겠습니다. 좀 빨리 가겠습니다.”

나리는 주환의 팔을 잡아당기며 달리듯이 걸음을 옮겼다.

주환은 나리에게 붙잡힌 팔목만 보느라 바뀐 훈련장이 어디에 위치한 건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주환이 미처 보지 못했지만 늦었다고 서두르는 나리의 얼굴도 붉었다.

〈그런데, 왜…… 이 중사는 나한테 안 그렇습니까?〉

그 말을, 귀가 좋은 에스퍼가 못 들었을 리 없으니까.

❖ ❖ ❖

“……?”

못 보던 천장이다. 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여긴 또 어디야.”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어디에 꽁꽁 묶인 듯이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강은 입 안을 깨물었다. 피 맛이 감돌았다. 그렇다면 꿈은 아니란 거고.

“어떤 새끼야…….”

그가 으르렁 낮게 울면서 하얗고 공허한 공간에 질문을 던졌다.

“누가 날 재웠어?”

파직, 칙, 파스스…….

전등 하나 없이 하얗게 빛나던 천장에 검은색 금이 갔다. 어빌리티를 쓰는데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소음, 냄새들, 살갗 위를 기어오르는 불쾌한 감각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 강제로 가이딩당했다.

삐이익.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최강, 9999SS000 리셋 완료했습니다.]

강은 욕지거리를 토해 내고 힘껏 발악하며 스트랩을 풀려고 했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늘어지는 구속 스트랩뿐만 아니라 실험실의 모든 장비는 모두 강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가 기를 쓰면 쓸수록 연구원들은 기록된 자료를 바탕으로 더 질기고 단단한 것을 만들어 냈다.

“지긋지긋한 연구원 놈들……!”

강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일한의 가이딩을 적출하듯 뽑아내서 강제 주입하는 가이딩, 강이 깨어났을 때쯤이면 일한은 피를 토하며 거의 혼절 상태가 되곤 했다.

아무리 자신이 위험하다고 해도, 중독에 부상 중인 일한을 실험대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S급 일한도 버티기 힘든 것을 누가…….

그의 피부까지 촘촘하게 속박한 스트랩이 끊어질 듯이 팽팽해졌다.

팅. 기를 쓰며 몸을 일으키던 강은 갑자기 뚝, 굳어 버렸다. 심장 주위를 뜨겁게 휘감던 파장이 누군가에게 잡힌 듯이 제동이 걸린 것이다. 흥분한 심장만 성을 내며 뛰는 이질적인 느낌,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서늘한 가이딩이 강을 옭아매었다.

“쉿. 힘들게 가이딩했는데, 얌전히 쉬어야지.”

패닉룸 속 구석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열네다섯 살쯤 되었을까. 창백한 아이는 마르고 왜소해서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양쪽 관자놀이부터 시작해서 목, 양어깨를 지나 온몸에 측정기를 붙인 채로 다가와 강에게 물었다.

“기분 어때?”

X같다.

차마 애한테 욕은 못 하겠고, 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는 핏줄이 돋은 강의 팔을 천천히 쓸었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아이의 눈동자에는 집요한 탐구심이 가득했고 그를 훑는 손길은 부드러운데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이가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성가신 벌레 소리도 없어지고, 사람 미치게 만드는 악취도 안 나고, 속 답답하게 막힌 것도 뚫리고. 마치, 천국 같지 않아?”

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만지는 낯선 아이를 쏘아보았다.

“너, 뭐야.”

“나? 에덴. 황에덴.”

“네가 날 가이딩한 거냐?”

에덴은 활짝 웃으며 강의 목을 끌어안았다. 넓고 큼직한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성별이 모호했는데, 여자애였다.

“응. 당신을 위해 태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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