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화
넬레스 던컨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온 소녀였다.
던컨 자작은 혼자 남은 딸을 매우 사랑했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는 없었다. 수도의 행정을 담당하는 일을 맡은지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이었다.
어린 넬레스를 돌봐 준 사람은 유모와 막스라는 요리사뿐이었다. 막스는 던컨 자작이 젊었을 때부터 자작가에서 일을 한 요리사였는데, 어머니를 잃고 바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넬레스를 무척 가엾게 여겨 주었다.
“막스는 제가 외로움을 타지 않도록 유모만큼이나 신경을 써 주었어요. 휴식 시간에도 쉬지 않고 간식 같은 것을 만들어서 제게 주곤 했죠.”
뿐만 아니라 그는 어린 아가씨를 목말 태워 후원을 거닐며 온갖 식물에 대해 알려 주었고, 함께 과일을 따기도 했다. 넬레스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꾸던 텃밭을 보여 주면서 어머니 이야기도 띄엄띄엄 들려주었고, 어떤 채소들이 자라는지도 보여 주었다.
“막스가 없었더라면 제 어린 시절은 무척 황폐했을 거예요. 아버지께서도 막스에게 매우 고마워하시죠……. 제가 감기에 걸렸을 때도 막스가 감초며 생강을 끓인 꿀물 같은 걸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 요리사라면 더더욱이나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시면 안 되죠, 아가씨.”
“하지만……! 하지만, 막스의 요리는…… 막스는, 요리를 잘하긴 하지만, 뭐라고 할까……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요리는 아니에요. 막스는 원래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인데, 그때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에게서 배웠던 레시피를 그대로 사용하거든요.”
귀족들은 호화로운 요리를 좋아한다. 먹을 때 맛있는 것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만족스럽고, 고급스럽고 독특한 식재료가 들어간 것을 훨씬 더 훌륭한 요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는 막스의 요리가 아주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체리아 양도 알겠지만, 2차 대회는 왕궁의 주방을 사용하게 되잖아요? 재료들도 분명 고급스러운 것들일 테고요. 막스는 멧새구이 같은 건 만들지 않아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저나 아버지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해도 요리사잖아요. 기본적인 것들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아체리아 양이 있는 한 막스는 우승할 수 없을 거예요. 전요, 다른 사람들보다는 막스가 훨씬 더 요리를 잘할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아체리아 양이 있으면…… 막스가 아무리 잘해도 우승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래서 저한테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라고 부탁하러 오신 거예요?”
넬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체리아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아가씨는 모르는 것이다. 아체리아 클링이 없어도, 다른 요리사들 역시 자기 분야에서 훌륭한 성취를 거둔 사람들이다. 자신이 설령 이 부탁을 들어준다 한들 다른 사람들을 제칠 수 있을 거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막스에 대한 넬레스의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체리아 클링만 없으면 막스가 우승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식이 부모를 맹목적으로 믿듯이, 혹은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인을 믿듯이.
논리가 없는 그런 믿음은 설득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아체리아는 넬레스에게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던컨 양, 이 요리 대회에는 저 말고도 뛰어난 요리사들이 있어요. 설령 제가 일부러 실수를 한다고 해도 막스 씨가 반드시 1등을 차지하리라는 보장이 없답니다.”
“그렇지 않아요! 막스는…….”
“넬레스 양이 그 막스 씨라는 요리사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요, 가령 제가 던컨 양의 말을 듣고 막스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했다고 쳐 봐요. 과연 막스 씨가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할까요?”
“막스는…… 막스는 올해 은퇴할 거예요. 은퇴하고 나서는 식당을 차리고 싶다고 했어요. 축일의 요리 대회에서 1등을 한 요리사에게는 왕궁에서 상금을 주잖아요. 그걸로…… 막스가 은퇴한 후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에 가게를 차리게 해 주고 싶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집안에는 지금 그만한 돈이 없거든요…….”
그건 사실이었다. 대회에서 1등을 거머쥔 요리사에게는 어마어마한 상금이 돌아간다. 너도나도 앞다투어 대회에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체리아 양, 부탁할게요. 막스가 1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안 될까요? 아체리아 양은,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굳이 상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공작님과 약혼했잖아요? 곧 결혼을 하면, 공작 부인이 되실 테고…….”
“그건 맞아요. 하지만, 던컨 양의 부탁은 들어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넬레스의 동그란 눈가에 금세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 가련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죄 없는 아이를 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체리아는 영 기분이 찜찜했다.
하지만 막스가 정말 넬레스의 말대로 훌륭한 요리사라면, 그리고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를 아낄 만큼 선량한 요리사라면, 틀림없이 이런 방식으로 우승하는 걸 반기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던컨 양, 던컨 양의 말씀대로라면 막스 씨는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요리사일 거예요. 그리고 자부심 있는 요리사는 절대로 편법을 반기지 않죠.”
“…….”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저 역시도 제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공작님이 저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요. 등짝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요.”
넬레스는 아체리아의 과격한 표현에 놀라 손끝을 흠칫거렸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넬레스의 안색이 흐린 날의 구름처럼 옅게 어두워졌다.
“저도 물론…… 막스가 이 일을 알면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태까지 막스에게 받은 게 많은데, 저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어요. 그래서…….”
“왜 해 준 게 없겠어요? 던컨 양이 이렇게 막스 씨를 좋아하고 있잖아요. 그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막스 씨는 기뻐할 거예요. 하지만, 막스 씨를 좀 더 믿어 주는 게 좋겠어요.”
“……그럴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만약 제가 막스 씨라면, 던컨 양이 저를 응원해 주면서 등이라도 토닥여 주는 걸 바랐을 거예요. 대회에서 맞붙을 사람을 찾아가 일부러 져 달라는 말을 하는 것 말고요.”
한참이나 말이 없던 넬레스는 다행히 아체리아의 말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보내 주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체리아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넬레스의 연약한 옆모습을 잠시 곁눈질로 바라본 뒤 걸음을 옮겼다.
* * *
2차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왕궁의 주방이었다.
각자의 조리대와 보조 요리사가 주어지는 1차 대회와는 달리, 2차 대회는 다섯 사람이 하나의 주방을 같이 사용하게 된다. 물론, 옆에서 도와줄 보조 요리사도 없기에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아졌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사람은 필리파와 에른스트, 그리고 클라우스를 포함하여 총 일곱 명이었다.
아체리아는 일찌감치 왕궁에 도착해 주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요리 대회를 위해 새로이 개방형으로 만든 주방이었다.
꽤 넓은 곳이고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잘 분할되어 있어서 다섯 명이 아니라 예닐곱 명쯤 동시에 요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곳이었다. 조리 도구들은 갓 만든 새것인지 흠 없이 반짝거리고, 선반 역시 재료의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폐하께서 나오십니다.”
의전장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려한 의상 차림의 필리파가 등장했다. 그녀의 뒤로는 에른스트와 클라우스, 그리고 오늘의 심사를 맡은 귀족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따라왔다.
아체리아를 제외한 요리사들은 필리파를 가까이에서 보는 일이 처음이었기에 무척 당황했다. 허둥지둥 절을 하는 요리사들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인 필리파는 손바닥을 마주쳐 가볍게 박수 소리를 내었다.
“축일 기간의 꽃인 요리 대회의 대미를 즐겁게 장식할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바이오. 부디 자신의 역량을 있는 힘껏 발휘하여 나를 포함한 심사위원들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기 바라오.”
아체리아는 덩치 큰 얀 헨릭이나 다른 요리사들이 자그만 체구의 필리파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 우스워 작게 킥,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필리파의 시선이 아체리아를 향했고, 당황한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2차 대회의 주제는 ‘향신료와 해산물’이오. 어떤 요리를 만들든, 향신료와 해산물을 주재료로 삼아 완성하면 된다오. 그럼 여러분의 실력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소.”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구경하러 온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한 각종 핑거푸드와 샴페인이 서빙되고, 요리사들은 사방이 탁 트인 주방에서 각자 요리를 시작했다.
‘향신료와 해산물…… 향신료…….’
입속으로 레시피를 중얼거리며 선반 쪽으로 뛰어가던 아체리아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같은 방향으로 뛰어오던 남자와 부딪힌 것이다.
“아, 미안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얀 헨릭만큼이나 덩치가 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고개를 아주 조금 까딱였다. 풍성한 회색 수염을 짧게 깎은 그는 미간과 눈가, 그리고 입가에 매우 근사하게 주름이 잡힌 장년의 남자였다.
“당신은 아체리아 클링 양이겠군요. 그 붉은 머리칼을 보니 알겠습니다.”
“네, 맞아요. 당신은…….”
“막시아드 헨커라고 합니다. 막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막스? 던컨 자작가의?”
“나를 어떻게 알지요?”
막스는 의아하고 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넬레스에 대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뻔한 아체리아는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소문을 들었어요.”
“소문이 날 만한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실력이 아니면 2차 대회까지 오지도 못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쑥스럽군요.”
막스는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정중한 성격인 듯싶었다. 왜 넬레스가 실례를 무릅쓰면서까지 그를 우승하게 해 주고 싶어 했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물속에 든 해산물을 유심히 살피는 동안, 막스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쟁쟁한 사람들과 경쟁하게 되었지만, 실은 오늘 꼭 우승을 하고 싶군요. 제가 우승하기를 바라 마지않는 사람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