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쓰레기 먹는 대마법사-69화 (68/249)

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69화

069. 진정한 마법사의 시작(4)

달그락.

커피잔이 상혁의 앞에 놓였다. 상혁은 코끝을 건드리는 아메리카노의 쌉싸래한 향기를 음미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전아영이 그런 상혁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봤다. 상혁은 그 시선을 등에 업은 채 보무도 당당하게 서비스 테이블로 향했다.

꾹꾹꾹꾹.

그러고는 자신의 컵을 시럽이 있는 곳에 대고는 미친 듯이 눌러서 시럽을 넣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전아영이 입을 가리고는 웃었다.

“왜 웃습니까?”

그 사이 거의 스무 번 정도 펌프질을 해 수위가 높아진 컵을 들고 돌아온 상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혁은 달디 단 아메리카노를 한 번 슥 머금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시럽을 그렇게 많이 넣어요?”

“제가 넣습니다.”

커피는 훌륭한 기호식품이다. 하지만 상혁은 이런 인공적인 단맛이 좋았다. 가나안에서는 그렇게 그리웠던 인공 단맛.

상혁은 거의 시럽 물이 된 커피를 마시면서 전아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동안 안 보이시던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머님이 이야기 안 해 주십니까?”

“그냥 변호사님이 어디 가셨다고만.”

“음. 어디 다녀왔습니다.”

160억을 벌어 온 잠시간의 외유였지만 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자 전아영이 고개를 숙이고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어휴, 무슨 말을 하지?’

막상 상혁과 마주 앉고 보니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활달한 전아영이 할 말을 찾지 못한다는 건 꽤 중차대한 일이다.

그만큼 남자 앞에서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아영이?’

첫사랑의 위력은 그처럼 대단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전아영도 결국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나이일 뿐이다. 그러니 첫사랑이 가져다주는 힘에 갈피를 못 잡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가 그러건 말건 상혁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아기자기하네.’

마을 초입에 생긴 카페는 하마터면 생기지도 못하고 엎어질 뻔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이 카페가 생길 즈음에 농약 막걸리 사건이 터져 마을 전체가 어수선하고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결의된 예산을 돌릴 방법이 없어 그대로 강행됐다고는 하는데, 시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카페 같은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그냥 소박한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

그 때문인지 메뉴도 복잡한 이름보다는 동네 다방이나 어르신들이 와도 좋아할 것 같은 메뉴들이 많았다.

“서비스야.”

“고, 고마워. 언니.”

그때 카페 주인이 다가와서는 서비스라며 케이크 한 조각을 놔주었다. 전아영이 아는 체를 하자 카페 주인인 여자가 눈을 찡긋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

전아영이 이 카페에 대해서 왜 그렇게 소상하게 사정을 아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전아영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모양이었다.

“여기. 그 우리 동네에 오신 상혁 씨라고. 음. 십 년 전에 떠났던 분이시래.”

“그래?”

“아. 이 언니는 마은빈이에요. 이 동네 출신인데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얘는.”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마은빈이 전아영의 옆구리를 쟁반으로 쿡 찌르는 것이 보였다. 전아영보다 다섯 살이 많아봤자 스물넷인데, 그게 많아 봤자 얼마나 많다고.

‘좋을 때다.’

속으로는 일흔 먹은 노인인 상혁이 마은빈을 보면서 픽 웃었다.

“여기 사셨다구요?”

“네. 십 년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서울로 갔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상혁이 갔던 보육원은 경기도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도 한 번 찾아가기는 해야 한다.

‘언젠가 꼭 거기서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잊고 있었네.’

은혜라며 입가에 매단 미소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 보육원에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천애 고아가 된 자신이 갈 곳이 없어 그곳으로 갔지만 대개 불행한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듯이 그곳에서도 수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기부금을 착복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 진출하게 될 나이가 된 아이들에게 줘야 할 돈도 그곳에 힘없이 빼앗겼다.

그렇게 쫓겨나면서 내가 나중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당했던 것을 갚아 주겠노라고 복수를 꿈꿨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안으로 간 뒤 살아남느라 까맣게 잊었다.

‘어쩌나. 내가 뒤끝이 좀 긴데.’

근데 그게 이 순간 딱 떠오르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물론 상혁이 아니라 그 보육원장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낀 상혁이 씩 웃었다. 그때 마은빈은 상혁을 보고 아,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거기 파란 대문?”

“맞아요, 언니.”

마은빈은 상혁이 누군지 눈치챘다. 당시 그녀는 열넷이었기 때문에 마을에 일어났었던 일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고로 인해 부모가 다 죽었다면서 그 집 아들을 불쌍해하던 부모님의 넋두리가 머릿속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게 눈앞의 상혁이라니.

“잠깐만. 그런데 파란 대문이라면…….”

마은빈의 눈이 샐쭉해졌다. 그러고는 장난기 섞인 눈으로 전아영을 쳐다봤다. 전아영과 그녀는 다섯 살 차이가 났지만 비슷한 또래가 없어 마은빈이 서울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아영의 첫사랑이 파란 대문집 아들이란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언니!!”

“이 기집애. 이 기집애! 어쩐지. 네가 남자를 다 데려왔다 했어.”

“언니이이…….”

전아영이 반쯤 우는 목소리로 마은빈에게 사정했다. 상혁만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했다. 마은빈은 충분히 장난쳤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주 오세요. 커피 10퍼센트 할인해 드릴게요.”

“매일 오겠습니다.”

돈은 많지만 깎아 준다면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커피 맛이 아니라 시럽 맛으로 먹었으니 커피 맛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가깝다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휴.”

마은빈이 빙글빙글 웃으며 사라지자 전아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혁은 그사이 커피 한 잔을 다 비웠다. 그러고는 포크를 들고는 전아영을 빤히 쳐다봤다.

“드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상혁이 자신을 쳐다보는 이유가 케이크 때문이란 것을 안 전아영은 케이크를 내밀었다. 누군 물도 제대로 못 마시고 있는데, 커피에 케이크까지 눈독을 들이다니.

전아영은 그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픽 웃었다.

“집은 좀 어때요? 고쳐야 하지 않아요? 좀 고쳤나? 필요한 거 있으면 아버지 철물점에 오세요. 말씀드릴 테니까 아마 싸게 해 주실 거예요.”

“괜찮습니다.”

이미 원래의 낡은 집은 싹 밀고 허물었다. 그리고 그곳에 돌집을 지어 놓았다. 오승택과 박선웅 때문에 어느 정도 필요한 것들도 갖췄다.

가구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건 이선호와 함께 시내에 나가서 해결하기로 했다.

“이제 농약은 더 안 드시죠?”

“건강하지 않습니까.”

“하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농약을 먹어서.”

전아영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때 전아영이 피곤한 듯 목을 주무르면서 하품을 작게 했다.

상혁은 입에 포크를 물고 그걸 보다가 물었다.

“피곤합니까?”

“아, 네. 요즘 잔업도 많고, 일도 이제 익숙해지고 있어서 좀 그러네요.”

“SG 온양 공장이요? 반도체 만드는.”

“네.”

전아영의 눈 밑에 화장으로도 숨기지 못한 다크서클이 보였다. 거기에 피부도 푸석했고 입던 옷이 헐렁해 보일 정도로 살도 빠져 있었다.

“살도 좀 빠졌죠? 일 시작하면 고생길이라더니 그게 진짜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전아영이 씩 웃었다. 그런 전아영의 잇몸도 변색되어 있었다. 그때 전아영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아. 코피 난다.”

“여기.”

상혁은 휴지를 내밀었다. 전아영은 코를 얼른 막고는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상혁은 웃거나 괜찮냐고도 묻지 않았다.

“요새 들어서 자꾸 나더라고요. 진짜 피곤한가 봐요. 주말에 푹 잘라구요.”

전아영은 민망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말을 알아서 했다. 전아영을 보는 상혁의 오른쪽 눈이 오색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전에 비해서 마나가 네다섯 배는 커진 것 같은데.’

상혁은 그녀가 중독되었음을 깨달았다. SG 반도체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1서클과 2서클의 기초를 다진 상혁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농도 짙은 폐수가 흘러나오는데 방호복을 입었다고 해도 사람이 무사할 리 없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는 겁니까?”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요. 중간에 점심시간 한 시간 있고.”

“중간에는요?”

“없어요. 요새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서 작업량 채우기에도 벅차거든요.”

상혁은 그런 전아영을 보고는 혀를 쯧 찼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거기 때려치우세요.”

전아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 *

SG 온양 공장.

야심한 시각 그곳에 두 대의 커다란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들어왔다. 겉을 하얀색으로 칠한 거대한 냉동탑차였는데 도착한 트럭에서 웬 외국인이 내렸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경비팀은 외국인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이미 위에서 전부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진 곳에 저 탑차를 주차시켜 놓고 신경을 끄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나머지 일은 위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저런 일의 경우 너무 깊숙이 아는 건 좋지 않았다. 모르는 게 장수의 지름길인 법이다.

띠, 띠, 띠.

탑차가 공장 한쪽에 주차가 됐다. 하적장이기 때문에 일반 공장 직원들을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올 사람도 없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내린 외국인에게 경비팀장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이 들어갈 연구실을 안내해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팀장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숙지해 둔 상태이고 외국인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오밤중에 불려 나와 사주 경계를 섰어야만 했던 경비팀이 모였다. 팀장은 그들에게 다시 번 더 주지시켰다.

“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누가 왔는지 알려고 하지 말도록. 이 일은 철저히 함구하도록 하고. 만약 바깥에 이 일이 새어 나간다면 위에서는 무조건 우리 내부에서 흘러나간 것으로 판단하고 조사에 들어갈 것이다.”

“예!”

“없다고 생각하고 지내도록 해라. 안 그래도 얼마 전 일 때문에 윗선에서 신경이 곤두서 있다고 하니까. 알았지?”

“알겠습니다!”

“해산.”

경비팀이 해산하고 난 뒤 공장 안의 불빛이 꺼졌다. 하지만 잠시 후 냉동탑차의 화물칸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탑차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 * *

“진짜 이상해.”

“왜. 아까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앉아 있더만.”

상혁이 돌아간 후 전아영은 불퉁한 표정으로 마은빈에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아니. 너무 뜬금없잖아. 공장을 그만두라니.”

“에이. 니가 공장 너무 힘들다고 먼저 했다면서. 그래서 한 말 아니야? 걱정했다든지.”

전아영은 멈칫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상혁은 마치 자신이 크게 하나 베푼다는 얼굴로 전아영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니야!”

“이것아. 요즘 너 얼굴색이 너무 안 좋기는 해. 밥은 제대로 먹어? 잠은 제대로 자고?”

“응.”

“코에 휴지 꽂아 놓고 그렇게 말하면 퍽이나 믿겠다.”

“치. 괜찮다니까 정말.”

사실 전아영은 괜찮지 않았다. 요즘 입맛도 없고 살도 쭉쭉 빠졌다. 코피가 하루에 세 번씩 나는 것은 물론 자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벌면 다들 이 정도 힘들다고 하길래 전아영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대학을 가지 않고 고향에 남아 취직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이기에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남들도 그렇다니 버티는 수밖에.

“나 갈게, 언니.”

“그래. 나도 이제 정리하고 집에 가야겠다. 그리고 상혁인가? 걔랑 친하게 지내. 너도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거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렇지.”

마은빈은 알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며 전아영은 상혁이 한 말을 곱씹었다.

‘안 때려치우고 계속 다니면 내가 죽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씨. 재수 없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