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진혈왕자 (2)
궁왕 엘레노아는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비상 대피 신호.
뾰족한 귀 덕분에 소리에 밝은 엘프로서, 자신이 향하던 엘프 마을에 비상종이 울리는 걸 들었으니까.
‘······마법종 5번. 이건 뱀파이어의 습격을 알리는 신호다.’
궁왕 엘레노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다.
뱀파이어.
최근 흡혈귀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엘프의 숲을 학살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으므로.
마치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왕성하게 생명체들을 흡혈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군. 만약 네일이란 인간이 없었으면, 고대용의 사원에서 방황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을 텐데.’
궁왕 엘레노아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다.
자신이 고대용의 사원에 들어가느라 시간을 크게 빼앗기고, 정예 레인저 부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면?
지금 황야의 부족이 전멸하는 건 물론, 다른 엘프 마을을 구해줄 수조차 없을지 모르니까.
실제로 궁왕 엘레노아는 탐험가 네일을 처음 보았을 때, 죽여야 하나 고심도 했었으므로.
만약 일이 잘못됐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됐기에 모골이 오싹할 수밖에 없다.
투두두두!
말발굽이 땅을 두드리는 소리만 난다.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모두 긴장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궁왕 엘레노아는 선두에서 레인저 부대를 돌아보다가, 문득 자신의 전속 시종인 엘로힘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음을 눈치챘다.
“두려운 것이냐?”
“······.”
“넌 전투 인원이 아니다. 따라오지 않아도 누구도 비웃지 않을 것이다.”
궁왕 엘레노아는 차분한 어조로 다독인다.
뱀파이어.
그들은 최정예 레인저 부대조차 긴장할 만큼 막강한 적이므로.
궁왕 엘레노아가 아니고서야 그 어떤 엘프도 홀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기에.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 모르니, 두렵다면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아뇨. 꼭 가고 싶습니다. 저곳엔 제 어린 동생이 있거든요.”
동생?
엘레노아는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동생이 왜 다른 부족에 있는가?
그런 눈치에 엘로힘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께선 몇 해 전 이혼하셨습니다. 제 동생은 어머니를 따라 황야의 부족으로 갔었습니다.”
“······!”
그 말에야 엘레노아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사는 엘프에겐 다른 부족간의 결혼도, 이혼도 종종 있는 일이므로.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구나.”
궁왕 엘레노아는 자상한 미소를 짓는다.
저 소년이 어린 나이에도 가족을 위해 용기를 쥐어짰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사왕 중 하나인 궁왕 엘레노아. 뱀파이어 따위에게 단 한 번도 진 적 없으니.”
따라서 객관적인 전적을 말해준다.
소년을 안심시키고 달린다.
대륙 남서부 엘프 연합의 임시 수장으로서, 그리고 시종 엘로힘의 주인으로서.
저 멀리 보이는 황야의 부족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
황야의 부족 소속인 어린 엘프 ‘엘라힘’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피난촌으로 대피했다.
먼 옛날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만들어줬다는 마법 공간. 바위산 동굴에 마법 결계 속으로.
녹색 눈동자의 괴물이라고 또래 애들이 괴롭혀서 그런 게 아니었다.
비상 대피.
유례없는 뱀파이어의 습격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피난촌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근데 엄마. 우리들은 왜 뱀파이어를 무서워하는 거야? 아까 엄마가 은화살 한 방이면 물리칠 수 있다면서?”
엘라힘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엄마가 한 말과는 사뭇 상황이 달랐으니까.
“······으응. 그건 말이야. 뱀파이어가 몰래 숨어들어와서 어린 아이나 노약자들을 덮칠 수 있기 때문이야.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 많잖니.”
“아하, 그런 거야?”
그제야 납득하는 엘라힘.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엄마는 가볼게.”
“응, 바쁘다며. 빨리 가봐.”
“······.”
역시 엄마도 일 나가긴 싫은 걸까?
성질 급한 엄마는 오늘따라 왜인지 발걸음이 느렸다.
엘라힘은 자꾸 망설이는 엄마를 어서 보내준다. 자신은 착한 딸이니까.
엄마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고 하기에, 잘 다녀오라고 환하게 웃어준다.
“뭐야. 녹색 괴물 엘라힘. 너도 여기로 왔냐?”
“엇, 뭐야. 가라드! 너도 있냐? 짜증나게.”
그때 피난촌에서 또래 친구를 만났다.
가라드.
단 둘이 있을 땐 과일을 주는 착한 놈이긴 한데, 남들과 있을 때는 짓궂은 장난을 치는 이중인격 같은 놈이다.
“방금 그분이 네 어머니야? 널 닮아서 참 예쁘시네······.”
“너 지금 우리 엄마 외모 평가하냐?”
“아, 아니, 칭찬이잖아. 왜 그래?”
그런가?
하기야 너무 예민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가라드 저놈은 매번 짜증나게 구는 배신자라서 괜히 한 소리 했을 지도.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러자 가라드는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연다.
“야, 엘라힘. 넌 무섭지도 않냐?”
“응.”
“하기야 어른들도 지금 무서워한다는데······. 응? 안 무섭다고?”
“어, 금방 엄마가 처치하고 올 테니까.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이해가 안 될 뿐이야.”
그러면서 엘라힘은 제 어머니를 자랑했다.
마을 자경단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하는 베테랑이라면서. 그러자 적당히 맞장구치는 가라드.
“확실히. 그 정도시면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혼자 처치하실 수 있겠다.”
“그치?”
“그럼 수장님께서 굳이 이렇게 대피를 명하실 리가 없는데. 어쩌면 이번에 쳐들어 온 게 일반 뱀파이어가 아닌 게 아닐까?”
“뭐? 일반 뱀파이어? 다른 뱀파이어도 있어?”
가라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엘라힘.
그러자 가라드가 우쭐거리며 말한다.
“뭐야, 너는 레인저 딸이라더니. 순혈 뱀파이어도 모르는 거야?”
“순혈 뱀파이어라고?”
“응. 일반 뱀파이어보다 몇 배는 쎈 놈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인간 마을 하나 정도는 혼자서도 포위해버린데! 어쩌면 그 놈이 쳐들어와서 어르신들이 두려워하시는 걸지도 몰라!”
가라드는 뱀파이어를 몸짓으로 표현하며 말했다.
인간이 아무리 약하다해도 혼자서 에니스 백작령을 포위해버릴 정도라는 둥, 아무리 뛰어난 엘프 레인져라도 절대 근처에도 안 간다는 둥 말했다.
그러자 처음엔 공포에 질렸다가 금새 눈을 째는 엘라힘.
“그 말은 지금 우리 엄마가 질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 그건 아닌데······. 어쩌면 다치실 수도 있다는 거지. 만약 너희 엄마가 안 계신 이곳에 쳐들어와도 무섭고.”
“!”
그제야 엘라힘은 눈을 깜빡 뜬다.
확실히.
어른들이 이토록 두려워할 정도의 놈이라면 아무리 그녀의 어머니라고 해도 크게 다칠 수도 있으므로.
“그래서 엄마가 많이 걱정하신 거구나.”
걱정하는 마음이 든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했다.
***
“······예상보다 너무 시간이 지체됐군요.”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바닥에 널브러진 가죽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붙잡은 엘프 정예 레인저들은 하이엘프가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결국 일일이 다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건방진 귀쟁이들 같으니. 과연 멸족되는 놈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약육강식. 강자지존. 이 기본적인 원칙조차 위배하는 놈들은 살아있을 자격이 없지요. 이번 기회에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히익, 꺼흑······!”
진혈의 뱀파이어들은 끔찍이 죽어간 엘프들을 비웃는다. 그들의 손에는 이미 엘프 주민 하나가 쥐어져 있다.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수많은 엘프 중에 누가 하이엘프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전까지 살육을 자제하십시오.”
발데마르는 진중하게 명했다.
혈청은 방향만 나타내줄 뿐, 정확하게 누가 하이 엘프인지 지명하진 않으니까.
하이엘프를 찾기 위해선 일일이 감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발데마르 전하.”
“하이엘프를 찾을 때까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히익······.”
진혈의 뱀파이어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붙잡힌 엘프 주민이 공포에 질릴 만큼 가학적인 표정을 짓는다.
팅, 쐐액!
“······!”
그때 저 멀리서 화살 한 발이 날아온다. 진혈 뱀파이어 하나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는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다.
“······네 이놈들! 이젠 남서부 끝에 있는 이곳까지 학살하러 온 것이냐!”
“아주머니를 내려놔라! 어서!”
“?”
그곳에 있는 건 엘프 자경단이었다.
나름 정예인지 정령까지 소환한 엘프 5명. 그들이 모두 화살을 겨눈다.
“나참. 하다하다 귀쟁이에게 상처를 입다니.”
“!!”
스르륵.
물론 뱀파이어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이마가 꿰뚫렸던 뱀파이어는 스스로 제 몸을 복구하며 붉은 눈을 번뜩인다.
진혈의 뱀파이어.
그들은 홀로 작은 마을 하나를 봉인할 수 있는 뱀파이어 종족.
그중에서도 상위 1%에 해당하는 순혈의 뱀파이어보다도 높은, 최고위 귀족들이었으니까.
하나하나가 마계의 대악마에 준하는 괴물들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저들이 온 방향은 하이엘프와 전혀 다른 방향이니 상관없겠지요?”
촤아악! 쿠고고고!
진혈의 뱀파이어들은 멋대로 붉은 피를 끌어올린다. 피는 거대한 파도가 되고, 강이 되어 숲 일대를 붉게 물들인다. 엘프 자경단을 덮친다.
“끄아아아악!”
“커흑! 으아악!”
그 즉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엘프들.
순식간에 피가 탈수되어 빠르게 쪼그라든다. 그들의 비명은 달아나던 엘프들을 더욱 분주하게 만든다.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인상을 찡그리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확실히 적당한 본보기는 필요할 것 같군요.”
고오오.
발데마르는 휩쓸린 붉은 파도 뒤에서 느껴지는 정령의 힘을 느꼈다.
엘프 자경단.
지금 소란을 느끼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자들은 고작 5명이 아니므로. 엘프 마을에 있던 성인이라면 누구든 무기를 잡고 몰려드는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진혈의 뱀파이어가 묻는다.
그럼에도 이들에겐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탐스러움. 오히려 피를 보충할 좋은 영영분이라고 생각해서 눈독을 들일 뿐.
진혈왕자는 잠시 눈을 감는다.
살육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는 뱀파이어의 지도자. 수백 명의 엘프를 죽이더라도 한 명의 뱀파이어를 더 아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또한, 그렇다고 너무 자유분방하게 풀어주다간 하이엘프를 찾는 대의를 놓칠 수도 있으므로.
“철혈(鐵血)의 뱀파이어 ‘머스트롬’님.”
따라서 한 진혈의 뱀파이어에게 이 자리를 맡긴다.
발데마르의 부름에 체격이 튼실하고 마초적으로 생긴 중년의 뱀파이어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하명하십시오. 발데마르 전하.”
“외숙부님께 이곳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발데마르는 머스트롬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머스트롬 또한, 눈을 피하지 않고 씨익 웃는다.
“믿어주십시오.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머스트롬은 호탕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한다. 황공하다는 태도, 마치 기회를 잡았다는 태도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펄럭.
발데마르는 꾸벅 묵례하고 떠난다. 날개를 펼치고 혈청이 가리키는 대로 떠난다. 다른 진혈의 뱀파이어들도 발데마르를 따라 하이 엘프를 찾으러 간다.
“크크, 남은 엘프들은 모두 내 차지인가?”
홀로 남겨진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은 게걸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며 남은 엘프들을 바라본다. 마치 피를 참느라 힘들었다는 태도다.
쐐애애액!
이에 엘프 자경단들은 대답하는 대신 일제히 화살을 쏟아낸다.
대부분 마나를 담은 화살이었으나 드물게 몇 발에는 정령의 힘도 담겨 있었다.
무려 중급 정령의 화살. 엘프 사회에서도 최정예 레인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등급이었다.
수차례 폭발이 일어난다.
제대로 적중한 소리에 엘프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쿠과과광-!!!
“?!”
그러나 연기가 걷히고 모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검붉은 색 철벽.
피에서 특정 성분을 뽑아내서 만든듯한 거대한 장막이 진혈왕자가 떠난 방향 일대를 감싸고 있었으니까. 마치 두꺼운 성곽을 두른 듯 말이다.
철혈의 장막은 분명한 고체였으나, 정령 화살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날파리 같은 것들이 꼴에 발악하는군.”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은 투박하게 웃었다.
“도망칠 거면 지금 치는 게 좋을 거야. 그쪽 방면에서 온 것들은 모조리 밀어버릴 테니까.”
“······!”
머스트롬이 양손을 들어 올린다. 그와 동시에 움직이는 철혈의 장막.
쿠구구궁. 쿠과과광-!!
엘프 자경단이 있는 쪽으로 날아간다. 성벽이 움직이듯 공간을 밀어버린다. 무시무시한 진동과 함께 주위 흙과 나무를 쓰러뜨린다. 그 아래 깔린 엘프 자경단들을 형체도 남지 않도록 뭉개드린다.
엘프들이 정령을 소환해서 흙의 벽을 쌓아보고, 4대 속성 마법을 퍼부어봐도 소용없었다.
비명이 메아리친다.
***
펄-럭! 쐐애애액!
【바람의 길 lv5.】
나는 용용이를 타고 초고속 비행한다.
진혈의 뱀파이어.
이들은 에니스 백작령을 단둘이 봉쇄해버린 순혈의 뱀파이어 중에서도 엘리트라는 걸 아니까.
그동안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하느라, 잠적했었을 뿐, 이까짓 엘프 마을이 버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나조차 위험하지만······. 궁왕 엘레노아를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겠지.’
다만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사왕 중 한 명인 엘레노아.
그녀는 향후 악의 교단과의 결전에 꼭 필요한 인물. 대륙 남서부 이종족들을 통합해줄 수 있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는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마정석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 혈마왕 블라디미르와의 결전은 피할 수 없으므로.
그때, 한꺼번에 진혈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것은 최악일 터다.
차라리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떨어져 홀로 돌아다니는 걸 각개격파하는 유리하다.
‘저쪽이군.’
-lv19 황야의 엘프 부족 사라다.
-lv25 황야의 엘프 부족 바이린.
나는 숲에 숨어있는 엘프들을 발견한다.
엘프 마을 자경단.
현재 비상상황인지 사방에서 헤쳐모인 모양.
쐑.
내가 초고속으로 다가오자 경고 없이 곧장 화살을 날린다. 용용이가 원체 거대하다보니 초대형 몬스터만 보였는 모양.
【워터 실드 lv5.】
팅!
“······!”
나는 즉발 마법을 발동해서 막아낸다. 천천히 하강한다.
그제야 엘프들은 용용이 등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다.
“누구냐! 물러가라. 인간. 더 다가오면 뱀파이어의 조력자로 간주하겠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곧장 흉흉하게 나서는 엘프. 그나마 내가 적의 없이 천천히 하강했기에 경고라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할지 준비하고 왔다.
“나는 궁왕 엘레노아가 보낸 지원군이다. 길을 비켜라.”
“!”
나는 공중에서 엘레노아가 선물한 나무패를 보여준다.
비록 대단히 먼 거리였지만, 엘프는 태생이 탁월한 궁수 종족.
뛰어난 명사수답게 청각만큼이나 시력이 좋았다.
“······정말로 엘레노아님의 마나가 담긴 나무패다.”
“지원군? 그, 그 말은 궁왕 엘레노아께서 오고 계시다는 말이냐?”
이들은 엘레노아의 나무패에 두 눈을 휘둥그레지며 반신반의하며 묻는다.
인간 주제에 엘레노아의 나무패를 가지고 있다니! 평소라면 쉬이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원체 비상상황이다보니 믿고 싶은 모양.
“그래, 궁왕 엘레노아께서도 이곳에 오고 계시다.”
“!!”
내 말에 절망만이 가득하던 엘프들의 눈동자가 당장 환희로 바뀐다.
남서부 엘프들에게 궁왕 엘레노아는 가히 전설적인 영웅이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궁왕 엘레노아는 고대용의 사원을 정복한 후, 다른 동족들을 데려오려고 이곳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엘레노아를 높여 불러 주는 건 기분이 묘하긴 했다.
“지금 뱀파이어는 어디에 있지?”
“피난촌으로 가고 있다!”
“피난촌?”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곳은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나오지 않는 마을이기에 피난촌이란 게 있었는 줄 몰랐다.
“그래, 수십 년 전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님께서 뱀파이어들을 물리치시고 지어주신 마법 결계다.”
“······!”
엘프 자경단은 그 이후 다시 뵐 수는 없었다고 덧붙이며 말한다.
‘······아무래도 실베스타가 황제 세실리아를 떠나기 전에 들렸던 곳인 모양이군.’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다.
그리고 엘프들이 안내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쿠구구궁, 쿠과광-!!
-키야아악!
그러자 곧이어 들려오는 굉음. 거대한 흙먼지가 충격파가 되어 날아온다. 용용이가 거칠게 포효하며 경계한다.
“끄아아악!”
“······!”
-lv59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 (광폭화.)
그곳에는 검붉은 피의 벽이 일대를 양분하고 있었다.
‘이건?’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투룸.
특정 공간을 방어하는 데 최고의 권능인 ‘철혈의 장막’을 가진 진혈의 뱀파이어다.
‘원작 때,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있던 마경을 지키는 수문장이었지.’
저 철통같은 방어력에 나조차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놈과 맞닥뜨렸다.
하지만 차라리 지금 만난 게 나았다. 끝없이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마경에서 상대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놈이 혼자 저기에 있다는 건 설마 진혈의 뱀파이어가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인 건가?’
다만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분명 엘프들은 뱀파이어가 피난촌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반 뱀파이어도 아니라, 진혈 뱀파이어가 이곳에서 길을 막고 있다니.
그렇다면 피난촌으로 움직인 뱀파이어는 최소 진혈의 뱀파이어라는 뜻이기도 했다.
‘······더구나 피난촌 방향은 궁왕 엘레노아가 있던 방향이 아니다. 그렇다면?’
설마.
하이 엘프가 엘로힘이란 청소년 말고도 다른 아이가 또 있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대로 진혈의 뱀파이어가 피난촌에서 하이 엘프의 피를 가지고 달아난다면.
극도로 위험하다.
불로장생의 비약을 마신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감히 마계 대군주인 심연왕 프로세피나에 비할만 하니까.
‘서둘러야겠군!’
고오오!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붉은 눈의 스태프를 고쳐 든다.
어째서인지 요즘 전력을 다해야 할 상대가 계속 등장하는 느낌이지만.
어쩔 수 없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나서야 하니까.
힘으로 뚫고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