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헤이스라니?
시안나가 묻기도 전에 디트리히가 제복의 단추에 손을 올렸다.
톡, 톡, 하는 소리와 함께 구겨진 정장이 침대 시트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가 하얀 튜닉까지 머리 위로 벗었다.
햇살이 침대에 무릎을 딛고 일어선 디트리히의 우락부락한 등에 쏟아졌다. 옷을 갈아입힐 때마다 손톱이라도 닿을까 조심해야 했던 다부진 가슴팍, 그 아래 울퉁불퉁한 복근이 꿈틀거렸다.
“잊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야성적이고 짐승 같은 살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재규어처럼 시안나를 완전히 덮었다.
그가 들끓는 목소리를 냈다.
“헤이스가 잊히지 않는다면 결혼식을 올리실 때까지 저를 가지고 노십시오. 기꺼이 어울려드릴 테니.”
디트리히의 커다란 덩치가 허우적거리는 다리 사이로 쑥 들어왔다. 날렵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꼭 까만 표범 같았다.
시안나는 격렬한 불꽃이 타닥타닥 이는 눈동자를 마주해야 했다.
“디, 디트리히.”
너무 거대하고도 갑작스러운 사건에 시안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에르마야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디트리히가 사실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
머리가 뚫릴 것 같은 열정적인 눈빛과 그녀를 원하는 얼굴이 그 증거였다.
그의 마음을 깨닫자마자 시안나의 속에서 높게 쳐 놓았던 방벽이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이전에는 원작대로 흘러가게 만들어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리게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저주에 풀리고 나서도 긱스의 반대로 그녀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을 막는 장애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카릴과 그의 관계가 걸렸지만 지금은 자신만 바라봐 주는 남자와 마음이 합쳐지고 싶었다.
시안나는 오랫동안 꽁꽁 감춰 뒀던 마음을 숨김없이 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등을 퍽퍽 때리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질타도, 고용인들의 수군거림도. 모든 걱정 근심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손이 힘없이 침대 시트로 털썩 떨어졌다. 이제 더는 그를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요하게 시안나를 갈구하던 디트리히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누님. 저를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시안나는 대답 대신 디트리히의 목에 팔을 걸었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디트리히의 얼굴이 더욱 또렷해졌다.
디트리히는 목에 감기는 팔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허기진 시선에 배 안쪽마저 저릿해졌다.
그가 가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자 전기 같은 자극이 일었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쭉, 하고 펴졌다.
“이젠, 누님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그가 하얀 빗장뼈에 이를 쿡 박아 넣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
짹짹. 경쾌한 지저귐이 귓가에 꽂혔다.
시안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었다.
눈을 떠도 시야는 암막 커튼이 쳐진 것처럼 새까맸다.
여긴?
시안나는 문득 무언가가 자신을 단단히 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거웠다. 그녀는 끙끙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품이 몰려오자 기지개를 켜려 하는데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윽! 아야야…….”
힘겹게 몸을 세운 시안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검은색 벽지, 처음 보는 이불, 넓은 방. 그녀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어라?”
시안나가 무의식적으로 침대를 짚는데 손바닥에 단단한 것이 잡혔다. 퍼뜩 아래를 내려다본 시안나의 눈이 둥그레졌다.
흐트러진 까만 앞머리, 눈꺼풀을 감은 조각상 같은 수려한 얼굴, 그 아래로 이어지는 빗장뼈와 탄탄한 가슴, 굵은 팔뚝.
바로 옆에 헐벗은 디트리히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꽉 짜인 근육은 어젯밤 그녀를 으스러져라 안았던 팔이었다.
“어? 어……!”
시안나가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신음을 흘렸다.
뜨거웠던 밤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찰싹 맞부딪치던 돌 같은 근육, 움직일 때마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남자의 숨결.
‘누님……. 저를 이용해 주십시오, 당신 곁에…… 제가 계속 있을 수 있게.’
‘디트리히…….’
‘남자 둘을 끼고 노시는 게 취향이라면 기꺼이 어울려드리겠습니다.’
쾌감이 커서 말이 넓은 홀처럼 말이 울렸다. 너무 높고 거대한 감각이었다.
디트리히에게 매달린 그녀는 밤새 엉엉 울부짖었다.
화르르. 모든 걸 생각해 낸 시안나의 얼굴이 딸기처럼 새빨개졌다.
시안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미쳤나 봐. 어젯밤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디트리히가 먼저 유혹했다고 홀랑 넘어가 버리다니. 주변 관계를 정리한 거면 몰라도.
그는 에르마야가 있었고, 시안나 또한 헤이스와 약혼 관계였다.
그녀가 이불을 젖히고 밤새 시달려 부슬부슬한 곱슬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만두십시오.”
갑작스레 그녀의 팔목이 확 붙잡혔다. 언제 깨어난 건지 디트리히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머리카락이 상합니다.”
시안나가 입을 작게 벌렸다.
시안나는 이 잡초 같은 머리카락이 불만스러웠다. 빙의 첫날에도 엑스트라 머리색인 풀빛 곱슬머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지 않았는가.
그런데 디트리히가 칭찬해 준 순간, 이 머리카락이 조금 특별해졌다.
시안나는 그런 내색을 숨기려 일부러 툴툴거렸다.
“옷,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뒤돌아.”
“어제 전부 다 보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안 돼!”
시안나가 벌게진 얼굴로 콩콩 때리는 걸 디트리히가 웃으며 말렸다.
그녀가 때려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맞는대도 싫어하기는커녕 좋아하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어젯밤 뜨거웠던 잔향이 아직 둘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휴지처럼 널려져 있는 드레스를 대충 입었다.
같은 층이니 몸에 살짝만 걸쳐도 충분하겠지?
서로 옷을 차려입은 후, 디트리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가 휙 돌아보자 짓궂은 미소를 지은 디트리히가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나가시기 전에 사랑에 대한 맹세로 키스해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어느새 그의 입꼬리에 매달린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주변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 절대 마음이 변치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뿌리치기엔 달콤한 유혹이었다. 동시에 심장 한구석이 꽉 조여들었다.
‘결국 디트리히는 내게 카릴과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어.’
어젯밤, 시안나가 원한 건 그의 사랑이 아니라 카릴과 적대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끝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시안나는 무거워지는 실망감을 몰아내려 머리를 붕붕 젖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어떠한가? 이렇게 서로 이어져서 행복한데.
그녀는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행복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디트리히.”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붙였다.
하필 그때.
똑똑.
아직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누군가가 방문했다.
시안나가 등을 굳히는데 문 너머로 간드러진 목소리가 나타났다.
“공작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이럴 수가.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이 광경을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에르마야였다. 그녀 또한 헤이스와 아슬한 관계이긴 했지만 이미 정리한 데다 어쨌건 디트리히의 공식적인 부인 아니던가.
시간이 멈추길 빌었지만 잔인하게도 문은 젖혀졌다. 에르마야는 팔목에 타월을 걸치고 세숫대야를 들고 있었다.
“공작…… 님?”
에르마야는 문을 열기 전만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 그의 세안을 돕고 목욕도 거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들은 바로는 디트리히는 저주 때문에 최근까지도 시종들의 목욕 시중을 받았다고 했다. 이젠 부인인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입을 맞추는 두 남녀를 보고 추락했다.
쨍!
손에서 철 세숫대야가 떨어지고 흘러넘친 물이 청록색 양탄자를 적셨다. 에르마야의 눈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지금 무슨 짓을…….”
넋 놓은 시선이 시안나의 대충 차려입은 드레스에 닿았다. 누가 봐도 급하게 입은 꼴이었다.
에르마야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입을 가렸다.
“부인…….”
시안나의 입에서 부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에르마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으로 시안나 앞에 서더니 손을 높이 들었다.
“읏.”
죄인일 수밖에 없는 시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찰싹!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매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녀의 뺨에 아픔은 번지지 않았다.
의문을 느끼며, 시안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공작님. 어째서…….”
에르마야는 뺨에 손자국이 벌겋게 올라온 디트리히를 절망스럽게 응시했다.
“하하.”
이 남자가 어째서 저 여자를 감싸는지는 명확했다.
메마른 웃음을 흘린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해졌다.
“부인인 제가 아니라 저 여자를 택하는 건가요?”
성력으로 그의 저주를 치료해 준 자신이 아니라 저 여자를.
“처음부터 너였던 적은 없다.”
디트리히가 새빨개진 볼을 문지르지도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에르마야는 울지 않으려 노력하며 왼손을 올렸다. 다시 시안나를 때릴 거라고 눈치챈 디트리히가 잽싸게 팔목을 붙잡았다.
“이익!”
에르마야가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무리였다.
에르마야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딱딱한 표정의 디트리히를 응시했다. 무감한 낯에서 고요한 분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로지 시안나를 지키기 위한 격분이었다.
“흑, 끅.”
에르마야는 두 팔이 잡힌 채 무력하게 울음을 삼켰다.
제풀에 지쳐 팔에 힘을 빼자 그제야 결박당한 두 손이 자유를 되찾았다.
비참했다. 지금은 자신이 그의 아내였다.
마른 웃음을 흘린 에르마야는 남자의 등 너머의 시안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살기를 내뿜는 그녀에게 디트리히가 경고했다.
“분명 시한은 남아 있었지. 하지만 한 번 더 그녀에게 손을 올리면 그날로 당장 저택을 떠나도록.”
그녀가 말한 한 달간의 유예를 말하는 것이었다. 에르마야가 서글프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모멸감에 제 팔을 감싸 안다 등을 돌렸다. 그러곤 떨어뜨린 세숫대야를 지나쳐 유유히 걸어 나갔다.
마지막 문이 닫히기 전, 증오로 불타는 눈동자가 시안나를 담았다.
쾅!
화풀이하듯 문이 닫히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두고 봐.”
문 너머에 두 남녀에게 저주를 퍼부은 그녀는 3층을 휙 올려다보았다.
3층은 고용인 숙소였다. 그녀는 주황빛 머리칼의 남자를 떠올리곤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