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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7)화 (1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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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난 당신을 위해 태어난 천국이야

“…….”

뭐래. 미친년인가?

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색했다. 에덴은 강의 못생기게 구겨진 얼굴도 좋다는 듯이 강을 세세하게 쳐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창백한 손가락 끝이 사뿐사뿐 강의 일그러진 눈썹을 지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유일한은?”

강의 질문에 에덴은 피식 웃었다.

“곧 필요 없어지겠지. 내가 SS급으로 발현했으니까.”

강은 그제야 아차, 했다. 군부와 연구소 놈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 어떤 짓을 했던 놈들인지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S급 가이드로 언제까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해했고, 불만이었다.

강이 에스퍼로 발현한 건 13살 첫눈이 내리던 늦가을. 곧바로 연구소에 들어가서 지옥 같은 5년을 보내던 때부터 그들은 SS급 목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강은 허탈해졌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이, 그가 감내했던 모든 짓거리가 결국은 이렇게 휴지 조각처럼 내팽개쳐질 것인데. 여태까지 내가 뭣 하러…….

하!

“웃기지 마라. 애송이.”

강이 가소롭다는 듯이 조소하며 에덴을 쏘아보았다.

“네가 SS급 가이드라도 그 얼굴, 그 몸매로 날 유혹하긴 글렀어.”

“…….”

“만들려면 내 취향에 맞게 잘 좀 만들지. 뭐야, 전에는 날 게이로 만들더니만 이젠 그보다 더한 개쓰레기 성범죄자로 만들 셈이야?”

에덴은 제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뾰로통하게 입술을 구겼다.

“나…… 이제 곧 17살이야. 아직 더 클 수 있거든! 3, 3년만 더 기다려!”

3년을 기다리고 에덴이 의술의 도움을 받더라도 15년 차이는 좁혀질 리가 없다.

“……됐다. 이미 짜게 식었어. 가이딩이고 뭐고 하나도 안 끌려.”

하아, 강은 세상사 초탈한 듯한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

이게 아닌데, 에스퍼는 당연히 가이드를 좋아해야 하는 거잖아. 좋아하진 않더라도 살기 위해 의존해야 하잖아. 살려 줬으니 감사해야 하잖아.

에덴은 마른 아랫입술을 뜯으며 강을 쳐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취, 취향이 뭔데……?”

강은 대답하기도 귀찮은지 축 늘어진 채로 고개를 돌렸다. 에덴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바락 소리쳤다.

“아씨! 아저씨 취향이 뭐냐고!”

아저씨?

아저씨라는 말에 강이 움찔했다. 그러고는 저 깊은 단전에서 끌어 올린 듯한 낮은 목소리로 분노했다.

“그래……. 피곤한 아저씨 귀찮게 굴지 말고, 좀, 가라…….”

“미, 미안……. 음, 오빠 취향이 뭔데, 요?”

고학력이 사람 망친다더니.

사이코 연구원 놈들 취향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얘 보육 담당 연구원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면상이 궁금했다. 어떤 놈이 애를 이렇게 기른 건지…… 쯧.

강은 제 싸가지를 돌보지 않고 에덴의 버르장머리에만 혀를 찼다.

“최강…… 오빠? 강 오빠…….”

“…….”

강은 스트랩에 묶인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바르르 주먹을 떨었다.

씨발. 얘, SS급 가이드라며?

왜 살갗은 쪼그라들 것 같고, 속이 메슥거리는 건데?

“입 다물어. 그 ‘오빠’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죽여 버린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

그냥, 부르지 마.

“뭐라고 부르냐고! 그냥 최강이라고 부른다?”

“하아…….”

짜증 내기도 귀찮아진 강은 자포자기식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냥, 아저씨라고 해……. 어차피 군인은 다 아저씨야.”

❖ ❖ ❖

여기 또 다른 군인 아저씨, 유일한 소령―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여태껏 빛이 나는 솔로임―은 가만히 누워서 병실 안 구석구석을 스캔하고 있었다.

폭과 너비 6.5m 정도, 높이는 3m가 넘을 것이다. 카메라가 있을 만한 곳은 1인실 출입문 쪽, 화장실 입구 쪽, 침대 쪽, 방문자 얼굴 식별을 위해서 2개 정도…… 최소 5개.

침입자가 들어올 경로는 2가지. 전면 창문과 문뿐. 환풍구는 성인 여자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작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강? 강아. 최강?”

일한은 자신의 십년지기 페어를 불렀다.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강과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뒤에 열이 심해져 그대로 뻗어 버렸고, 이틀이나 고열과 통증, 구토에 시달리며 정신을 못 차렸었다.

입원 사흘째가 되어서야 열이 내려서 일반 1인실로 옮겼다. 면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 제 페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최강 자식, 다 들리면서 씹는 거 봐라?

야! 너, 내 워치 빼 가면 어떡하냐? 네 나이가 몇인데, 그거 좀 싸웠다고 아직도 삐졌냐? 파장이라도 잡게 브레이크는 좀 해지하지? 바깥 뉴스는커녕 나리한테도 연락을 못 하잖아! 나 병실 옮겼단 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곳은 부대 안 군 병동이었고 다른 에스퍼들의 귀가 많았다.

“아, 정말…….”

심심하다.

넓고 좋은 1인실에 90인치 스크린이 있으면 뭐 하나, 워치가 있어야 뭐라도 하지. 가만히 누워 요양만 하려니 일한은 심심해서 미칠 거 같았다.

그보다도, 불안했다.

나리가 안 찾아와서.

“으으!”

일한은 머리를 움켜쥐고 애꿎은 이불을 찼다. 다친 다리에서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베개 속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미쳤지. 유일한. 왜 그랬냐. 너 나리 얼굴 어떻게 보려고…….”

베개에 짓눌린 후회가 입 밖으로 나와 그의 얼굴을 감쌌다.

일한은 그때 순간을, 나리를 끌어안았던 감촉을, 그 체온과 목소리를 평생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꿈처럼 생생하기도 하고 몽롱하기도 했지만, 좋았다. 좋아서 문제였다.

일한은 다시 바로 돌아누워서 제 입술을 훑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그래, 처음부터 강이 아닌 나리를 부르면 되었다.

그런데 불러도 안 오면? 나리가 안 오면 그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일한은 콱 메어 오는 목구멍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그리고 아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리 중사…….”

그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나리 중사, 나한테 좀 와 줘요. 할 말이 있어. 중요한 말이니까, 가능한 한 빨리 와 줄래요?”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게 일한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축축해지는 손바닥을 시트 위에 쓸어내리며 일한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이렇게는 못 전하겠고. 나리 중사 얼굴은 보고 말해야 할 거 같아서 그래요.”

어이쿠야.

일한의 말을 들은 해란은 일한의 병실 앞에 서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나리의 말을 듣고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인가 보다. 이걸 모른 척해야 하나, 아니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 줘야 하는 건가.

문병 온 해란은 음료수를 든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 중위님 안 들어가십니까?”

병실까지 안내해 줬던 간호병이 물었다. 해란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드, 들어가야죠. 들어갑니다. 예.” 하고 말하며 간호병을 돌려보냈다.

해란은 주위의 인기척을 한동안 감지하다가 조용해진 뒤에야 조심스레 노크했다.

“나리 중사?”

일한이 벌떡 일어났다.

“소령님 똥강아지가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해란은 가볍게 경례하고 음료수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일한은 다분히 실망한 표정이었다가 해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안해란 중위가 제 문병도 오고, 줄이 확실해서 보기 좋습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령님같이 유능하시고 잘생긴 가이드님께 문병 조공 행렬이 있을 줄 알고, 영민한 에스퍼가 재빠르게 행동해서 이렇게 첫 영광을 얻었지 말입니다?”

해란은 음료수병 박스를 열어 속에 숨겨 둔 맥주를 살짝 들어 보였다.

아하하하핫!

아, 하하하하…….

“……안 중위,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숙실에 좀 챙겨 놓은 거, 그건 강이 때문에 아주 가끔. 아껴 가면서 홀짝홀짝 마시는 거지……. 중독으로 입원한 환자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일한은 술 앞에서 두말하는 남자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쭉 뻗은 오른팔 아래 공손히 왼손을 받쳤다.

“예예. 최 대령님이 소령님 속을 썩이긴 합니다만. 요즘 똥강아지 때문에 맘고생이 더 심하실 줄 알고 있었습죠. 보십시오. 영민하고 재빠른 저는 또 이렇게 준비도 철저합니다?”

해란은 철저하게 준비한 갈증 해소 음료수를 따서 두 손으로 공손히 제 마음을 전달했다.

드, 들었구나?

벌써 앞뒤 사정을 다 알아차린 에스퍼가 나타난 것이다. 일한은 하마터면 손이 미끄러져 그 귀한 마음이 담긴 술을 쏟을 뻔했다.

하하하.

일한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와…… 역시, 안해란 중위이십니다.”

일한은 시원하게 마른 목을 축였다. 해란은 뒷짐 진 자세로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 대령님께는 똥강아지의 상담 카드는 올리지 않았으니까요.”

“…….”

강이 안 중위에게 나리를 챙겨 달라 시켰구나.

아껴서 마시려고 했는데 일한은 끝까지 원샷해 버렸다.

“어쩌실 겁니까? 유 소령님.”

해란이 진중하게 물었다.

“안 중위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합니까?”

일한도 입가에 묻은 거품과 함께 웃음기까지 지우고 해란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해란은 일한의 시선에 맞서며 말을 아꼈다.

“저 나리한테 미안한 마음 없습니다.”

“…….”

해란은 등 뒤에 감춘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도 오랫동안 부대 내에 있었지만 유일한이 이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안 중위도.”

일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페어 시스템 아래, 영원한 페어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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