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카릴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 답도 거기에 들어 있으니 열심히 읽어 보도록.”
빛이 사방에서 흘러넘치는 오전, 복도 한가운데 선 카릴의 은색 머리카락 위로 찬연한 햇살이 쏟아졌다. 제복마저 하얗게 빛나자 남자는 천사의 헌 같았음에도 소름이 끼쳤다.
어렸을 적, 요정 같았다는 감상은 취소.
눈앞에 남자는 속에 뱀 백 마리를 키우는 악마였다.
한시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다. 시안나는 예언서를 드레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뜻대로 이걸 읽어 보겠…….”
그때. 저택 밖에서 이힝, 거리는 말 울음이 들렸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오는 남자를 발견한 카릴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이 형형히 빛났다.
시안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피해야 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릴이 그녀를 제 품에 가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슨!”
시안나가 눈을 치켜뜨며 카릴을 노려보자 그가 둥근 뒤통수를 붙들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깨물지 마.”
“무슨 소리, 읍!”
그녀의 등을 받친 카릴이 머리를 수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생크림이 버무려지는 듯한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시안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지금 카릴과 키스하는 거야?
입술에 닿는 물기 어린 감촉에도 마취를 당한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굳어 있는 시안나에 촉촉한 혀가 입을 벌리라는 듯 툭툭 노크를 했다.
“…….”
카릴의 배알이 뒤틀리게도 입술은 성문처럼 굳게 잠긴 채였다. 카릴이 시안나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읍!”
바늘에 찔린 듯한 따가운 통증에 시안나의 입술이 열리자 두꺼운 혀가 쑥 밀고 들어왔다. 카릴은 바닥을 쓸며 그녀의 혀를 탐색했고, 오돌토돌한 혀를 찾자마자 거칠게 휘감았다.
“흡, 으으!”
두 사람 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시안나는 저를 무섭게 노려보는 눈동자를 마주해야 했다.
‘싫, 싫어.’
새파란 안광은 도무지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혀의 주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치 싸늘했다. 숨이 턱 막혔다. 찔끔 눈물을 흘린 시안나는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그때였다.
휙.
그녀의 허리가 단단한 무언가에게 휘감기더니 카릴과 그녀를 떼어 놓았다.
“으흣, 헉, 헉…….”
속박 같던 키스에 벗어난 시안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무려 왕에게서 그녀를 구출해 냈다. 대체 누가 구해 준 거지?
곧 등을 돌린 그녀의 동공이 덜컥 흔들렸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분한 듯 짓씹는 입술.
디트리히가 카릴에게 송곳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시안나를 숨통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은 그가 입술을 할짝이는 카릴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제 누님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카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눈이 시린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고작 입맞춤 가지고 핏대를 올릴 거면 꼭꼭 숨기고 다녔어야지. 치안대를 나가자마자 그렇게 열렬히 끌어안고 있으면 질투 나잖아.”
치안대에서 나온 후에 디트리히와 포옹했던 일이 별똥별처럼 스쳤다.
그 광경을 카릴이 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입을 맞추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지?
정수리 부근에서 으득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났다.
“복수입니까?”
“경도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야. 그래,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보면, 모든 게 기억났나 보군.”
카릴의 얼굴에 잔혹한 웃음이 맺혔다. 두 남녀를 노려보는 형형한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경 말대로 난 백작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거든. 그녀도 요 근래 내게 귀찮을 정도로 매달려서 즐겁더군.”
“헛소리.”
“방금 전 열렬한 입맞춤을 보지 못한 건가?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낸 것도?”
시안나는 그런 적이 없었고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디트리히에겐 아주 효과적이었다. 잘생긴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게 퍽 만족스러운지 카릴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남자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안나를 응시했다.
“어디 한번 끝까지 지켜 봐. 그 여자는 내게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
디트리히의 얼굴에 고요한 분노가 자리 잡았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앞으로 누님은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테니까요.”
디트리히에 안겨 있던 시안나는 사고가 정지했다.
지금 디트리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이토록 고압적인 말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무어라 항변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에 쑥 들렸다. 시안나를 안아 든 디트리히는 마차로 향했다. 시안나가 다급히 제복 옷깃을 흔들었다.
“디트리히?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저택 밖으로 못 나간다니?”
그녀의 애원에도 디트리히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녀를 마차 시트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다그쳐도 무감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을 뿐이었다.
곧 마차가 움직였다.
카릴은 무거운 얼굴로 마차가 후작가 정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으읏!”
아슈토르가에 도착한 시안나는 디트리히에게 끌려가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디트리히의 방 안에 밀어 넣어진 시안나는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통풍창에서 들어온 밝은 햇살이 침대에 내려앉았지만 무서운 얼굴로 서 있는 디트리히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다.
그렇다고 궁금한 걸 그냥 넘어가긴 싫었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운 시안나가 디트리히를 노려보았다.
“디트리히. 조금 전 왕과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무슨 사이인 거야? 모든 게 기억났냐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카릴이 가진 오랫동안 묵은 찌꺼기처럼 진했던 분노를 디트리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백치였던 디트리히가 카릴에게 큰 잘못을 하진 않았을 텐데도.
디트리히는 한쪽 무릎을 침대에 걸치고 곧바로 시안나를 덮쳤다.
“읏!”
삐걱. 햇빛을 등져 어둠이 드리운 얼굴 아래 항상 빛나던 금색 눈동자가 탁해졌다.
금안이 세차게 빨려 퉁퉁 부은 입술을 노려보더니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누님께서야말로 왕과 무슨 관계입니까?”
디트리히가 커다란 손으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유난히 탐스럽게 빛나는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내게 할 건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는 일뿐이니?”
그녀는 디트리히를 밀어냈다. 물론 기사 훈련을 착실히 받은 디트리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한 나머지 시안나의 어깨가 씩씩 떨렸다.
“너는 항상 그래. 내가 묻고 싶은 말에는 대답도 해 주지 않으면서 자꾸 나에겐 답을 바라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가족 같다며. 소중하다고 했잖아!”
가슴이 두 갈래로 쩍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항상 그녀를 소중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디트리히.
저주가 풀린 디트리히는 자신이 알던 디트리히라 믿었다. 그래서 그의 속내가 의뭉스러울 때도 괜한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궁금증을 꾹꾹 억눌렀다.
그 결과가 이거였나.
시안나는 눈앞에 남자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시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끅끅 울음을 삼켰다.
디트리히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몄다.
그녀를 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얼굴을 가린 작은 손등을 그가 살며시 쓸었다.
“제 생각이 궁금하신 겁니까?”
“그래…….”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경고였다.
시안나는 오히려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동그란 눈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녀는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디트리히의 마음을 손안에 움켜쥐고 싶었다. 카릴과 디트리히의 사이에 있던 이야기도.
디트리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시안나의 발간 뺨에 손을 얹었다.
희미한 빛이 디트리히의 우수에 젖은 눈과 우아한 콧대, 꾹 다물린 입술을 그리며 아름다움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잠자코 있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디트리히?”
시안나가 당황한 사이 그가 잽싸게 입술을 삼켰다. 그저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도 입술은 용암처럼 뜨거웠다.
“읏?!”
시안나의 눈꺼풀이 빠르게 감기다 뜨이길 반복했다. 입술을 뭉개는 감촉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꿈인가? 꿈이 아니고서야 디트리히가 내게 입을 맞출 리가…….
가만히 있는 시안나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듯 디트리히의 혀가 그녀의 아랫입술에서 윗입술을 핥아 올렸다.
축축한 혀의 감촉이 간지러우면서도 배 속이 아릿했다. 그곳에서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것만 같았다.
“으…….”
시안나는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디트리히는 단단히 뒤통수를 잡고 그녀의 얼굴을 고정시켰다. 도망칠 궁리 따위 버리라는 듯이.
“……!”
성난 입술이 시안나를 사탕 빨듯이 집어삼켰다. 목마른 사람처럼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여린 살갗을 연신 들이마셨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내리는 바람에 이마를 살살 간지럽히는 까만 앞머리의 감촉에도 몸을 파드득 떨었다. 어깨에 들어간 힘이 탁 풀어졌다.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툼한 혀가 날렵하게 침입해 왔다.
“흐븝…….”
디트리히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강해지는 찰나, 숨이 막혀 왔다.
시안나가 주먹을 꽉 쥐곤 디트리히의 등을 때렸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지독한 소유욕의 발로였다.
산소가 부족해 시안나의 눈가가 시뻘게진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새빨간 머리칼의 여자가 떠올랐다.
탁!
시안나가 강하게 디트리히를 밀쳤다.
억센 저항에 디트리히는 조금 놀란 얼굴로 떨어졌다. 곧 상처받았는지 입술을 꾹 깨무는 디트리히가 시야에 비쳤다.
시안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안 돼, 우린 이미, 각자 다른 사람이 있잖아.”
디트리히는 에르마야와 결혼했고, 시안나는 비록 가짜라 하더라도 세간에서는 헤이스의 약혼녀였다.
그들은 손을 맞잡는 것도 조심스러운 사이였다.
그가 으르렁거렸다.
“제가 후회하실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제 진심을 원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관계에 쐐기를 박았다.
“전 저주가 풀린 이래, 누님을 단 한 번도 가족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격정 가득한 음성이었다. 시안나가 혼을 빼놓지 않도록 노력하는데도 디트리히는 그녀를 마구 뒤흔들었다.
“헤이스가 생각난다고 하더라도 더는 놓아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