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클라우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또 마냥 투정을 부릴 수만도 없었다. 아체리아는 제 머리카락을 헤집듯이 만지고는 벌떡 일어나 클라우스의 손을 잡았다.
“저랑 춤 연습 좀 해 주세요.”
“지금? 여기서?”
“그렇게 연습했는데 아직도 스텝을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클라우스 님도 같이 연습을 해 주셨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전부 헬레이나가 해 준 거 아세요?”
“난 춤을 좀 잘 춰서 연습을 안 해도 되거든.”
얄미워 죽겠네. 아체리아는 정강이라도 차 버릴 것 같은 눈으로 클라우스를 빤히 보고 있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빨리요. 내일 제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게 도와주셔야죠.”
클라우스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내렸다 하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왈츠부터 해 볼까.”
음악은 없었지만 클라우스는 우아하게 한쪽 발을 움직이며 아체리아의 스텝을 리드했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콧소리 섞인 흥얼거림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전보다 실력이 늘었는데. 요새 열심히 해서 그런 거야?”
“그럴 거예요. 릴리엇이 눈을 이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다니까요.”
숨죽여 웃던 아체리아의 몸이 한 바퀴 휙, 돌았다. 달큰하면서도 아릿한 향유의 냄새가 훅 끼치며 그녀가 멀어졌다가 다가온다.
품에 안겨 드는 익숙한 무게. 스쳐 지나가듯 마주치는 시선. 가을바람에 단풍잎 휘날리듯, 눈앞을 어지럽게 만드는 붉은 머릿결.
클라우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체리아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아체리아는 잠깐 사이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 *
결혼식 당일.
아체리아는 동이 미처 트기도 전에 헬레이나의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나야만 했다.
“아직 어둡잖아, 헬렌…….”
“곧 해가 뜰 거예요, 아체리아 님. 그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셔야 해요.”
며칠 동안 아체리아가 잘 먹인 보람이 있는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말랐던 헬레이나의 뺨에는 생기가 돌았다. 뿐만 아니라 씩씩해지기까지 했다. 좋은 변화였지만, 이불을 확 걷어 낼 때만큼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어서요, 아체리아 님.”
“으응…… 알겠어. 일어날게, 일어나면 되잖아.”
금방 잠에서 깨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체리아를 떠밀어 욕실로 들어온 헬레이나는 미리 받아 놓았던 따뜻한 온수에 그녀를 집어넣다시피 했다.
“목욕하시면서 이것 좀 확인해 주세요. 호즈만 집사장이 아체리아 님께 마지막으로 확인을 부탁한다 하셨어요.”
“이게 뭔데?”
하품을 하며 종이를 받아 든 아체리아는 빼곡하게 적힌 사람들의 이름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름이잖아?”
“오늘 오시는 분들의 자리 배치예요.”
“자리 배치? 아니, 이걸 왜…….”
이걸 왜 내가 확인해. 그렇게 말하려던 아체리아는 한 번 더 온수를 퍼붓는 헬레이나의 씩씩한 움직임에 그만 어깨를 움츠리고는 종이 위의 이름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늘 결혼식에 초대된 이들은 수도 귀족들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다. 그 이외의 인원까지 합치면 백 명은 족히 넘는 하객들이 화제의 비스몽트 공작과 ‘클링 양’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참석할 예정이었다.
“앞에 앉은 분들을 중심으로 보시면 돼요. 이분들이 수도의 유력 귀족들이거든요.”
등을 문질러 주던 헬레이나가 어깨 너머로 소곤소곤 조언을 해 주었다. 종이 위에 한참이나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체리아가 뭔가를 발견한 듯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여기, 엘릭스 후작과 비먼 남작이 옆에 붙어 있어.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잖아. 남작 쪽에서 후작가의 거래처를 뒤로 빼돌린 일 때문에 말이야…… 이 둘은 떨어트려 놓는 게 좋겠다. 비먼 남작을 윈텀 자작 쪽에 앉히는 게 좋겠네. 둘이 사돈 간이라면서?”
릴리엇이 푸아그라 만들듯 주입해 놓은 사교계 인사들에 대한 정보가 저도 모르는 사이 줄줄 흘러나오자 아체리아는 내심 깜짝 놀랐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준 거였나?’
“그리고 이쪽 테이블도 자리를 좀 바꾸는 게 좋겠어. 왜냐하면…….”
아체리아가 설명하는 동안, 헬레이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도 잠시 앉아서 나른한 기분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헬레이나는 화장수로 정리한 아체리아의 얼굴 위에 뽀얀 진주 가루를 덧발랐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는 먹붓을 대어 좀 더 우아해 보이도록 선을 긋고, 복숭앗빛 연지와 벚꽃잎을 빻은 가루를 섞어 눈가를 화사하게 밝혔다.
눈 아래와 코끝, 예쁘장하게 모양이 잡힌 광대 위에는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가루를 발라 윤이 도드라지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입술연지까지 바른 뒤 부드러운 브러시로 쓸어 피부를 정리했다.
거울을 본 아체리아는 깜짝 놀라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 보았다. 도무지 자신의 얼굴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야.”
브러시를 털어 내고 있던 헬레이나가 작게 웃었다.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을 만들어 놨잖아. 헬렌, 대체 뭘 한 거야? 마법이라도 부렸어?”
“화장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에요, 아체리아 님.”
헬레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아체리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태껏 예시카나 루비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해 본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이 달라 보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진짜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모르지. 브러시를 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열중하고 있는 헬레이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아체리아는 그런 생각을 했다.
화장을 마치고 나자 드레스가 들어왔다. 날짜에 맞추기 위해 손가락이 닳을 정도로 바느질을 해야 했다는 마일론의 너스레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듯, 눈처럼 흰 드레스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늘하늘한 레이스를 몇 겹이나 대어 길게 늘어지게 했고, 아체리아의 키를 훌쩍 넘는 베일은 끄트머리에 다이아몬드를 아낌없이 대어 물결무늬의 수를 놓았다.
무엇보다도 허리 아래에서 풍성하게 부풀려진 치맛단이 압권이었다. 바람이 휙 불어오면 그대로 붕 떠서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옷 같은 데에는 별 감흥이 없는 아체리아마저도 이리저리 만지고 살피며 감탄을 아끼지 못했다.
“요, 요리장님! 큰일 났어요!”
아체리아가 황홀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만져 보고 있을 때,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루비가 새빨개진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헬레이나가 조용히 나무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루비는 그것을 알아차릴 정신도 없었다.
“루비, 무슨 일이야? 큰일이 났다니, 뭐가?”
“그…… 그게요, 오늘 오찬에 필요한 재료를 싣고 오던 수레가 그, 그만 쏟아지는 바람에…….”
아체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그래서?”
“그, 그래서 지금, 재료가…… 재료가 다 엉망이 돼 버렸어요. 주방에서는 다들 난리가 났고요……. 어,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서 요리장님을 찾아왔는데, 저기, 그게…….”
보아하니 당황하다 못해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체리아의 방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아체리아는 얼른 헬레이나 쪽으로 등을 돌려 대면서 말했다.
“헬렌, 옷 좀 벗겨 줄래?”
“네? 아체리아 님, 안 돼요! 지금 주방에 가시려고요?”
“재료가 엉망이 됐다잖아. 내가 내려가서 봐야겠어. 얼른, 얼른 옷 좀 벗겨 줘.”
헬레이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체리아의 드레스를 벗기고 다른 옷을 입혀 주는 수밖에 없었다. 평상시 입던 평범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아체리아는 루비의 손을 끌고 주방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니, 요리장님!”
프레드가 아체리아를 보며 깜짝 놀랐다가,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주방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요리사들은 쏟아진 재료를 보며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요? 이렇게 쳐다만 보다가 결혼식 다 끝나겠어요!”
“요리장님, 그게…….”
“못 쓰게 된 재료는 빼고 쓸 수 있는 것만 모아 와요, 얼른!”
갑작스레 들이닥친 아체리아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요리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손을 씻고, 모자를 쓰고, 앞치마까지 두른 뒤 마치 전장에 선 장군처럼 호령을 했다.
“정신 빼놓고 있다가 시간에 못 맞추는 게 더 문제예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를 빨리빨리 생각해야지요! 자, 얼른요! 시간 없어요, 우리!”
* * *
공작저의 정원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하고, 악단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결혼식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주인공인 아체리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호즈만은 클라우스에게 아체리아가 주방에 있다고 말했다.
“주방에? 무슨 일로?”
“그게, 수레가 엎어져 재료들이 엉망이 되었다고 요리사들이…….”
클라우스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객들은 신부가 등장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벌써 어떻게 된 거냐며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른 가서 데리고 와.”
클라우스의 말에 호즈만이 다급히 저택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미처 문 안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갑자기 저택의 정중앙 현관이 활짝 열렸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문 쪽으로 쏠렸다. 고개를 돌린 클라우스의 표정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빛을 띠었다.
드레스를 휘감아 쥔 아체리아가 식장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풀어 내린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그 뒤로 베일을 든 헬레이나가 허겁지겁 쫓아오는 것도 보였다.
“아체리아 님! 잠시만요! 베일, 베일을 쓰셔야……!”
“아차!”
아체리아가 우뚝 멈추어 서자 하객들 사이에서 이상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웃음을 참느라 내는 소리였다. 아체리아는 헬레이나의 도움을 받아 베일을 쓰고, 부케를 들고, 신부가 밟아야 하는 붉은 융단 위로 뛰듯이 올라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던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숨이 턱까지 찬 기색이 역력한 채 천천히 걷기 시작하다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클라우스를 보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보폭을 넓혀 걸었다.
하객들 사이에서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무렵,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베일을 걷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뛰어다녔는지 양 뺨이 새빨갰다. 머리칼에서는 향유 대신 온갖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하도 안 와서 혼자라도 결혼해야 하나 생각했어.”
“……이렇게 왔잖아요.”
“나보다 주방이 더 좋은 거 아니야?”
“그랬으면 여기까지 뛰어왔겠어요?”
클라우스의 손끝이 아체리아의 뺨을 슬쩍 꼬집었다. 뭐라 항의하려 아체리아의 입술이 달싹거린 순간, 클라우스의 입술이 그 위를 덮어 눌렀다. 아체리아는 눈을 감고 그의 목을 껴안았다.
꽃과 꿀, 소금과 후추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달착지근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