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화
요리 대회가 열리는 광장은 넓은 곳이었지만, 온갖 곳에서 몰려든 구경꾼들로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요리사들 나름대로의 우승 전략 중 하나였다. 화려한 칼질을 선보이는 사람, 반죽을 높이 던졌다 받는 묘기를 선보이는 사람, 밀가루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흩날리는 사람…….
참석한 요리사의 수가 많다 보니 퍼포먼스도 제각각이다. 아체리아는 특별히 눈에 띌 만한 쇼를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단연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공작님의 약혼녀라면서요?”
“약혼을 하고서도 계속 요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던데. 참 특이한 아가씨야.”
“비스몽트 공작이 죽다 살아난 게 저 아가씨 요리 덕분이라던데, 진짜일까?”
아체리아는 그 모든 수군거림에 대해 아예 귀를 닫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들을 듣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로사는 아체리아와 협업을 하려 들지 않았다. 시키는 일은 하되, 시키지 않은 일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해야 옳았다. 분명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텐데도 아체리아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려는 것 같았다.
“로사, 무화과 다듬는 건 다 되었어?”
“네, 다 됐어요.”
“그럼 레몬을 좀 씻어 줘.”
그러나 아체리아는 로사에게 화를 내거나 독촉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무뚝뚝하게 ‘죄송합니다’라는 소리나 돌아올 게 뻔해서였다.
아무래도 날 싫어하나 봐. 아체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면인 사람이 날 이렇게 싫어하는 건 또 처음이네.’
거대한 파이를 굽는 것은 속 재료보다도 반죽 만드는 게 일이다. 열 명 정도가 먹을 만한 파이는 구워 보았지만 마흔 명이 먹을 수 있는 파이는 아직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괜히 두껍게 구웠다가 다 익지 않으면 낭패야. 오히려 좀 얇은 게 좋을지도…….’
고민하던 아체리아는 설탕 한 포대와 밀가루, 그리고 달걀을 가지고 왔다. 유지油脂도 있어야 했다. 커다란 볼 안에 재료를 섞는 아체리아를 멀뚱히 보고만 있던 로사가 말했다.
“반죽을 사블레로 만드실 생각인가요?”
“그래, 맞아. 왜?”
“아뇨, 굳이…… 왜 그러시나 싶어서요.”
“무화과나 레몬 파이는 오랫동안 굽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니까 반죽을 사블레로 해도 잘 익을 거야. 속 재료가 다 익었나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반죽은 이쪽이 낫겠지.”
로사는 대답이 없었다. 반죽을 만들다 말고 로사 쪽을 힐끔 쳐다본 아체리아는 그녀가 주먹을 꽉 쥔 채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로사, 무슨 일이야?”
“……당신은 이렇게 재치 있게 요리를 잘하면서, 뭐 때문에 공작과 결혼하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아체리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 손으로는 여전히 반죽 재료를 휘저으면서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왜 화를 내는 거야? 영문을 모르겠네.”
“당신 때문에…….”
로사가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체리아는 그제야 반죽을 휘젓던 막대를 놓고 로사에게로 다가갔다. 마음이 급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그녀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게 순서였다.
“나 때문? 뭐가 나 때문이라는 거야? 난 오늘 당신과 처음 만났는데, 나 때문에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체리아를 바라보는 로사의 눈빛이 약간 달라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복잡한 눈빛이다. 한참이나 아체리아를 바라보고 있던 로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다시 조리대의 재료들로 손을 뻗었다.
“됐어요.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로군요. 당신이 오늘 1차 경연을 통과한다면 그때 이야기하겠어요. 떨어지면 난 당신을 영원히 미워할 거고요.”
“아니, 도대체 왜…….”
“반죽, 빨리 안 하면 시간 안에 못 맞출 거예요.”
로사가 말했다.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아체리아는 별수 없이 다시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을 알리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거의 반쯤 떨어졌다. 빨리 파이를 오븐에 넣지 않으면 시간에 맞추지도 못한 채 탈락하게 된다.
부슬부슬하게 엉긴 사블레 반죽에 달걀을 푼 물을 가볍게 바르고, 그 위에 먼저 레몬을 얹었다. 껍질의 단단한 부분만 빠르게 밀어 벗겨 낸 뒤 반달 모양으로 썬 레몬이다. 얇게 설탕을 뿌려 층을 만들고, 그 위에는 꿀을 절여 으깬 무화과 필링을 얹었다.
과육이 단단하지 않은 무화과는 꿀이 더해지자 한층 달콤한 향기를 뿜었다. 속 재료를 채우는 일이 끝나자 위쪽에도 사블레 반죽을 얹고 오븐에 집어넣었다.
구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체리아는 오븐의 뚜껑을 덮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로사는 조리대에 널린 너저분한 것들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일하는 것을 보아하니, 조금 전까지는 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손을 대지 않고 늑장을 부리고 있었던 것 같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바닥날 무렵, 곳곳에서 완성된 파이의 고소한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오븐에서 거대한 파이가 튀어나올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렸다.
1차 경연의 심사위원들은 총 쉰 명이었다. 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앞에 각각의 파이가 서빙되었다. 남은 것은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돌아갈 것이다. 참가한 요리사들의 수가 많으니, 남은 파이의 양도 제법 되었다.
“그럼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맛있는 파이를 구웠다고 생각하는 요리사의 이름을 적어 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체리아는 다른 요리사들과 마찬가지로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한입 크기로 조금씩 자른 파이를, 사람들은 천천히 맛보았다.
육즙이 듬뿍 배어 나오는 고기 파이에서부터 사과에 설탕을 뿌려 그슬린 애플파이, 라임 파이, 견과류를 넣은 파이…… 온갖 파이들을 맛보는 동안 심사위원들은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귀엣말을 하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구르거나 환호하다시피 감탄사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무화과 레몬 파이는 누가 만든 거죠?”
“새콤하면서도 굉장히 달아요. 좀 더 먹고 싶다.”
“이 계절에 무화과를 사용하긴 어려웠을 텐데, 꿀절임을 만든 모양이네요. 그래도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심사위원들의 가까이에 서 있던 얀 헨릭은 아체리아의 파이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시식과 심사가 끝나자 결과가 곧 발표되었다. 참석한 요리사들 중, 2차 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은 사람은 고작 다섯 명뿐이었다.
다섯 명 안에 아체리아의 이름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들도 그리 의기소침해하지는 않았다.
1차 대회에 출전하여 경연을 치렀다는 것만으로도 이름값에는 보탬이 된다. 식당의 주인들은 이번 대회에 내놓았던 파이를 한동안 추천 메뉴로 올려놓을 것이었다.
“로사.”
광장을 가득 메웠던 조리대와 오븐 등을 정리하며 어수선한 사이, 아체리아는 어디론가 사라지려던 로사의 팔을 턱 붙잡았다.
“깜짝이야!”
“어딜 가, 로사? 이제 나랑 이야기를 할 차례잖아.”
로사는 의외로 인상을 찌푸리거나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며 대들지 않았다. 하는 양을 보아하니, 몰래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정말로 말을 해 줄 의향도 있었긴 한 모양이었다.
요리 대회가 끝나고 난 자리에는 야시장의 천막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렌과 싼 맥주를 파는 노점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들척지근한 양념 냄새와 숯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곳이지만, 로사는 아체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람들은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며 한껏 흥을 올렸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만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앉아 있었다.
“자, 이제 말해 봐. 왜 나를 싫어하는지. 내가 1차 대회를 통과하면 말해 주기로 했잖아.”
로사는 제 몫의 맥주를 빤히 노려보다가 갑작스럽게 벌컥 들이켰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의외로 주당인가 싶어 아체리아의 눈이 둥글게 커진 순간이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 부모님 가게가 망하게 생겼어요.”
마렌을 집으려던 아체리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당신 때문에…….”
로사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이 말을 하다 말고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사람 머리통만 한 잔이 금세 바닥이 나자, 그녀는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아니, 난 네 부모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해. 그런데 나 때문에 가게가 망하게 생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이 공작님과 약혼을 하는 바람에!”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맥주잔이 테이블 위로 내려왔다.
“내가 공작님하고 약혼을 해서 네 부모님 가게가 망했다고? 왜? 내가 공작님과 약혼을 못 한다는 것에 돈이라도 걸었어?”
“농담하지 말아요! 우리 가게에 있는 요리사들이 당신 때문에 헛바람이 들어서 다들 일을 그만두고 말았단 말이에요!”
로사의 말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번화가 귀퉁이에서 식당을 하는 로사의 부모님은 요리사들을 여럿 데리고 있었는데, 모두 고아인 여자아이들이었다.
보육원이나 수도원에 머물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아이들을 데려다 한 명, 두 명 고용하기 시작한 것이 열 명 남짓, 그래도 제법 규모가 큰 식당이었던지라 몇 명은 요리사로, 또 몇 명은 요리사로 일하다 홀에서 접객을 하는 점원으로 일을 하다 보니 그럭저럭 구색은 맞춰질 수 있었다.
그런데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인 아체리아 클링이 요리 하나만 가지고 공작과 약혼을 했다는 소문―다 사실인 건 아니었지만―이 퍼지게 되자, 다들 사직서를 내고 귀족저의 견습 요리사로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자신도 귀족과 약혼할 기회가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면서.
순식간에 일할 사람들을 잃은 로사 부모님의 식당은 결국 영업의 규모를 줄여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사람을 여럿 쓰면서 이리저리 벌여 놓은 거래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 거래를 끊자니 가게의 세를 내기도 벅찬 상황이 되어 결국에는 문을 닫을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로사의 설명이었다.
“……아니, 어…….”
여기까지 들은 아체리아는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로사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탓임을 인정하고 사과하기에도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