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38)화 (138/144)

외전3화

“저기, 로사. 네 부모님 사정이 그렇게 된 건 유감이야. 하지만 내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걸 다 나한테 덮어씌워 버리면 내가 좀 억울한걸.”

“나도 알아요! 알아서 더 화가 난다고요!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당신의 보조 요리사를 자청한 거였어요!”

“일부러?”

“당신이 요리라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인지 보려고 했던 거였어요. 요리도 제대로 못 하면서 소문만 그렇게 난 거였다면 콱 한 대 때려 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요.”

거, 보기보다 과격한 애네. 아체리아는 턱을 괸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면서 로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켜보니 어땠니?”

“……당신은 훌륭한 요리사예요. 그래서 더 화가 나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로사의 입매에 허탈함인지 뭔지 모를 웃음이 약간 번졌다. 아체리아는 누가 보더라도 실력 있는 요리사였다. 저 예쁘장한 얼굴만으로 공작을 꼬드겨 수석 요리장 자리를 꿰찬 것이리라고 무시할 수도 없을 만큼.

아체리아는 로사의 말을 예상했었는지, 예상하지 못 했는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 몫의 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네 부모님 가게가 손해를 입게 된 건 유감이야. 하지만 나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는 것 같네.”

“알아요, 그렇겠죠.”

“아, 이러면 어떨까? 오늘 내가 요리 대회에서 만든 레몬 무화과 파이 말이야. 그걸 식당의 메인 메뉴로 내놓는 건 어때? 축일 기간에는 사람들도 식당에 많이 들르고, 요리 대회에 나왔던 메뉴들이 특히 잘 팔리잖아.”

아체리아의 말을 들은 로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건 당신의 작품이잖아요. 당신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거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거니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는 거지. 난 식당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그 파이에 내 이름을 내세울 필요도 없잖아.”

로사는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다가, 남은 맥주를 벌컥 마셨다. 1차 대회에 통과한 요리사의 메뉴, 그것도 아체리아 클링이라면 꽤 화제성이 있는 이름값이다. 그녀의 이름을 딴 파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축일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그 파이를 찾는 사람들이 많으면 가게에서 계속 팔아도 좋아. 요즘은 무화과 철이 좀 지나 무화과가 싸잖아.”

로사는 뭐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벌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조그만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은 미안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돕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로사는 적극적으로 아체리아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요리 자체를 망쳐 버릴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고 식재료를 귀하게 아낄 줄 아는 사람은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아체리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네 도움이 컸어, 로사. 나 혼자였더라면 파이를 다 굽지도 못했겠지.”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안함과 뿌듯함의 양가감정이 교차하는 시선이 한차례 엇갈려 지나갔다.

* * *

로사와 헤어진 아체리아는 야시장을 더 구경할지, 아니면 이만 돌아갈지를 고민하면서 근처를 서성거렸다.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구경한 야시장인지라 그다지 큰 감흥은 들지 않았다. 조그만 불꽃놀이며 조잡한 장난감 같은 것들을 파는 노점은 부모님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애들에게 인기이고, 카드를 놓고 사랑 점을 봐 주는 노점은 얼굴을 붉힌 채 손을 꼭 잡은 연인들에게 인기였다.

클라우스와 같이 구경을 나왔다면 재미 삼아 그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 보았겠지만,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열이 좀 오르는 바람에 같이 오지 못했다.

비슷비슷한 노점들 사이를 걸어 다니던 아체리아는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아체리아 클링 양?”

어디선가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아체리아는 작은 도자기 인형을 파는 노점 옆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저를 부르셨나요, 아가씨?”

“……아체리아 클링 양이 확실하지요?”

그녀는 열다섯 살쯤 되었을 법한 소녀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귀족 같은데, 얼굴을 얇은 레이스 베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덩치가 꽤 좋은 남자 한 명이 위협적인 사냥개처럼 서 있었다.

“제가 아체리아 클링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잠시만이면 돼요.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 날 믿고 잠깐만 따라와 주길 바라요.”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과 얘기를 해야겠다는 사람이 벌써 두 명째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로만.

그냥 도망쳐 버릴까? 소녀의 옆에 선 남자를 힐끔 본 아체리아가 발끝에 힘을 준 순간이었다.

“도망치지 말아요. 도망치면 내일 비스몽트 공작저로 제가 당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아차.

자신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 당연히 사는 곳도 알겠지…….

“저는 아가씨를 전혀 모르는데, 저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여기서 말할 수는 없어요. 좀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괜찮다면 잠깐만 나와 동행해 줘요. 그럼 모든 걸 설명할게요.”

소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옆에 서 있던 남자―아마도 호위 기사로 보이는―가 아체리아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의미였지만, 아체리아는 그 손을 뿌리친 채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에스코트는 필요 없어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까.”

베일 너머로 소녀가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소녀가 아체리아를 데리고 간 곳은 마차 안이었다. 하긴, 이 가냘픈 소녀가 맥주 따위를 파는 노점에 앉아 이야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으슥한 골목이 어울릴 만한 차림새도 아니고…….

소녀는 마차의 문이 닫히자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예상한 대로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체리아보다 어린 것은 물론이고, 로사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미안해요. 놀랐지요.”

그러나 어려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소녀의 말투는 무척이나 조숙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몸에 다 큰 어른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좀 놀랐지만,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누구시고,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뭔가요?”

“내 이름은 넬레스 던컨이에요. 던컨 자작이 제 아버지시죠.”

“죄송하지만, 저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소녀가 살풋 웃었다.

“그럴 거예요. 비스몽트 공작님과 특별히 교류하는 집안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우리 아버지는 오늘 일과 상관없어요. 아체리아 양을 만나고 싶은 건 순전히 내 뜻이었으니까요.”

말이 조금 길어지자 넬레스가 조그맣게 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몸이 약한 모양이었다. 핏기 없어 보이는 뺨이며, 허약해 보이는 입술 색 같은 것들이 어둠에 파묻혀 더욱 작아 보였다.

“실은 아체리아 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답니다.”

“무엇인가요?”

넬레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다물었다가 아체리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일 모레 있을 2차 대회에서 우승하지 말아 줘요.”

아체리아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넬레스가 말을 이었다.

“아체리아 양의 실력이라면 2차 대회에서도 틀림없이 우승을 할 수 있겠죠.”

“아뇨, 그건 모르는 일이죠. 다섯 명이 출전하는 대회예요. 어떻게 제가 우승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가장 중요한 심사위원 분들이 아체리아 양의 음식에 익숙하시잖아요. 아니라고는 말씀하지 못하실 텐데요.”

넬레스의 확신에 찬 말투에 아체리아는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2차 대회의 심사위원은 에른스트와 클라우스, 필리파, 그리고 서너 명의 다른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차 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이 각자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쪽지에 적어 내는 식이었지만, 2차 대회는 거기에 더해 심사위원들끼리 따로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이 추가되어 있었다.

아무리 공정한 평가를 한다고 해도, 넬레스가 말한 대로 ‘가장 중요한 심사위원’, 즉 지위가 가장 높은 필리파와 에른스트,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우승자로 밀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따르게 되어 있었다.

물론 아체리아는 필리파를 비롯한 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넬레스의 의견은 달랐다.

“아체리아 양이 훌륭한 요리사라는 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 까다로우신 비스몽트 공작님의 마음에 드셨다는 것만으로도 알 만한 일이죠. 그러니 아체리아 양이 치명적인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승은 아체리아 양의 것이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잠깐만요, 던컨 양. 그건 정말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저에게 부탁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우승하지 말아 달라는 건, 저에게 기권을 하라는 건가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죠. 아니면…… 절대로 우승을 할 수 없을 방법도 아체리아 양은 잘 알고 있을 거잖아요? 가령 소금과 설탕을 헷갈린다든지.”

“저더러 일부러 실수를 하라고요? 그것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기가 막힐 일이다. 아체리아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려 하자, 넬레스가 황급히 아체리아의 옷자락을 잡았다.

“기다려요! 잠깐만…… 잠깐만 더 내 이야기를 들어 줘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예요.”

“저한테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이에요. 잠깐만 얘길 들어 줘요. 난…… 내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궁금하지는 않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대회에 출전하는 요리사도 아니고, 귀족 아가씨가 굳이 자신을 불러다 이런 부탁을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던컨 양, 혹시…….”

“…….”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큰돈을 거셨어요? 그래서 그걸 잃으면 큰일 나게 생겼다든가, 뭐 그런 건가요?”

“네? 무슨 그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대체 왜 이런 부탁을 하시는 거예요?”

넬레스는 대답하지 않고 아체리아의 옷자락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말해 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아체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차의 문을 닫고 도로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사실은, 우리 집의 요리장이 이 대회에 출전했기 때문이에요.”

넬레스의 말에 아체리아의 미간이 약간 좁혀졌다.

“막스라는 사람이에요. 혹시 아체리아 양도 알고 있나요?”

“아뇨,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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