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8화 (58/70)

[58]

***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꼭 천둥 번개가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긴장이 꺼뜨려 진 듯 미어캣처럼 문만 바라보던 시안나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언제 분노했냐는 듯, 디트리히가 걱정스러운 손길로 가녀린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관심은 온통 시안나뿐이었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하아, 응……. 디트리히 덕분에, 괜찮아.”

시안나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속에서 시커먼 죄책감을 밀물처럼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디트리히 앞에서 굳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겨우 꺼뜨릴 듯한 작은 행복을 쥔 참이었다.

“조금 지쳐서……. 이만 갈게.”

디트리히의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달싹거렸다. 지쳐 보이는 모습이 자신과 밤을 보낸 사실을 부정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디트리히가 나가려는 시안나의 팔목을 붙잡고 몸을 끌어안았다. 그가 시안나에게 단단히 일렀다.

“미리 말하겠지만 저는 어제 일에 한 치의 후회도 없습니다.”

더운 입김과 함께 쏟아진 단호한 음성에 시안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누님께서도 저를 원하셨다고 느꼈는데……. 하아, 제 헛소리라면 무시해 주십시오.”

그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보내기 싫습니다.”

“…….”

“만약 누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라면…… 내일 밤, 제 방으로 찾아와 주시면 안 됩니까?”

“……알았어.”

“누님!”

흔쾌히 승낙하자 어린아이처럼 웃는 디트리히와 대비되게 시안나의 얼굴은 무감했다.

사실 지금 당장 디트리히에게 와락 안기어 같은 마음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거친 뺨을 비비고 키스하고 싶었다.

그와 반대로 분노하는 에르마야를 보자 눈앞에 놓인 현실이 확 실감이 났다.

그가 카릴과의 관계를 숨기는 이상 이 평화는 위태로웠다. 그 외 살인 사건이나 예언서의 비밀 등……. 해결해야 할 것이 산적해 있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해답이 책 안에 있다던 카릴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책만 보는 거야. 그 책을 보더라도 디트리히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변치 않을 거고.’

시안나는 말없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뒤 그녀는 제 방으로 달아났다.

***

“어머, 시안나 님. 오늘따라 나른해 보이시는걸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그, 그럴 리가……. 하하…….”

미셰리는 오후에 티타임을 가지는 시안나를 위해 간단한 다과를 내어왔다. 시안나는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자수를 놓던 것을 궤짝으로 치워 놓았다.

역시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본 미셰리의 감은 날카로웠다.

그녀가 표정 관리를 해도 입매가 미미하게 떨린다느니,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느니, 작은 차이로 그녀의 기분을 맞추고 마는 것이다.

‘사실 아직 예언서를 볼지 말지로 고민 중이긴 한데.’

자신만만하게 그에게 오게 될 거라고 엄포한 카릴. 현실이 되어 디트리히의 곁을 떠나 카릴에게 돌아갈까 봐 시안나는 무서웠다.

별개로 미셰리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별로, 다른 날과 차이 없는걸.”

“이상하다. 제 감이 녹슨 걸까요. 분명 사랑 앞에서 중대한 결정을 곧 내리려 하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는데.”

……미셰리, 너 솔직히 말해. 너 오늘 아침에 내가 디트리히 방에서 나오는 걸 봤지?

시안나는 미셰리에게 윽박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아마 에르마야도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

공작이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건 공작 부인인 그녀에게 꽤 치명적 일터다.

에르마야를 떠올린 시안나의 얼굴이 한층 가라앉았다.

그녀와 척을 지긴 했지만, 그녀의 신세를 생각하면 불쌍했다.

공작가에 들어온 평민 여자. 평민이 하나도 없는 이 저택에서 그녀는 뒷배도 없었다. 헤이스에게 이용당하기까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시안나는 그녀의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디트리히를 사이에 끼고 다투는 관계가 된 이상, 요원한 일이었다.

“정말 아무 일 없으신 거 맞아요? 표정은 그게 아닌데?”

미셰리는 시안나를 요리조리 살피며 디트리히의 경고를 떠올렸다.

‘절대 누님껜 내가 저택을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도록.’

미셰리가 어제를 회상했다.

가주님은 어질러져 있는 시안나 님의 방을 보더니 그녀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큰일이 생길 거라 예상했는데, 평온한 시안나 님을 보니 착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공작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미셰리는 싸늘한 얼굴을 곱씹으며 전전긍긍했다.

***

시안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 위로 권적운이 얇은 커튼처럼 엎질러져 있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의 방으로 찾아오라고 말한 날은 금방 오늘로 다가왔다.

점심이 막 지난 오후.

그녀는 차를 먹는 것을 뒤로한 채 제 방 한편에 놓인 책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드레스 주머니에 밀어 넣은 책을 꺼냈다.

양피지를 끈으로 묶은 것은 책이라고 하기엔 조잡해 보였지만 달리 칭할 명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눈 한번 딱 감고 읽어 보자. 그리고 카릴과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디트리히 곁에 있을 거야. 겨우 이루어진 사랑이니까.

시안나는 손을 한번 비빈 후 책의 첫 장을 넘겼다. 빼곡히 들어찬 글씨 중 첫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가을날. 나는 그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녀의 눈이 잠시 말없이 첫 페이지를 주륵 읽어 나갔다. 이윽고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건……. 소설 그 자체잖아.”

시안나의 등줄기에서 전율이 흘렀다. 기시감이 들었는데 그녀가 빙의 전 세상에서 읽었던 소설의 첫 구절과 일치했다. 그다음 문장 또한.

그렇다면 ‘나’라고 지칭되는 건 에르마야일 것이었다. ‘그’는 디트리히겠지.

시안나는 심각하게 턱을 쓸었다.

“어째서 내가 읽던 웹소설이 이 소설 속 세계에 존재하는 거지?”

그녀는 분명 현실 세계에서 웹소설을 읽고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왔다. 그런데 소설 내용이 담긴 책이 소설 속 세계 안에 존재한다니. 이상하면서도 말로 정리할 수 없이 꺼림칙했다.

시안나는 의문을 뒤로 한 채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은 익숙했다.

긱스를 따라 아슈토르 공작가에 도착한 에르마야는 디트리히에게 하얀 꽃을 건네받았다. 에르마야가 디트리히에 가진 호감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다.

문뜩 그녀의 뇌리에 번개가 꽂혔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잠시만. 이게 진짜 내가 봤던 소설이라면 브라움과 닐이 죽은 이유를 밝혀 낼 수 있을지도 몰라.”

예언서를 말하며 벌벌 떨던 닐. 그리고 미래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겠다던 브라움.

두 사람의 공통점은 미래가 적힌 예언서를 알고 있다는 거였다. 분명 예언서에 그 정답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브라움과 닐. 두 사람 다 카릴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소설 후반부에 카릴이 등장하는 부분부터 보면 될 것이다.

에르마야와 카릴의 첫 만남은 건국제였다. 카릴은 디트리히의 파트너인 그녀를 보고 묘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여러 장 넘겨서야 그녀가 원하던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여기다. 건국제가 일어나기 전……!”

멀리서 갈색 곱슬 머리카락이라고 묘사된 의문의 인물이 시안나와 디트리히가 대화하는 걸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내용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브라움이 디트리히를 암살하려고 한 사건은 중반부이다. 훨씬 이전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닐 크라운은…… 어디서 나타나는 거지?”

시안나는 건국제까지 가서야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잉크를 더듬으며 글자를 읊조렸다.

“디트리히는 에르마야와 함께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는 시안나에게 다가갔다. 상대 남성은 찬연한 금발에 하얀 제복에 우아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시안나가 글씨를 계속 읽어 나갔다.

“디트리히가 물었다. 누님……. 저 남자는……?”

누군데?

“시안나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넌 몰라도 돼.”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고 있던 시안나가 이마를 짚었다.

이러면 닐 크라운인지 확신할 수 없잖아!

그렇지만 시안나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는 묘사로 보아 조연을 아닐 듯싶다.

백 퍼센트 확신은 안 서지만 닐 크라운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브라움과 닐 크라운의 공통점은 카릴의 수족이라는 것과 소설에서 디트리히 주변에 깨작깨작 나타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약 아직 살인 사건이 끝난 게 아니라면? 소설 속에 힌트가 보일지도 몰라.”

예언서라는 말은 틀렸다. 그녀가 읽은 건 소설일 뿐, 실제 이 세상과 똑같지 않았다. 그래서 브라움과 닐 크라운이 살해당한 일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주변을 돌아다닌 카릴과 친한 조연을 탐색한다면 다음 살해당할 인물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말이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찬찬히 읽던 시안나는 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원래는 무어라고 쓴 걸까.”

시안나는 예언서, 아니 소설책에 있는 글씨 중 하얀 유화 물감 위에 쓰인 글씨를 톡톡 두드렸다.

이 소설책에서 흰 유화 물감을 덧칠하여 지워 버린 부분이 있었다. 지워 버렸다는 것도 살짝 애매한 게 유화 물감 위에 글씨를 쓴 거라 수정이라고 봐야 할 듯했다.

소설을 수정한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최초로 이 소설을 쓴 사람은? 소설의 제목이 <에르마야의 비밀 일기>니까 에르마야가 쓴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일기를 작성한 걸까?

시안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상대하다 머리를 헝클여 뜨렷다.

“딴 길로 새지 말자. 일단 중요한 건 다음 범행이 일어날지의 여부야. 다음 살해당할 사람이 있을지 찾아보면 범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그래야 자신과 디트리히에게 쓰인 누명을 벗길 수 있었다.

시안나는 한참 동안 책과 씨름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파란 하늘에 새빨간 어둠이 섞여들었다. 계속 변화하는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종국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는 어둠이 내리깔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둘씩 진실이 가닥을 잡히기 시작했다.

찌르르. 고즈넉한 풀벌레 소리를 들어서야 시안나는 정신을 차렸다.

“벌써 디트리히와 만날 시간인 건가.”

이 책을 읽은 이상, 시안나는 긱스처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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