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36)화 (136/144)

외전1화

베르데사의 가을에는 수확제를 겸한 축일 기간이 있다.

각 영지별로 그해의 수확과 세금 납부가 끝난 뒤부터 시작되는 수확 축일 기간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은 농사를 짓지 않는 수도에서도 여러 가지 축제가 벌어졌다. 광장에서는 야시장이 서고, 곡마단이 줄을 이었다.

“요리 대회에 나가겠다고?”

클라우스는 세상에서 제일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확신에 찬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까지는 비스몽트 공작가의 수석 요리장 자격으로 얀 헨릭이 나가는 바람에 전 나가지 못했잖아요. 그러니 올해는 제가 나가고 싶어요.”

축일 기간 중, 사람들의 관심사를 대폭 모으는 행사는 단연 요리 대회였다.

광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개인 요리사들뿐만 아니라, 귀족저의 수석 요리장들이 참가해 실력을 겨루는 것이다.

요리 대회의 심사는 1차와 2차로 나누어져 있는데, 1차 심사에서는 일반인 중에서 발탁된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고급 식당의 요리사들은 물론, 귀족저에 소속된 요리사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 심사위원직을 얻고자 하는 경쟁도 치열했다.

“제가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으로 있을 수 있는 것도 이제 잠깐뿐이잖아요. 곧 결혼을 하게 되면 요리장이 아니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꼭 나가야겠어요.”

아체리아는 언젠가 수석 요리장이 되면 이 요리 대회에 참가하게 될 날을 꿈꾸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기대에 찬 눈빛에 밀려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정말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점수를 더 얻어 가지는 못할 거야. 난 공평하게 심사할 거거든.”

왠지 뻐기는 듯한 말투였다. 아체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클라우스 님도 심사를 하세요?”

“1차 심사는 일반인들이 하지만, 2차 심사는 귀족들과 왕이 참석하는 자리잖아. 나도 이번에 심사위원으로 발탁됐거든.”

“맙소사, 누구 생각이에요? 대체 누구 머리에서…… 클라우스 님을 심사위원으로 뽑을 생각이 나온 거죠? 낯선 사람이 만든 요리는 안 드시잖아요!”

“누구 머리에서 나왔겠어?”

아체리아는 그제야 아, 하면서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가렸다.

“폐하께서…….”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필리파가 아니라면 그 누가 공작인 그를 그런 자리에 오라 가라 할 수 있겠는가.

“괜찮으시겠어요?”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빤히 올려다보는 아체리아를 마주 보던 클라우스가 우아한 동작으로 소매를 걷었다. 그러더니 검지 끝으로 아체리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내 걱정할 시간이 있어?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면 얼른 가서 신청서부터 써야지.”

* * *

요리 대회는 축일 기간의 사흘째부터 시작이 되었다.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으로 어렵잖게 출전권을 따낸 아체리아는 아침 일찍부터 요리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곳은 이미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게 다 뭐야!’

참가자 대기실을 향해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던 아체리아는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들려오는 외침 소리를 들었다.

“자, 와서 거세요!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가 바로 얀 헨릭입니다!”

‘응?’

“이쪽에도 거세요!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 공작님과 약혼까지 했다는 아체리아 클링 양! 그녀의 요리 솜씨가 정말 비스몽트 공작님을 사로잡을 만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란츠호프 후작저의 수석 요리장의 생선 다루는 솜씨를 따라갈 사람은 없어요!”

“20년 동안 왕궁 요리사로 일했고, 지금은 예약 손님만 받을 만큼 잘나가는 식당의 주인인 클렌트에게…….”

바야흐로 도박이 한창이었다. 요리 대회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걸고 돈 내기를 하는 것이다.

아체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팻말 앞에 와글와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후다닥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면 요리 대회를 구경할 때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돈 자루를 흔드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다 뭐 하는 일인가 싶었더니만, 이른 아침부터 이런 도박꾼들이 판을 치고 있었을 줄이야!

“요 녀석, 역시나 나왔구나. 네가 올 줄 알았다.”

“얀!”

두 번째로 대기실 천막을 들추고 들어온 사람은 얀 헨릭이었다. 아체리아는 부리나케 달려가 그를 한 번 꽉 안았다 놓았다.

“얀도 나왔네요!”

“그럼 물론이지. 이 몸이 아니면 누가 나온단 말이냐?”

“아, 이러면 내가 우승할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준 사람이 얀이잖아요!”

“그동안 새로운 요리는 하나도 개발하지 않은 거냐? 제자라고 이름 붙였던 걸 떼어 버려야 하겠어.”

아체리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참가자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그들은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는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죠?”

“그렇지. 아무래도 심사위원의 수가 많으니까 말이다. 구경 온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게 상례고.”

“그럼 아무래도 스튜겠죠? 얀, 뭐 아는 거 없어요?”

“이 녀석아, 대회 주제가 뭔지는 극비라는 거 모르냐?”

“그렇긴 하지만…… 얀은 여러 번 이 대회에 나왔잖아요. 뭔가 팁이 없을까 해서요.”

“몇 년에 걸쳐 나왔지만 팁은 없어. 생전 처음 보는 주제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참가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새 밖에서 돈을 거는 사람들이 더 늘었는지, 인파를 헤치고 오느라 다들 해쓱한 얼굴이었다. 얀은 안면 있는 요리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아체리아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아, 공작님과 약혼했다던 그 아가씨!”

귀족저의 요리사들은 대체로 그런 반응이었다. 그들 중에는 도대체 아체리아가 어떻게 비스몽트 공작을 사로잡았는지 노골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체리아는 단지 이렇게 대꾸했다.

‘공작님이 이제 제 음식 말고는 드실 수 없게 했거든요.’

좁은 천막 안이 꽉 찼다. 이제는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앉을 자리가 없겠다 싶은 순간, 근사한 정장을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의 사회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대회를 시작할 테니, 참가자 여러분께서는 각자 자기 위치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요리사들은 하나둘 천막을 빠져나갔다. 첫 번째 요리 대회는 광장에서 열렸는데, 야외인지라 자리가 넓은 것이 장점이었다.

한두 사람이 쓸 법한 조리대가 줄을 지어 놓여 있고, 각 조리대 앞에는 참가한 요리사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조리대 옆에는 백 명이 먹을 케이크도 구울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오븐과, 갖가지 재료가 든 수레, 향신료 선반이 놓여 있었다.

아체리아도 자신의 조리대를 수월하게 찾아갔다. 조리대 옆에는 일을 도와줄 보조 요리사가 한 명 있었는데, 아체리아의 보조 요리사는 그녀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반가워! 아체리아 클링이라고 해요.”

요리를 전업으로 하는 여성은 많지 않았기에 아체리아는 진심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며 악수를 건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로사입니다. 저는 오늘 보조 요리사일 뿐이니 말씀은 편하게 하십시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심지어 아체리아의 악수를 받아 주지도 않았다.

아체리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가, 다시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웃는 얼굴에는 대응할 무기가 없는 법.

“로사, 어디에서 일하고 있어?”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겁니다.”

“그래도 얘기해 주면 좋겠는데…….”

“……케일럽 자작가입니다. 곧 대회가 시작되는데 집중하셔야 하지 않나요?”

엄격한 목소리였다. 아체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사회자의 안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로사라는 요리사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초면인 사람에게서 미움받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오늘의 요리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커다란 천 한 장이 그의 옆으로 펄럭 떨어져 내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글씨로 ‘파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파이?”

“각 참가자들은 적어도 마흔 명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파이를 구워 주시면 되겠습니다. 속에 들어가는 재료는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쓰십시오.”

“마흔 명이라고?”

거대한 오븐은 이걸 위한 준비물이었던 모양이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요리사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일단 재료를 고민했다. 마흔 명이 먹을 수 있는 파이라면, 평범한 파이보다 몇 배로 큰 파이를 구워야 한다.

그럼 속 재료는…….

“어떤 파이를 구우실 것인지 알려 주시면 제가 재료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로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이라…….”

아체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파이나 구울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는 경우도 최대한 배제하는 게 좋고, 무엇보다도 크기가 클 테니 골고루 익을 만한 것이어야만 한다.

“고기보다는 과일이 좋겠어. 이 계절에 쓸 만한 과일…… 사과가 제철이기는 하지.”

실제로 대부분의 요리사들이 애플파이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재료가 들어 있는 수레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과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과, 배, 레몬, 무화과…….

“무화과 파이를 만들어야겠다.”

“무화과라고요?”

로사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물론 수레에 들어 있는 재료이기는 했지만, 무화과는 이미 철이 지났다. 용케 뭉그러지지 않은, 조금 늦되게 자란 무화과가 있을 뿐이다.

“양이 부족할 것 같은데요.”

“무화과로만 속을 채우지 않을 거야. 아래에는 레몬을 깔고, 위쪽은 무화과와 꿀을 섞어서 채우면 양이 맞을 것 같네.”

“속 재료를 두 가지로 하시려는 거군요.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로사가 날 도와준다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로사는 어깨를 툭, 두드리는 아체리아의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도 싫어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손을 떨쳐 내지는 않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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