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클라우스와 아체리아의 약혼식 당일의 날씨는 무척 화창했다.
아체리아는 새벽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인지 약혼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심해져, 바로 전날인 어제에 절정에 다다랐던 것이다.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병이라도 난 줄 알고 치료사가 필요한 것 아니냐, 차라리 약혼식을 미루는 건 어떠냐는 둥 말도 안 되는 수선을 피웠다.
다행히 아체리아는 아프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아직 다 떠오르지 않은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지라 고용인들도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주방으로 들어간 아체리아는 어제 저녁 식사를 만들고 남은 재료들을 살펴보았다. 밀빵 반 덩어리와 달걀, 약간의 채소들.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이대로 식이 다 끝나길 버티다가는 배고파서 죽어 버릴 거야.”
아체리아는 작은 냄비에 물을 끓이고, 물이 끓는 동안 당근을 잘게 썰어 기름에 볶았다. 물이 올라 싱싱한 오이는 편으로 얇게 썰어 소금을 뿌려 두었다. 감자가 남아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물이 끓자, 아체리아는 달걀 두 개를 조심스럽게 냄비 안에 집어넣은 뒤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준비물은 기름과 달걀, 레몬즙, 후추와 소금 약간씩.
‘겨자를 좀 넣는 게 좋겠지? 아, 매운 것도 좀 다져 넣으면 맛있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저도 모르게 소스 안에 들어갈 재료를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던 아체리아는 달걀이 든 물이 끓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오늘은 그냥 기본적인 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네…….’
재료를 섞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마요네즈는 안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풍미가 달라진다. 아체리아는 조금 매콤한 마요네즈를 더 좋아했지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탄력 있는 버드나무로 만든 거품기로 섞은 재료들을 재빨리 휘젓자 크림처럼 뽀얀 마요네즈가 완성되었다.
“좋아,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샌드위치 속을 만드는 것뿐이다. 삶아 놓은 달걀을 으깨고, 잘게 썰어 가볍게 볶은 채소와 물기를 짠 오이, 그리고 마요네즈를 한데 뒤섞으면 완성이었다.
도톰하게 속을 채운 달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가장 먼저 주방에 내려온 요아킴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요…… 요리장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아…… 요아킴, 일어났어? 어제 저녁을 제대로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 그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주방에 내려와 계시는 거예요? 오늘은 요리장님의 약혼식 날이라고요!”
“약혼식 날이라고 해서 주방에 내려오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너도 샌드위치 하나 먹을래? 좀 많이 만들었거든.”
요아킴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아체리아가 만든 샌드위치를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조리대에 기대어 서서 갓 만든 달걀 샌드위치를 먹었다.
고소하고 담백한 달걀과 마요네즈에, 오독오독 씹히는 채소의 식감, 그리고 딱 적당할 만큼 간이 된 짭짤한 오이의 맛이 어우러지며 뱃속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요리장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소스, 어제 열어 봤더니 숙성이 다 됐더라고요. 얼마나 맛있는지 부주방장님이 소스 병을 끌어안고 사랑에 빠질 기세였다니까요.”
“그래? 숙성시켜야 하는 소스는 간만에 만들어 봐서 좀 자신이 없었는데. 너도 먹어 봤어?”
“아뇨. 부주방장님이 손도 못 대게 하셨어요. 괜찮아요. 오늘 맛볼 거니까.”
그렇게 말한 요아킴은 히히, 웃으면서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집어넣은 뒤 아체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자, 이제 나가 계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중요한 날인데, 계속 주방에 계시다가 깜빡하고 앞치마를 입고 나가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 * *
몰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온 사이, 아체리아의 시중을 들기 위한 하녀들은 이미 방에 도착해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이름을 부르던 사이였던 그들에게서 하루아침에 아가씨 대접을 받게 되는 게 편할 리는 없건만, 아체리아는 그런 불평을 할 여유도 없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욕조에 집어넣어져 목욕부터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렌지 껍질과 장미, 말린 허브를 넣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아체리아는 왠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하녀를 발견하고 눈가를 짓궂게 찌푸렸다.
일전에, 에른스트의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클라우스와 함께 그의 집에 가던 날 아체리아의 시중을 대충 들었던 바로 그 하녀였다. 이러다 공작 부인 되는 거 아니냐고 빈정거렸던 아이.
“내 팔 좀 문질러 줄래?”
하녀는 움찔 놀라서 아체리아를 쳐다보았다가, 다른 하녀들과 눈을 마주쳤다가, 어쩔 수 없었는지 부드러운 브러시를 들고 욕조 곁으로 다가왔다.
아체리아는 느긋한 태도로 팔을 내민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녀는 여전히 아체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왜 그렇게 날 피해?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네? 아, 저…… 저어, 네. 아가씨…….”
얼굴이 새파래진 하녀는 하마터면 브러시를 떨어트릴 뻔했다. 아체리아는 개구쟁이처럼 낄낄 웃으면서 그녀의 손에서 브러시를 받아 들었다.
“됐어. 장난 좀 친 거야. 전에 네가 나한테 못되게 군 적 있으니까 이번 일로 빚 갚은 거다?”
“저, 저기, 그……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주제를 모르고…….”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니? 주제를 모르긴 뭘. 됐으니까 나가도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여태 혼자 했는걸.”
하녀들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욕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아체리아는 브러시로 어깨를 살살 문지르다가 작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예시카?”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체리아는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예시카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뭐 하세요?”
“뭐 하긴! 네 몸단장을 도와주러 왔지. 이 녀석들은 장차 마님이 될 분을 혼자 목욕하게 하고, 대체 뭘 한 거냐!”
예시카의 호령에 옆에 서 있던 하녀들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아체리아는 그러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나가라고 했어요. 아직 목욕 시중 같은 건 불편하단 말이에요. 앞으로도 목욕은 그냥 혼자 할래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혼자 목욕하는 귀부인이 어디 있다고.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집사장님이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쪽으로 오시지요.”
호즈만에 이어 예시카까지 자신에게 공대를 하기 시작하자 아체리아는 아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뭘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라도 이 생활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아체리아는 심호흡을 하면서 예시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빗질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긴 탓에, 평소 머리를 감고 나면 늘 대강 말리기만 하던 아체리아는 이토록 지난하고 긴 빗질을 경험하는 게 평생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빗기던 예시카가 안 봐도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제대로 빗질하지 않은 거지요? 어렸을 때부터, 꼼꼼하게 빗질을 하고 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저기, 예시카. 제발 그 존댓말 좀 안 하면 안 될까요?”
“그야 절대로 안 되지요! 장차 공작가 마님이 되실 분인데 누가 감히 함부로 하대를 하나요.”
“나, 나랑 있을 때는 괜찮잖아요. 그러니까…… 으, 이것 봐. 소름 돋았단 말이에요. 제발 말 좀 편하게 해요.”
잠시 빗질이 멈추었다. 거울 너머로 아체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예시카가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아체리아, 고작 이런 것을 어색해하면 앞으로는 어쩌겠니. 고용인들에게서는 존대를 듣는 게 당연한 몸이 돼야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예시카에게서는 좀…… 호즈만 집사장님도 그렇고요. 그냥 아체리아라고 불러 주는 게 더 좋은데.”
“이제 네 이름은 네 것이되, 네 것이 아니기도 한 거다. 세상에 어떤 간 큰 인간이 공작 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어? 네 생각에도 그렇지 않으냐?”
“그건 그렇지만…….”
예시카는 투박하고 털털한 성미에 비해 빗질이 매우 꼼꼼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살아 있었을 때도 그녀가 하나부터 열까지 치장을 도왔다.
아체리아는 멋대로 곱슬거리던 머리카락이 천천히 아름다운 모양으로 굽이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다.
“정말 걱정만 앞서는구나. 공작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냐마는…… 오늘도 봐라, 귀족들이 산더미처럼 찾아올 텐데 네가 고용인에게서 존댓말 하나 듣는 걸로 어색해하고 있으니.”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휴, 내가 이것을 어떻게 키웠는데…….”
아체리아는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렸다. 그 바람에 예시카가 놓친 빗이 떨어졌지만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예시카! 맙소사! 왜 울어요?”
“이것아, 그걸 말이라고 해! 서운하니 울지!”
“아, 아니…… 내가 어디 멀리로 결혼하러 떠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매일매일 얼굴을 볼 텐데…….”
“얼굴만 볼 수 있으면 지금까지와 똑같으냐?”
뜻밖의 상황에 놀랐으면서도, 아체리아는 얼른 제 손수건을 꺼내어 예시카에게 들려 주었다. 그녀가 무엇을 서운해하는지 알지만, 그것을 해소해 줄 수는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예시카,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제가 이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주방이에요. 요리도 계속할 거고, 짬이 나면 예시카가 만든 간식을 먹으면서 수다도 떨 거라고요.”
예시카는 눈물을 닦은 손수건에 코를 풀고는 그것을 자기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빨아서 돌려줄 작정인 것 같아서 아체리아는 가만히 있었다.
겨우 조금 진정한 예시카가 빨개진 코를 문지르며 다시 빗을 주워 들었다.
“그래. 공작님의 약혼녀가 되든 공작 부인이 되든, 네가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지.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와, 진짜 깜짝 놀랐네.”
“나만 울 성싶으냐? 얀 헨릭이 오면 아마 널 붙잡고 대성통곡을 할 거다. 그건 각오해 둬.”
“아니…… 그냥 약혼식일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아무래도 진짜 결혼을 하게 되면 눈물바람일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 같다.
아체리아는 그 사실에 약간 까마득함을 느끼는 한편,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게 벅찼다. 진짜 부모는 아닐지라도, 그들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