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9화 (59/70)

[59]

***

달마저 숨어 버린 시각. 저택엔 쥐새끼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시안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있는 방 또한 그랬다.

침대 옆에 참나무로 만든 협탁도, 맞은편 거울도, 방 한편에 있는 피아노도 전부 까만 그림자에 푹 잠기었다. 그런 까만 공간에서 삐걱, 소음이 들렸다.

움직인 것은 바로 아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이었다.

잠시 뒤 여닫이창이 열리고 남자의 까만 그림자가 방에 침입했다.

그는 러그가 깔린 바닥에 조심스레 착지한 후 방을 빙 둘러보다 침대에 시선을 멈추었다.

그가 장막이 처져 있는 침대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

시안나는 오들오들 떨며 침입자가 오길 기다렸다.

남자가 시스루 캐노피를 휙 젖히고 둥글게 부풀어 오른 이불을 확인했다. 그가 혁대의 칼 손잡이를 쥐고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불을 휙 젖혔다.

“……!”

남자의 눈이 확장되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그가 타깃으로 둔 사람보다 왜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 방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역시 왔구나.”

몸을 구기고 있던 시안나가 천천히 일어섰다.

어스름한 밤, 하얗고 투명한 구름이 움직이자 금빛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먹물에 잠긴 방에 빛이 스미며 침입자를 비추었다.

남자를 확인한 시안나의 눈이 미미하게 떨렸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기 싫다는 듯 둘러쓴 쥐색 로브 아래로 어둠보다 더 까만 흑요석 빛 머리칼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로브로 반쯤 드러난 잘생긴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시안나는 협탁에 놓인 램프에 불을 붙인 뒤 남자를 향해 들어 올렸다. 불그스름한 빛이 로브 아래에 야생동물처럼 반짝이는 금안과 잘생긴 콧날을 비췄다.

그녀가 확신에 차 말했다.

“디트리히…….”

작은 목소리에도 남자는 화살이 박힌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이윽고 숨겨도 소용없다고 여겼는지 로브를 벗었다. 남자의 진한 눈썹과 예리한 눈매, 높은 콧대를 불빛이 뚜렷하게 그려 주었다.

예상대로, 밤의 불청객은 디트리히였다.

시안나는 힘이 턱 빠졌다. 그의 무죄를 벗겨 주려 했건만 진짜 범인이 디트리히였다니.

그는 날렵하게 시안나에게 접근한 뒤 그녀를 침대에 밀어뜨렸다. 그가 시안나의 양손을 머리 위로 결박시켰다.

“누님께선 어째서 알레그라우의 방에 계신 겁니까?”

그렇다. 여긴 그녀의 방이 아닌, 알레그라우의 방이었다.

알레그라우 샤므일은 왕국에서 서기관으로 일하는 자였다. 또 소설 속, 즉 예언서에서 시안나에게 디트리히를 죽일 약을 전달해 주는 역할이기도 했다.

시안나는 다음에 죽게 되는 타깃이 알레그라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알레그라우에게 양해를 구해 그의 침대에서 디트리히를 기다렸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히기 위해.

“설마 샤므일 후작과 연인 사이인 건.”

“아니야.”

시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 브라움이 죽은 이유는 단순히 호숫가에서 우릴 습격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어.”

브라움은 그녀를 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디트리히가 범인이라도 그를 죽인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닐 크라운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극도로 날 두려워했어. 근데 디트리히가 범인이면 이해가 가더라고. 일면식은 없는데 범인과 한집에 사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어.”

또 소설을 엮어 보니 그는 디트리히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브라움과 마찬가지로 그도 디트리히와의 접점이 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닐 크라운 후작이 죽기 전날, 네 방문을 두드리는 에르마야를 발견했어. 그런데 네 방문이 잠겨 있더라고. 그땐 단순히 에르마야 양을 거절한 거로 생각했지만…….”

이미 디트리히는 닐 크라운을 살해하고 있을 터였다.

디트리히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제 얼굴을 감쌌다. 가면을 뜯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안나는 그가 입을 떼길 잠자코 기다렸다.

“누님께서 제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은…….”

손바닥 사이로 시안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금안이 섬뜩해졌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셨다는 말입니까?”

과거의 기억?

뜬금없는 말에 말문이 막힌 건 시안나였다.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고 물으면, 어째서 내가 물었을 때 예언서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냐고 물으려고 했어. 예언서의 내용을 알고 사람들을 살해한 거니까. 그런데 과거의 기억이라니?”

그는 시안나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라는 것에 실수했다는 걸 깨닫곤 곧장 낭패감 섞인 얼굴로 변했다.

“모르신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손목을 뿌리치고 걸친 재킷 안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예언서였다.

“디트리히. 어째서 사람들을 죽인 거야? 게다가 과거라고? 예언서를 읽은 게 아니야?”

시안나의 손에 들린 책을 본 디트리히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게 왜 그녀의 손에 있냐는 눈빛이었다.

그는 적잖아 당황했는지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책을 예언서라고 부르는군요. 그 책은 예언이 아니라…… 아니,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걸 포기한 듯 성대한 한숨 후에 말을 이었다.

“네. 그 책대로 누님께 접근하는 사람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누님께서 왕을 만나지 않을 테니까요.”

겨우 그런 이유라니.

하지만 디트리히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카릴은 디트리히의 생일에 쓸 독극물을 시안나에게 준 장본인이었다.

디트리히는 예언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 거로 보였다. 자신과 카릴이 접촉하면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럼에도 책망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왜 내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거니?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도 있었어.”

자꾸만 비밀을 숨기는 그에게 원망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혼란스러운 와중 디트리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왕께선 죽기 전까지 절 노릴 테니까요. 게다가 누님께서도 제게 숨기시지 않았습니까?”

“뭐?”

“오늘 밤 저를 찾지 않으신 것……. 또 드뷘모르가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하신 것 말입니다.”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의 낙원에 있기보다 진실을 택했다.

두 사람은 그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상 위에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것뿐이었다.

시안나는 슬픈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아슈토르 저택을 떠나는 건 서운할 수 있겠지만 사람이 죽어 나가는 살인 사건이 먼저였다.

“이게 더 급한 일이었으니까.”

디트리히의 얼굴은 금이 간 것처럼 어그러졌다. 그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검은색 머리카락 아래로 금안 주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안나는 자신의 몸을 덮은 디트리히를 밀었다. 충격의 여파가 큰지 디트리히는 쉽게 밀렸다.

“난 왕께 가 봐야겠어.”

결국 살인 사건의 범인은 디트리히였다.

카릴이 여유만만하게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의미였을 테지.

그녀는 어떻게든 디트리히의 처벌을 피하게 만들고 싶었다.

“가지 마십시오. 누님!”

그가 절규했다.

“예언서대로 누님을 하찮게 다루는 남자입니다. 누님을 이용하고 버릴 자라는 걸 왜 모르십니까?”

시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어라? 이건…… 문?”

그녀가 방문을 연 문 안에는 또 문이 존재했다.

시안나가 벙찐 얼굴로 문에 초점을 고정했다.

문 안의 문을 쓸어내리자 나무 특유의 거친 감촉이 스몄다. 헛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곳은 알레그라우 후작의 방이었고, 그녀는 이 문으로 알레그라우 후작의 방에 들어왔다.

유일한 통로가 분명했다.

“조금 전 분명히 이 문으로 들어왔는데 어째서 또 문이…….”

혹시 그녀가 모르는 장치를 후작이 해 놓은 건지도 모른다.

시안나는 문안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똑같은 문이 나타났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문안에 또 문이라니. 어째서 복도가 나오지 않는 거지?

시안나는 다시 문안에 문을 열었다. 문이었다. 씩씩거리며 이번엔 문안에 문안에 문안에 문을 열었다. 문이었다.

시안나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숨소리마저 가빠졌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짚었다. 그리고 문안에 문안에 문안에 문안에 문을 열었다.

문이었다.

덜컹.

시안나의 심장이 심연까지 추락했다.

끔찍했다. 어떻게 문안에 문이 있고, 그 문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는 거지?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이제 그녀의 어깨는 말도 안 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제가 헛것이라도 보는가 싶어 흔들리는 눈동자를 디트리히에게 옮겼다.

“디트리히. 이 방 이상해, 문을 여니까 계속 문이…….”

시안나는 헛숨을 삼켰다. 디트리히는 문이 계속 보이는 괴상한 광경을 보았음에도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반응이 그녀를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너구나. 문을 이상하게 변화시킨 게…….”

어둠이 유감스러워하는 디트리히의 얼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누님, 제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순순히 이리 오십시오.”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한기가 그녀를 덮쳤다. 시안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이런 이상한 마법을 사용하다니.

설마 디트리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흑마법사인 걸까?

위협적인 마법에서 그녀를 가두겠다는 악의가 느껴졌다. 가늠할 수 없는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는 찰나, 이상은 또다시 찾아왔다.

“……?”

발로 딛고 있는 땅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동시에 중앙에 자리 잡은 널찍한 침대도, 책이 쌓여 있는 책상도, 한편에 놓인 가죽 소파도, 공간 자체가 열을 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간 그녀마저 형체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시안나가 이를 딱딱 부딪쳤다.

“탈, 탈출해야……!”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녀는 마법이고 뭐고 아무 재능도 없이 10년간 이 판타지 세계에 거주했다. 만약 마법의 재능이 있었다면 진작 발현했을 터였다.

디트리히가 손을 뻗은 채 소리 없이 다가왔다.

“누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님을 해칠 리 없지 않습니까. 조금 교육이 필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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