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진혈왕자 (1)
궁왕 엘레노아는 고대용의 사원 밖으로 대피시킨 피난민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고대용의 사원에 있던 병기들.
이 무기들을 쥐여 주고 이곳을 요새화하기 위함이다.
나는 밖으로 나오는 궁왕 엘레노아를 따라 나온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다른 엘프 부족들을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다. 고대용의 사원은 대단히 위험하여 따라오지 않은 부족이 많다.”
궁왕 엘레노아는 피난민들과 소수 병력만 남기고 다른 엘프 부족들을 구하러 갈 것이라고 한다.
현재 엘레노아는 한 부족의 수장만이 아니라, 남서부 엘프 연합의 수장이니까.
그녀는 평소 거의 짓지 않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린 기분이다. 정말 고맙군. 네가 없었으면 이렇게 쉽게 고대용의 사원을 차지하지 못했을 거다.”
궁왕 엘레노아는 내게 감사를 전했다.
하기야 내가 없었다면 고대용의 사원에 있던 함정들은 물론, 석상 드래곤에게 매우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더구나 궁왕 엘레노아는 헛기침을 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흠흠, 그래서 말인데 네일. 네가 부탁한다면 특별히 이곳에 남게 해줄 수도 있다. 우리 엘프들은 인간이라면 질색하지만, 피난민들 또한 네 활약을 들었으니까.”
“?”
엘레노아는 어차피 너 또한 인간 사회에 질렸기에 이곳까지 온 게 아니냐며 말했다.
더구나 이것이 얼마나 특별한 기회인지, 자신이 고집불통의 엘프 장로들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필까지 하면서.
‘호의야 고맙다만······.’
미안하지만 나는 엘프가 남아달라고 매달려도 남을 생각이 없다.
앞으로 닥쳐올 대재앙과 군단장들을 알고 있는데, 눌러앉는다?
이는 절벽 끝 나뭇가지에 매달린 상황에서, 빠져나올 생각 없이 달콤한 꿀이나 따먹는 것과 다른 바 없는 상황이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지.”
열심히 어필하는 엘레노아가 무안해할 만큼 즉답한다.
엘레노아는 가자미눈으로 묻는다.
“······달리 갈 곳이 있나?”
“그래,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나는 굳이 남서부 마경이라고 밝히진 않았다.
마경(魔境).
일대 전체가 마계화가 되어버린 곳.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거주하는 공간이므로. 마지막 용의 뿔을 얻을 때까지, 적당히 숨기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
“그러지. 나 또한 네게 줄 것이 있다.”
“뭐지?”
묘하게 기대하는 눈치의 엘레노아.
번쩍.
“······이건?”
내가 내미는 찬란한 배지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엘레노아. 엘프에게 보석은 아름다운 돌과 다를 바가 없지만, 눈치는 있는 법.
인간 세상에서 대단히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란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는 프레야 여신의 모습이 새겨진 플레티넘 배지를 선물한다.
“프레야 교단 징표다.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엘프 부족을 데리고 에니스 백작령으로 대피해라. 이 배지를 보여준다면 받아줄 것이다.”
“!!”
프레야 교단 백금 배지.
이는 프레야 교단 역사상 수백 년간 총 5명 밖에 없었던 배지니까.
만약 이 배지를 보여준다면 프레야 교단으로서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곧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그의 수하들이 움직일 거다. 이를 막기 위해선 인간과 엘프가 협력해야 해.’
나는 알고 있다.
진혈의 뱀파이어들은 엘프만으로 막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지.
아무리 나라도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전부 구할 수 없으니까.
먼 훗날 ‘진 엔딩’ 때, 대륙 연합군을 결성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살려두고 싶었다.
“······흥, 난 또 뭐라고. 우리 엘프는 다른 종족 따위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금 배지를 버리진 않는 엘레노아.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종족의 지도자답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꼭 대피할 때가 아니더라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
“너 또한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사용해도 좋다.”
따라서 적당히 여지만 두고 떠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진혈의 뱀파이어.
그들이 하이 엘프를 찾아내기 위해 반드시 나타날 것이란 걸.
그리고 아무리 궁왕 엘레노아라도 홀로 그들을 전부 막아낼 수는 없다는 걸 말이다.
‘하기야 지금은 말해줘도 납득할 수 없겠지.’
궁왕 엘레노아.
그녀는 사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실력과 명예, 자존심이 높을 테니까.
진혈의 뱀파이어가 십 수 명이나 되고, 그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말을 믿을 수 없겠지.
깨달을 때는 이미 늦었을 테고 말이다.
펄-럭.
따라서 고대용의 사원을 떠난 후, 몰래 용용이를 탄다.
원래라면 곧장 마경에 갔겠지만,
‘탐지석 정도는 설치해주고 떠나야겠군.’
탐지석.
특별한 힘은 없으나, 특정 마나나 마력을 느끼면 알림을 주는 아티펙트다.
어차피 진혈의 뱀파이어들은 내가 ‘정화한 순례자의 십자가’로 직접 막아야 하니까.
소형화 권능으로 미리 가져온 탐지석들을 설치해두는 것이다.
***
펄-럭.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검은 날개를 펼치고 황량한 초원을 난다.
낮에는 나무 그늘로 태양 빛을 피하며 뱀파이어 무리를 이끈다.
“안색이 너무 창백하십니다. 저하. 조금 쉬었다 가셔도 됩니다.”
“······.”
그를 호위하는 진혈 뱀파이어들은 조심스럽게 왕자의 안위를 살핀다.
뱀파이어는 햇빛에 닿으면 불쾌할 뿐 아니라, 노화가 가속돼서 평소라면 잠을 청하니까.
그러나 현재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하이 엘프를 찾기 전까지 쉼 없이 이동한 다.
“폐하께서 수백 년간 그리던 일입니다. 거의 다 왔으니 일을 완벽히 처리하고 쉬겠습니다.”
발데마르는 제 아버지 혈마왕 블라디미르를 언급하며 말했다.
지금은 일족의 운명을 바꿀 ‘불로장생의 비약’을 구하기 직전이므로.
그러한 모습에 좀처럼 남을 인정하지 않는 고상한 진혈 뱀파이어들조차 혀를 내두른다.
“저하를 보면 ‘과거의 폐하’ 모습이 떠오릅니다.”
“······.”
과거의 혈마왕 블라디미르.
수백 년 전, 대륙 최서남 지역에 뱀파이어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을 때.
마왕에 막 즉위하고 동족을 한 세력으로 모았으며 주위 생명체를 평정한 자.
그때의 영웅적인 풍모에 ‘혈마(血魔)의 왕’이란 고유명사가 그의 이명에 붙었다.
······물론 이는 언제나 ‘과거의’라는 수식언이 붙는다.
지금은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그저 수명이 다해 죽어가며 공포로 윽박지르는 존재이므로.
“가시죠.”
진혈왕자 발데마르도 부정하지 못하고 움직인다.
고대 유적에서 발굴한 하이엘프의 극소량 피.
이를 통해 혈마법으로 하이엘프의 위치를 찾고 있으므로.
쐐애액.
혈청이 가리키는 대로 ‘고대용의 사원’이 있는 대륙 남서단을 향해 날아간다.
그렇게 날아가다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낸다.
“진혈왕자 저하. 무언가 이상합니다. 이건 설마······?”
“똑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군요.”
발데마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환영 결계.
대륙 서남부 엘프는 뱀파이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일대 지형에 각종 생존 방법을 터득했다. 그 중 하나가 환영 결계 마법이었다.
진혈 뱀파이어들은 적들의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에 다소 경직된다. 발데마르는 겪는 불안과 문제점을 공감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호재입니다. 환영 결계에 빠졌다는 건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했다는 증거이며, 적이 곧장 공격해오지도 않았으니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다만 발데마르는 두려움에 질리지 않는다.
지금 상황을 냉정히 파악해서 장중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 정도로 강한 환영 결계는 관리자들이 항상 있어야 하지요.”
지이이잉, 촤아아악!
진혈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아공간 게이트를 연다.
게이트에서 뿜어지는 막대한 양의 혈액. 자기 피보다 많은 피를 권능에 따라 마치 악귀의 주먹처럼 변한다.
그동안 자신이 비축한 피를 아낌없이 사용한다.
쿠과과과광-!!!
그러한 거대한 주먹을 사정없이 지상으로 내리친다. 마치 설인왕 이미르의 일격처럼 지상일대를 쓸어버린다.
물론 지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황량한 모래바람만 날리는 황야였으니까.
그러나,
와장창!
“크아악?”
“어, 어떻게······?”
두 어 번의 난도질에 황량한 황야로 보이던 지상이 유리창처럼 깨진다.
그리고 드러나는 건 울창한 숲과 피투성이로 쓰러진 십 수 명의 엘프들.
눈동자에 붙어있던 비늘이 떨어진 듯 색안경이 사라진다.
“모, 모두 흩어져! 화살 장전해라!”
“비상종을 울려라! 마을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야······. 끄아아악!”
진혈왕자는 그들이 달아나기 전에 혈마법을 발동하여 거대한 주먹을 수십 개의 손으로 바꾼다.
달아나던 엘프들의 목을 모조리 붙잡는다.
꽈악!
“이럴 수밖에 없는 날 용서하거라. 너희가 엘프 족을 위해 헌신하듯, 나 또한 뱀파이어들을 위해 헌신할 뿐이니.”
“커윽, 그으으윽!”
진혈왕자는 감정이 쓰라린 심정으로 목소리로 읊조린다.
한손으로 엘프 경비병의 목을 움켜쥔다. 터트릴 듯 힘껏 움켜쥔다.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는 엘프.
“너희는 이미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단지 피해자를 줄일 방법만이 있을 뿐.”
“그으윽······. 뭐라?”
“하이 엘프가 있는 곳을 말하거라. 그럼 모두를 살려주마.”
진혈 왕자는 붉은 눈동자를 담담히 빛내며 말했다.
“······너흰 왜 그토록 하이엘프의 피를 갈구하는 것이냐?”
“그야 불로장생의 비약만 만든다면 최대 수명에 제한 없이 피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는 숨길 일이 아니라는 듯.
“그 말은, 너희 뱀파이어가 향후 얼마나 강해질지 모른다는 뜻 아니더냐?”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너희의 피를 수혈할 필요는 없지.”
“!”
발데마르는 말한다. 영생할 수만 있다면 트롤의 피를 갈취해도 상관없으므로.
마치 공생의 길이 있다는 듯 속삭인다.
퉤.
이에 목이 붙잡힌 엘프는 진혈왕자 발데마르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피가 반이다.
“좆, 까······. 가증스러운, 흡혈귀 새끼야······.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
“하이 엘프가, 아직 실재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안다한들, 우리 엘프들은, 동족을, 팔지 않을······. 거다······. 결국, 영원히 강해진 뱀파이어들에게 파멸을 당할 테니까······.”
엘프는 비웃음 섞어서 말했다.
애초에 엘프 또한 악마와 드래곤처럼 망각이 없는 종족.
한 번 이웃을 배신할 경우, 백년 넘게 그 때의 죄책감을 느껴야 하므로. 결코 배신하는 이가 없는 것이다.
발데마르는 조용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는다.
“적으로 만나서 안타깝구나.”
콰드드득!
그와 즉시 그 엘프의 목을 꺾어 죽인다.
발데마르는 죽은 엘프의 육체를 땅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잠시 침묵하며 애도한다. 아무리 자신을 욕보인 적이라도 존중하는 모습.
그 모습에 오히려 진혈의 뱀파이어들은 더욱 발데마르를 밤의 귀족이 아닌, 왕족으로 우러러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남은 엘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나는 학살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단지 하이엘프의 혈액이 필요할 뿐.”
잔뜩 긴장하여 벌벌 떨고 있는 엘프들에게 부드럽게 속삭인다.
자신들이 남의 피를 갈취해야 살아남는 종족만 아니었어도 상황이 달랐을 수 있다는 듯.
이 비극의 책임자로서 장중하게 말한다.
“지금이라도 하이엘프가 있는 곳을 말하거라. 그리한다면 이곳에 있는 너희는 물론, 너희 마을에 있는 모두를 살려주마. 내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노라.”
***
-움~! 움! 움!
흙의 정령 노움이 공사 감독관처럼 날 바라보며 힘차게 응원한다.
현재 노움이 땅을 파주고, 내가 일정 거리마다 탐지석을 파묻고 있었으니까.
‘······이거 생각보다 힘들군.’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이 발동합니다. 몸이 쉽게 피로해집니다!
나는 뜨거운 햇빛 아래 굵은 땀을 훔친다.
물론 탐지석을 발동시키고 묻는 것만 하면 되지만, 그조차 힘든 일이었다.
탐지석이 고장 나면 안 되기에 산삼을 다루듯 섬세히 묻어야 했으므로.
개구쟁이처럼 힘만 좋은 노움을 부려서 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공들여서 탐지석을 거의 다 설치했을 때였다.
땡, 땡, 땡, 땡, 땡!
“······?”
아주 먼 곳에서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린다.
일반적인 청각으로는 결코 들릴 수 없는, 아주 먼 거리지만 극도로 발달한 신경 덕분에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엘프 마을.
그곳에서 비상종을 치며 대피하고 있었다.
‘저쪽은 궁왕 엘레노아가 향한 곳인데?’
나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다.
지금이라도 엘레노아에게 통신해야 하나 고민했을 때,
쿠과과광!
“!”
이번엔 엘프 마을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삽을 버려두고 드래곤 아이로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본다.
드래곤 아이 덕분에 다른 감각보다 시각이 훨씬 발달했으므로.
“!!”
그리고 발견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숲.
그곳에서 혈마법이 자행됐는지 핏기 없이 메말라 죽은 엘프 시체가 보인다.
특이한 점이라면 수십 명의 엘프가 모두 목이 꺾여 죽어있었다. 누구도 달아나지 않았는지 생존자는 없다.
“벌써 나타났군.”
나는 상대가 진혈의 뱀파이어라는 걸 직감한다. 저러한 권능을 사용하는 자는 딱 한 명밖에 없으므로.
‘······조금만 늦게 알았어도 대참사가 일어날 뻔 했군.’
나는 죽은 엘프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만약 저쪽 엘프들이 환영 결계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엘프 마을에서 이상 징후를 느끼고 곧장 비상종을 치지 못했다면,
나조차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진정으로 부활하겠지······.’
나는 새삼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나라도 군단장과의 전투 중에 피한 방울 안 흘릴 수는 없으므로.
하이 엘프의 피를 빼앗기는 순간, 마지막으로 내 피를 빼앗기면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각성할 수 있는 것이다.
펄-럭.
-키야아악!
따라서 나는 곧장 용용이에 탑승한다.
진혈의 뱀파이어가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으므로.
탐지석을 설치하는 일을 때려치운다.
그쪽으로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