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27)화 (127/144)

127화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예시카의 말마따나, 산더미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나 싶어 몰래 창문을 통해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아체리아는 그 넓은 공작저의 정원을 꽉 채운 하객들의 행렬에 그야말로 기함을 했다.

‘뭔데!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거야?’

사실 그나마도 클라우스가 추리고 추린 인사들이었다는 걸 알면 뒤로 자빠질 판이었지만, 다행히 초대장을 쓰는 일에 아체리아는 관여한 바가 없으므로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슨 약혼식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러다 결혼이라도 하면 저택이 터져 나가겠네.’

시종들은 분주하게 저택의 안과 밖을 오가며 정원에 차려질 약혼식장을 꾸미고 있었다.

날씨가 화창해서 다행이었다. 원래 야외에서 하기로 계획되었던 식인데, 비라도 왔다면 모처럼 준비한 것들이 대부분 쓸모없어지고 말았을 테니까.

하녀들이 아체리아를 데리러 왔다. 마일론의 의상실에서 막 도착한 진줏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아체리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값비싼 드레스를 입은 게 처음도 아니건만, 왠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예시카가 아침나절 내내 빗질을 해 보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이며, 눈을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반짝이는 드레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시폰 소매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마치 팔찌처럼 촘촘히 둘러져 있었다. 아체리아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은 다이아몬드가 마치 별처럼 빛났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체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클라우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거울 앞에 선 아체리아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비가 다 되었나 해서 왔다.”

“다 되었어요. 이제 나가면 되는 건가요?”

“그래.”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두 사람이 함께 정원으로 나가면 그때부터 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약혼의 증인은 에른스트와 페터가 서 주기로 했다. 아체리아의 손을 잡은 클라우스는 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그녀의 옆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잘 어울려, 드레스.”

솔직한 칭찬이라는 것이 느껴져, 아체리아의 귓가가 약간 붉어졌다.

“클라우스 님도 잘 어울리세요, 그 옷.”

오늘 클라우스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청색의 옷을 입었다. 재킷은 은사로 장식했고, 손으로 한 올 한 올 짠 레이스로 만든 크라바트를 매고, 손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정원으로 나서자 찰나의 어리둥절한 침묵 뒤로 박수가 쏟아졌다. 정원을 가득 메운 귀족들은 아체리아의 모습을 보고 저마다 수군거리기 바빴다.

“요리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원래도 아름다운 사람이긴 했어요. 왜, 폐하의 궁에 왔을 때 보신 적 없었나요?”

“그때는 지나가듯이 봤을 뿐이라…….”

“머리칼이 무척 인상적인 아가씨네요. 공작님과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모여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오늘 아체리아를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비스몽트 공작이 고용인과 약혼을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얼굴이나 보자 싶어서.

하지만 아체리아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왠지 공작의 마음을 조금쯤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뽀얀 우유에 여름 햇살의 황금빛을 조금 잘라 섞어 놓은 듯한 색깔의 드레스를 입은 아체리아는, 수선화와 장미가 한데 피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웅성거림은 필리파의 마차가 공작가의 저택에 당도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애초에 그녀가 참석하는 것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당당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필리파를 보고 너무 놀라고 당황해 그만 허리를 숙여야 한다는 예절조차도 잊은 채 입을 딱 벌렸다.

“귀한 걸음을 해 주시어 감읍합니다, 폐하.”

“초대를 받은 내가 고마워해야 맞는 것 아니겠소?”

잠시 몇 마디의 인사를 나눈 후, 필리파가 사람들 쪽을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대공에게서 이야기는 들었겠지요?”

“……들었습니다. 이 중에…….”

“동부 귀족들 쪽에서 확실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보고가 어제 궁으로 들어왔소. 공작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괜찮습니다. 이 또한 폐하의 계획이 아니셨습니까?”

이럴 걸 알고서도 약혼식에 참석한 것 아니냐는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필리파는 대답 대신 싱긋 웃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식 자체는 길게 진행될 만한 것이 없었다. 결혼이었다면 좀 더 복잡한 절차를 거쳤겠지만, 약혼은 아니었다.

증인 두 명이 앞으로 나와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약혼을 선언하는 문서를 읽고,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 주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나면 끝이었다.

정원을 꽉 채워 마련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에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주방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요리사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사이에 낯선 사람이 한두 명쯤 끼어 있다 한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클라우스는 오가는 시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거두지 못했다.

가지를 구워 차갑게 식힌 다음, 산뜻한 계절 채소와 함께 버무린 전채가 먼저 나왔다. 필리파와 클라우스, 아체리아, 에른스트 등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가로로 길었다.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지만, 아체리아는 도리어 이편이 마음에 들었다.

“이 수프, 굉장히 깊은 맛이 나는데…… 뭘로 끓인 거지?”

필리파의 질문에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체리아는 입 안에 든 것을 얼른 삼킨 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해물 육수로 만든 수프입니다, 폐하. 새우와 가재, 게 껍질 등이 들어갔습니다.”

“게 껍질? 그것도 먹을 수 있는 건가?”

“육수를 낼 때 사용하면 좋습니다. 오랫동안 끓이면 특유의 달콤한 맛이 배어 나옵니다.”

필리파는 수프를 한 입 더 떠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이 차례로 나오는 동안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클라우스뿐만이 아니었다. 남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에른스트도, 그리고 아체리아도 오가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며 누가 수상한 짓을 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의 메인 요리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체리아의 빈자리를 대신할 프레드가 주연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말했다. 필리파가 고개를 끄덕이자, 줄지어 서 있던 시종들이 각자의 앞에 접시를 서빙했다.

“이게 뭐지, 아체리아?”

릴리엇이 가장 먼저 물었다. 아체리아는 접시 위에 놓인 요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세 가지 종류의 생선과, 두 가지 종류의 고기를 조금씩 담아 숙성한 소스를 끼얹은 것이에요. 생선은 농어와 도미, 그리고 신선한 가자미를 사용했고 육류는 송아지와 기러기 고기를 썼습니다.”

“소스도 다양하네. 예쁘다. 꼭 신기하게 생긴 퍼즐 같고.”

접시를 둘러 조금씩 뿌려진 소스는 아체리아가 이틀을 꼬박 갈아 넣어 만들었던 것들이었다. 갈색과 녹색, 노란색의 소스와 마치 조그만 탑처럼 재미있는 모양으로 쌓여 있는 요리가 잘 어울렸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때, 아체리아는 무심코 필리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맨 먼저 기러기 고기를 갈색 소스에 찍어 맛보려 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접시에 담긴 것도 다른 사람의 것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

‘아니, 잠깐만.’

아체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차이가 있었다.

“폐하, 드시지 마세요!”

아체리아의 외침에 근처에 앉아 있던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체리아는 드레스를 확 걷어 끌어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필리파의 앞에 있던 접시를 빼앗듯이 가로챘다.

“아체리아?”

“이 접시를 가져온 사람이 누구죠? 찾아야 돼요!”

그 순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누군가 사람이 쓰러졌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외친 클라우스가 황급히 시종들 쪽으로 달려갔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자들이 길을 터 주자, 쓰러진 채 입가로 거품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독을 먹었어요!”

어느새 클라우스의 뒤까지 달려온 아체리아가 소리쳤다.

“요아킴! 주방에 가서 계피 달인 물을 가지고 와! 그리고 감초도!”

아체리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아킴은 두 번 되묻지도 않고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돌아왔다. 그러나 쓰러진 자의 입술은 이미 납빛으로 푸르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늦었어, 이미 삼켰으니 손을 쓸 수가…….”

“아니에요! 아직 가능성은 있어요!”

아체리아는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낯선 시종의 입으로 계피 달인 물을 쏟아부었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젖은 입가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토하게 해야 해요. 요아킴, 계속 이 물을 먹여. 최대한 많이 삼키게 해야 해.”

그렇게 말한 아체리아는 다시 드레스를 걷어붙이며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동글동글한 열매 같은 것들이 한 줌 쥐어져 있었다.

“그게 뭐지?”

“설명할 시간 없어요.”

아체리아는 손 안에서 열매를 마구 으깬 뒤 계피 달인 물, 감초 조각과 함께 쓰러진 시종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을 다물어 삼키게 하자, 움찔거리며 경련하던 몸이 앞으로 확 꺾어지더니 뿌연 토사물이 쏟아졌다.

“윽…….”

모여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아체리아는 황급히 시종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 창백하긴 하지만 검게 변했던 입술에 서서히 색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자를 가둬야 해요. 이자가 폐하의 접시에…….”

주변을 둘러보던 아체리아는 우뚝 선 채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필리파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폐하의 접시에 독을 썼어요. 그래서 자진을 시도한 걸 겁니다.”

* * *

엉망이 된 약혼식이 흐지부지 끝났다.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에른스트, 필리파와 함께 응접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문제의 접시가 놓여 있었다. 필리파가 손을 대려다 뗀 모양 그대로의 접시였다.

“여기에 독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체리아?”

한참이나 이어지던 침묵을 깨트린 것은 에른스트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아체리아에게로 모였다.

아체리아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신 뒤 접시의 테두리를 가리켰다.

“소스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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