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41)화 (141/144)

외전6화

“다 왔슈.”

역마차의 마부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소냐 킨은 약간은 긴장되고, 또 약간은 설레고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작은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전날 내린 비로 땅이 젖어 있는 줄 모르고 뛰어내리는 바람에 구두코와 치맛자락에 진흙이 좀 묻긴 했지만 괜찮았다. 그녀는 그지없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눈앞에 있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바로…….”

“어떻게 오셨는지?”

성이나 다름없는 저택의 외관에 혼자 감동하던 소냐는 방금 전 역마차의 마부만큼이나 무뚝뚝한 목소리에 그만 현실로 홱 끌려 나온 기분을 느꼈다. 아니, 하지만 다행이었다. 거기서 좀 더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으니까…….

“저, 저는 소냐 킨이라고 해요. 쥘리엔느 요리 학교의 졸업생이죠! 오늘부터 이 댁에서 일을 하게 되어…….”

“아, 그 견습이로군. 들어와요.”

하인은 심드렁한 태도로 문을 열어 주었다.

견습이라는 말에 소냐는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쥘리엔느 요리 학교라고 하면 수도 근처의 지역에서는 그래도 꽤 알아주는 곳일 텐데!

그냥 일자리를 구하러 온 것도 아니고 추천을 받아 온 졸업생인데…….

‘아냐, 이런 큰 귀족저에는 또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가 많겠어? 많이 배워서, 언젠가는 나도 이런 저택의 수석 요리장이 되거나, 아니면 내 가게를 가지거나…….’

행복한 생각에 빠진 소냐는 하인을 따라 뒤뜰 쪽으로 돌았다. 아마도 주방으로 식자재가 드나드는 길인 듯해 소냐는 주변의 풍경을 잘 외워 두기로 했다.

잘 가꾸어진 텃밭이 우선 눈에 띄었다. 제법 여러 가지 채소를 키우는 듯, 밭은 구획이 잘 나누어져 있고 토양의 색깔도 각각 달랐다.

“텃밭은 누가 관리하시는 건가요?”

“정원사와 마님께서 관리하시지.”

“마님이라면…… 고, 공작 부인 말씀이신가요?”

“그래. 이 근방은 다 마님의 손이 닿는 곳이니까 너도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라고. 아무거나 건드려서 망치면 안 돼.”

망치다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망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소냐는 텃밭을 직접 가꾸는 귀부인이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분명 정원사가 하나부터 열까지 해 놓은 일에 대충 씨 뿌리는 흉내나 내는 것일 텐데.

“어?”

줄줄이 이어진 텃밭을 구경하며 회색 벽을 따라 돌아가고 있을 무렵, 울타리 아래에 조그맣게 웅크린 꼬마가 하나 보였다. 소냐의 목소리에 꼬마는 뒤로 넘어갈 듯이 놀라더니 그만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아이고, 도련님!”

소냐를 안내하던 하인이 대경실색을 하며 소년에게로 달려가 그를 안아 들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렇게까지 어리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한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이쪽으로는 나오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거늘!”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소냐와 하인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짐에 따라, 다른 두 사람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 안에는 소스가 묻은 완두콩과 당근 조각들, 그 옆에 널브러진 접시…….

완전범죄가 될 뻔한 범행 현장 그 자체였다.

하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련님, 음식을 함부로 버리지 마시라고 전에도 마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골고루 드셔야만 키가 자라고 건강해지지요.”

“……근데 콩은 진짜 너무 싫단 말이야.”

“당근도 버리셨잖습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님께서 또 이 일을 아시면 아마 당분간 말타기나 수영은 금지하라 말씀하실걸요.”

“어머니께 말하지 마! 으악, 제발 부탁이야! 비밀로 해 주면 안 돼? 한 번만!”

소냐는 그제야 이 깜찍하고 무표정한 남자아이가 이 댁의 ‘도련님’, 즉 공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움찔, 놀랐다. 놀란 다음으로는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꾹 참았다.

이렇게 대단한 가문의 아드님도 먹기 싫은 건 몰래 갖다 버리기도 하는구나. 그런데, 귀족이라면 그냥 하인들에게 버리라고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어머니가 아시면 난 진짜 혼난다니까! 전에 아버님께서 사 주신 장난감도 도로 빼앗길지 몰라! 제발 비밀로 해 주라, 응?”

……아하, 공작 부인이 엄한 모양이로군.

소냐는 쩔쩔매고 있는 하인을 흘끗 바라보더니 어린 소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도련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냐 킨이라고 해요.”

“……난 조프리 비스몽트다. 넌…… 새로 온 하인이야?”

“오늘부터 공작저에서 일하게 된 신입 요리사랍니다. 조프리 도련님, 오늘 일을 비밀로 해 드리는 대신,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셔야 해요.”

조프리의 조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내,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해!”

“그야 당연히 비밀을 주고받는 데에는 대가가 따르니까요. 공작 부인께 비밀을 만드는 건 아주, 아주 큰일입니다. 그걸 모르시지는 않겠죠?”

“내 어머니인데!”

“하면 도련님께서 싹 날 기미도 없는 죄 없는 완두콩과 당근을 땅속으로 돌려보냈다고 공작 부인께 말씀드릴까요?”

소냐가 일어서는 시늉을 하자 조프리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아니! 아니야! 앞으로 안 그럴 테니까 비밀 지켜 줘! 부탁이야!”

소냐는 싱긋 웃으면서 조프리의 눈앞에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꼬마의 조그맣고 통통한 손가락이 고리처럼 걸렸다.

“약속하신 거예요. 앞으로는 이러시지 않기로요.”

조프리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공작저의 주방으로 들어간 소냐는 일단 그 규모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요리 학교에서 보았던 어지간히 큰 주방보다도 훨씬 더 넓은 듯했다.

열 명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을 법한 조리대, 오븐은 크기별로 세 대나 놓여 있고 소스 팬, 넓적한 튀김 팬, 솥 같은 것들은 재료별로, 종류별로 줄줄이 걸려 있거나 쌓여 있었다.

“맙소사!”

그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향신료와 절임 선반이었다. 공작저의 요리사들은 무척이나 부지런한 사람들인 모양이다. 두고두고 먹을 만한 것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쌓아 놓다니!

“세상에…….”

“곧 수석 요리장님과 부주방장님이 오실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하인은 선반을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소냐를 내버려 두고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가 버리고 말았다. 분홍빛으로 색깔을 낸 샬롯 초절임 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수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났다.

소냐는 얼른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소냐 킨입니다! 오늘부터 이곳의 요리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 이것은 요리 학교에서 저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의 추천서입니다.”

“아…… 소냐 킨. 그렇군, 반가워.”

“나는 부주방장인 요아킴이야. 이분은 수석 요리장님이신 프레드 씨.”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소냐는 요아킴과 씩씩하게 악수를 나눈 후, 과장스러울 정도로 활짝 미소를 띤 채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추천서를 읽은 프레드의 표정은 묘했다. 좀처럼 의중을 알기 힘든 사람인 것 같았다.

“추천서는 잘 봤어. 하지만 여기서는 견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달 동안은 직접 칼이나 불을 쓰는 게 허용되지 않아. 서서히 손에 익혀 가면서 연습을 하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요리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실전에 투입될 수 있어. 이해하겠나?”

“네? 어, 저…… 하지만, 저는 이미 요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걸요. 학교에서 졸업할 때 성적도…….”

“그 자격증이라는 게 여기선 소용없다는 이야기다, 소냐.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견습부터 시작해. 그게 싫다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지.”

프레드가 추천장을 내밀며 말했다. 소냐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견습 요리사라니! 요리는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설거지나 뒷정리를 도맡아 하면서 시간 나면 남은 식재료로 칼질 연습이나 하는 그걸 말하는 건가? 설마?

“저…….”

“어떻게 하겠어? 우리는 이제 곧 만찬 준비를 해야 하니까 빨리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소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요아킴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도 프레드의 말에 동의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견습이라니!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야? 요리 경험이 없는 생초보도 아닌데?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도로 학교로 돌아가서 새 추천장을 써 달라고 할 자신은 없었다. 뭣보다도, 소냐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가장 괜찮은 자리에 추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걸 걷어차고 나갔다가는…….

“자,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저쪽에 있는 양파부터 전부 다 까도록 해.”

프레드의 턱짓에 뒤를 돌아본 소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넉넉잡아 팔 하나 정도의 길이는 될 법한 커다란 궤짝이 두 개, 거기에 양파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뭣하고 있어? 얼른 옷 갈아입고 와서 움직여야지! 요아킴, 네가 안내해 줘.”

“알겠습니다, 요리장님.”

요아킴이라는 요리사는 그나마 소냐와 비슷한 연배인 듯해 긴장이 조금 덜 되었다. 얼굴 가득한 주근깨 때문일까, 장난기 넘치는 소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자, 이쪽이 고용인 숙소야. 네가 쓸 방은 여기.”

“두 사람이…… 방 하나를 같이 쓰게 되는 건가요?”

“그래. 루비라는 아이가 이 방을 먼저 쓰고 있었어. 아, 루비도 요리사야. 너와 또래니까 친하게 지내도록 해.”

“그, 그렇군요……! 그 루비라는 분은 지금 어디에……?”

“광장 쪽의 시장에 심부름을 나갔어. 마님의 명령으로.”

공작 부인이?

소냐는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알기로, 보통 귀족들은 요리사들과 일평생 말도 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귀부인들에게는 시중을 들어 주는 시녀가 따로 있으니까, 그리고 심부름을 보내는 것도 하녀들을 시키면 될 일이고…….

“저쪽 침대와 옷장을 쓰면 돼. 짐은 정리해 두고, 옷장 안에 네가 쓸 앞치마와 모자가 있을 거야. 세탁은 스스로 해야 해.”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문을 닫고 나가려던 요아킴이 고개를 돌렸다.

“저, 공작님과 공작 부인은 어떤 분들이신가요? 엄하신지, 아니면…….”

“그게 왜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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