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화
“우승하길 바라는 사람이요?”
아체리아는 모르는 척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게 누군데요?”
“모시는 집안의 아가씨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돌보다시피 한 아가씨인데…… 몸도, 마음도 가녀린 분이라 늘 걱정만 하게 만드는 분이지요. 하지만 심성이 어찌나 천사 같은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할 내가, 후에 차릴 식당이 잘 되지 않을까 봐 아가씨의 걱정이 태산이지요.”
“그래서 당신이 우승하기를 바라는 거군요?”
“그래요. 우승을 하면 상금이 적잖으니…….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당신까지 지체하게 했군요.”
막스의 말에 멍하니 서 있던 아체리아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얼른 재료를 골랐다. 곁눈질로 살펴보니 다른 요리사들 중 세 사람은 생선, 한 사람은 랍스터를 골랐는데 그게 얀 헨릭이었다.
고민하고 있던 아체리아는 재료를 담을 바구니를 가지고 와 작은 게를 우선 담았다. 그리고 빻은 버섯 가루와 말린 앤초비, 샬롯, 감자와 당근과 양배추를 차례로 넣었다.
주방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심사위원들은 요리가 진행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모여선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얀 헨릭이 손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랍스터 다섯 마리를 잡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빠르죠?”
“칼이 움직이는 것도 못 봤어요.”
다른 요리사들도 각자 쇼맨십을 보여 주는 데에 열심이었다. 중후한 인상의 막스마저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튼실한 팔뚝을 드러낸 채 농어의 비늘을 긁어냈다.
반면, 볼거리가 별로 없는 건 아체리아였다. 칼질이 빠르고 정확하긴 하지만, 아체리아는 원래 기교파가 아니었다. 눈을 휘어잡을 만한 큰 동작 같은 것도 없었다.
“클링 양의 요리는 좀 심심하네요.”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 그걸까요?”
“그래도 뭔가 보여 주는 게 좋을 텐데. 보세요, 폐하께서도 다른 요리사들에게 눈길을 주고 계시잖아요.”
귀족들 사이로 소곤거림이 퍼져 나가는 사이, 아체리아는 게와 버섯 가루, 그리고 말린 앤초비를 솥에 넣고 펄펄 끓여 육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필리파가 클라우스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체리아는 스튜를 만들 생각인가 본데, 공작 생각은 어떤가?”
“글쎄요, 저는 요리에는 문외한이라 보고 있어도 뭘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뭘 할 건지 미리 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절대로 말해 주지 않겠다고 버티더군요. 주제가 뭔지도 모르는데 레시피를 어떻게 말해 주겠냐면서요.”
“그래도 몇 가지 생각한 바는 있었을 것 같아서……. 흠, 공작에게 미리 단서를 좀 얻어 보려 했는데 다 틀렸군.”
클라우스는 작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아체리아는 육수 솥을 내버려 둔 채 이번에는 보리를 팔팔 끓이기 시작했다. 물기 없이 마른 낱알이 도톰하게 부풀어 익기 시작하자 가지고 온 각종 채소를 썰어 넣고 찌듯이 익혔다.
“스튜가 아닌 것 같은데?”
“뭘 하려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폐하.”
“다른 요리사들은 대체로 스테이크를 만드는 것 같고…….”
에른스트가 끼어들었다.
“얀 헨릭은 파스타를 삶고 있군요.”
“흠, 파스타에 랍스터를 곁들이는 걸까?”
“그의 요리가 그렇게 재미없지는 않습니다.”
클라우스가 얀 헨릭을 두둔해 주었다.
제한 시간을 표시하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반쯤 떨어졌다. 아체리아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고는 뿌옇게 졸아 든 육수를 한 번 걸러 냈다. 그러고는 허브와 오일, 토마토를 섞어 소스를 만든 뒤 육수와 함께 뭉근하게 끓였다.
본격적으로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든 공간의 열기가 훅 달아올랐다. 막스가 생선을 얹은 팬 위에 와인을 붓자 불길이 높이 치솟았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물러서면서도 환호했다.
아체리아를 비롯한 요리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콧잔등과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보리와 채소를 찌던 팬의 뚜껑이 덜걱거리며 떨리기 시작하자, 아체리아는 끓인 육수를 팬에 부었다. 바질 향이 섞인 해물과 토마토소스의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리소토인가?”
에른스트가 혼잣말을 했다. 그러는 동안 아체리아의 팬에서도 불길이 한 번 치솟았다. 와인 향을 입히고 물기를 바짝 말린 보리와 채소들이 붉고 먹음직스러운 색깔로 익어 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좀 어려운데…… 이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구.’
아체리아는 물기를 적게 하여 볶아 내다시피 한 보리와 채소를 큰 스푼으로 푹 떠서 깨끗한 접시 위에 빠르게 얹고 둥글게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어 잘 뭉쳐지지 않는 부분은 손으로 빠르게 두드려 모양을 잡았다.
“어머, 뜨거울 텐데!”
누군가 걱정스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체리아는 일부러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좀 더 리듬감 있는 움직임으로 동글동글한 리소토를 여러 개 만들었다. 그리고 리소토가 식는 동안 깊숙한 팬에 기름을 콸콸 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새 아체리아 쪽으로 모여 있었다. 그럴싸한 쇼맨십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흥미가 생긴 것이다. 기름이 끓는 동안, 아체리아는 물기가 적고 단단한 빵을 강판에 갈아 가루를 냈다.
아체리아는 달걀을 푼 물에 리소토를 살짝 담갔다가 빵가루를 묻힌 뒤 그대로 끓는 기름 안에 집어넣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그란 리소토가 튀겨지기 시작하자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래시계를 지키고 서 있던 시종의 말에 사람들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얀 헨릭은 쪄 내어 깨끗하게 갈라 낸 랍스터의 껍질 안에 파스타를 담고, 빼낸 살로 주변을 장식한 뒤 버터를 얹어 오븐에서 한 번 구워 낸 요리를 만들었다.
“막스, 힘내!”
앞쪽에서 대회를 지켜보고 있던 넬레스가 가냘픈 두 손을 모은 채 조그맣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막스는 큼지막한 농어를 빗기듯 썬 다음, 끓는 기름으로 단번에 익힌 뒤 허브와 과일 소스로 장식했다. 열 때문에 농어의 살이 희게 익고 오그라들면서 마치 웅크린 소라 같은 독특한 모양이 되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떨어진 순간, 아체리아의 요리는 막 오븐 안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동그랗게 빚어 튀긴 리소토 위에 치즈가 먹음직스럽게 녹아내려 있었다.
종소리가 다시 한번 울린 뒤, 모든 요리사들이 조리 도구에서 손을 떼었다. 흥분과 긴장으로 어깨와 가슴팍이 동시에 오르내렸다.
시종들은 완성된 요리를 심사위원들 앞으로 가지고 갔다. 그들이 음식을 맛보는 동안, 주방의 집기들은 빠른 속도로 치워지기 시작했다. 아체리아와 다른 요리사들도 모자와 앞치마를 벗고 매무새를 정돈했다.
아체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얀 헨릭과 막스의 요리를 맛볼 때, 필리파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클라우스마저도 막스의 농어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요리사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며 심사위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두 입씩 맛보는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백 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얼굴을 가린 채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심사위원들이 요리사들을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훌륭한 요리들이었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른스트였다. 그는 다섯 명의 요리사를 골고루 칭찬하고는 얀 헨릭을 바라보았다.
“랍스터와 파스타의 조합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지만, 자네의 요리 맛은 무척이나 신선했네. 살을 깨끗하게 발라내고 그 안을 파스타로 채운 것도 재미있는 모양이었지.”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우리 집 요리장에게도 이 요리를 해 보라 말하면 좋겠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체리아도 얀 헨릭을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음 차례는 클라우스였다. 그는 아체리아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의외로 막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농어로는 단순한 소테를 만드는 줄로만 알았는데 희한한 모양을 만들었더군.”
“보시는 재미를 좀 더 더해 보고자 했습니다, 공작님.”
“그래. 모양이 아주 재미있었어. 생선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나는 자네에게 한 표를 주도록 하겠네.”
막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설마 비스몽트 공작의 표를 받게 되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리하여 필리파의 한 표가 우승자를 결정할 상황이 되었다. 필리파는 다소 난감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맨 먼저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체리아, 네 요리는 언제나와 같이 재미있었다. 스튜를 만들 거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이런 걸 만들어 냈구나.”
“해물 육수로 만든 스튜나 리소토는 너무 흔하지요. 그래서 조리법을 한 번 더 더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해물이 주재료로 눈에 띄지 않는 건 아쉬웠어. 풍부한 감칠맛은 있었지만 말이야.”
필리파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한 입씩 먹어 본 요리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가, 놀랍게도 막스 쪽을 바라보았다.
“던컨 자작가의 수석 요리장인 막시아드 헨커에게 내 표를 주지. 등장한 요리 중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를 선보였으니까.”
필리파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막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넬레스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넬레스는 아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던컨 자작 영애가 그대를 아주 절절히 축하해 주고 있군그래.”
“여…… 영광입니다, 폐하. 제가 우승을 하리라고는 전혀…….”
아체리아는 울고 있는 넬레스를 힐끔 보고는 작게 웃었다. 우승은 아니더라도 기분이 썩 괜찮았기에, 아체리아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 * *
대회가 끝난 후,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아체리아를 마주 보던 클라우스가 빙긋이 웃었다.
“우승 못 해서 아쉽지는 않아?”
“좀 아쉽긴 해요.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는데. 그래도 한 표라도 받은 게 어디예요?”
“사실 너에게 표를 주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편파 판정이라고 욕을 먹을 것 같았거든.”
아체리아는 순간 웃을 뻔한 표정을 지었다가 꾹 참으며 다소 뾰로통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욕먹는 게 무서워서 저를 뽑지 않으셨다는 건가요?”
“그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 난 튀긴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야.”
“클라우스 님 편식 고치려고 제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노력을 다 무색하게 만드시네요.”
클라우스가 시선을 돌리며 픽 웃었다. 그래도 아체리아는 그가 자기 몫의 접시를 다 비운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만한 걸로 만족할 심산이었다.
솔직히 상금은 탐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의 요리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게 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