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체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저마다 눈썹을 찡그렸다.
“소스라고?”
“어떤 소스?”
“이거요.”
아체리아는 접시 귀퉁이에 발린 초록색 소스를 가리켰다. 시간이 지나 표면이 말라 가고 있기는 했지만, 싱그러운 색깔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 소스가 왜? 다른 사람들의 접시에도 똑같은 소스가 발려 있지 않았느냐.”
“아뇨, 폐하. 비슷해 보이지만 똑같은 소스가 아닙니다. 원래의 소스는…….”
몸을 돌린 아체리아가 조그만 유리병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제가 만든 소스입니다.”
손가락 한 개만 한 크기의 작은 병 안에는 접시 위의 것과 거의 흡사해 보이는 소스가 담겨 있었다.
“바질을 비롯한 여러 가지 허브, 그리고 레몬을 넣고 끓인 뒤 숙성시킨 소스입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잘 보세요.”
아체리아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는 접시 위에 소스를 부었다. 세 사람은 얼핏 똑같은 두 가지의 초록색 소스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색깔이…….”
“약간이지만, 조금 다르지요?”
나란히 놓인 두 가지의 소스는 매우 비슷한 색깔이었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아체리아가 만들었다는 소스는 깊어진 여름, 햇빛과 습기를 듬뿍 받은 식물들처럼 다소 짙은 녹색이었으나 필리파의 접시 위에 있는 소스는 달랐다.
원래의 소스 위에, 위험할 정도로 산뜻해 보이는 초록색의 소스가 더해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아체리아가 원래의 소스를 옆에 뿌려 놓고 나니 점차 둘 사이의 차이를 확실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알아챘어?”
에른스트가 진심으로 감탄스럽다는 듯이 묻자 아체리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야…… 제가 이번 요리에 쓸 소스를 혼자서 다 만들었으니까요. 이틀, 사흘 내내 소스만 보고 있었으니까 더 눈에 띈 게 아닐까요?”
“네 눈썰미 덕분에 내가 이번 일을 피해 갈 수 있었구나.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체리아.”
필리파가 고개를 숙이자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도 놀랐다. 얼결에 왕의 인사를 받은 아체리아의 얼굴은 더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인데요.”
“문제의 시종은 공작저의 사람이 아니지?”
에른스트의 질문에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더군. 요 근래 새로 사람을 몇 명 들였는데 그때 섞여 들어왔는지, 아니면 혼잡했던 틈을 타 잠입했는지는…… 깨어나면 알게 될 겁니다.”
음독을 시도한 그는 결국 죽지 못했다. 아체리아가 기지를 발휘해 해독에 필요한 것들을 쏟아붓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배운 건 어릴 때의 일이었다.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온갖 것을 먹곤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독초를 먹는 일이 잦았다.
어른들은 독초와 독초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법뿐만 아니라, 독을 먹었을 때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꼼꼼히 가르쳐야만 했다.
“그자는 왕궁으로 압송해 갈 것이오. 심문을 시작하면 자백을 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겠지.”
“이런 일이 생겨 송구할 따름입니다.”
“공작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넘어갈 자들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나 역시, 이런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소. 좀 더 직접적으로 부딪혀 올 거라 생각했는데…….”
말끝을 흐린 필리파가 작은 소리로 이를 갈았다. 암살의 위협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방위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한 것 같았다.
아체리아가 없었더라면, 혹은 그녀가 직접 약혼식에 내놓을 요리를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필리파는 이미 목숨을 잃었거나, 죽어 가고 있을 것이었다.
“한 번뿐인 약혼식이 나 때문에 엉망이 되었군. 이에 대한 배상은 반드시 하겠소, 공작. 그리고 아체리아, 너에게도.”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필리파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클라우스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혼자 방에 남은 아체리아는 심란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필리파가 독에 당하는 것은 막았지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뭔가가 가슴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내내 불쾌하고 답답했다.
“아체리아.”
문 너머로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달려가 문을 여니, 실내복 차림을 한 그도 피로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아체리아는 그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평소와 달리 살짝 처진 듯한 어깨가 안쓰러워 보였다.
“차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그런 건 시종들을 시키면 돼. 그냥 앉아. 많이 놀랐을 텐데.”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서 허스키한 음을 띠고 있었다. 가만히 그의 옆에 앉은 아체리아가 한숨을 내쉬자, 클라우스는 그녀의 손끝을 살짝 잡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아체리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기분이 나빠서요.”
“기분이 나빴다고?”
“네. 좋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 일이 생겼는데요.”
한낮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만약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거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넘어갔다면…….
“……클라우스 님의 기분을 좀 알 것도 같네요.”
“내 기분이라니?”
“음식 드시기 싫어하던 기분이요. 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저도 앞으로는 뭐든 잘 먹을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서워졌어?”
“설마 저 같은 걸 독살할 만큼 부지런한 사람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요.”
클라우스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체리아의 손을 제 쪽으로 좀 더 당겼다. 아체리아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기대어지자, 클라우스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런 무서움을 어떻게 견뎠어요?”
아체리아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클라우스가 한숨을 쉬듯이 웃었다.
“그래서 안 먹고 버티다가 일찍 죽을 뻔했잖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요. 그냥…… 언제나 이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그런 무서움을…… 어떻게 견뎠는가 싶어서요.”
“견디지 않으면 버틸 수도 없으니까. 견디기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척하는 거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독이 든 음식을 본 것도, 그게 누군가의 입속으로 들어갈 뻔한 상황을 겪은 것도.
아체리아에게 있어 음식이란 행복이었다. 만들기도 전부터 완성된 후의 만듦새와 맛을 상상하며 즐거울 수 있는 것, 많은 수고를 거쳐 마침내 머릿속에 그려 보던 그대로 완성하고 뿌듯할 수 있는 것, 한 입 맛보는 순간의 다채로운 기분들…….
그런 것들이 한순간에 얼굴을 바꾸고,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악몽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은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던 클라우스가 그 모든 악몽을 견디고, 두려움 속에서 몸부림치며 매일 테이블 앞에 앉아야만 했던 그 기분을 정말로 알았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딱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도적으로 생각을 닫아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보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자신의 전부였던 것과 그런 가혹한 사실들을 결부시키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클라우스를 위해서,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 아체리아.”
“그럴 필요가 없다뇨?”
“내가 겪었던 일은 나의 일이야. 내가 감당해야 했던 일이고, 이제는 더 이상 그 문제로 고민하거나 시달리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날 위해서……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야.”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시선을 들어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런 자리에 있기 위해서 그가 참아 내야만 했던 것들,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해도 기어이 버텨야만 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약혼식이 엉망이 된 건 안타깝지만…….”
손가락 사이가 간질거린다. 클라우스의 손끝이 약혼반지를 낀 아체리아의 약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다음번이라니요?”
클라우스는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리며 아체리아의 굽어진 손마디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따뜻하게 열이 오른 입술이 반지 위를 스쳤다. 손가락을 따라 손끝으로 이동한 은은한 열기는 손바닥을 지나 손목 안쪽으로 옮아갔다. 아체리아는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클라우스 님, 저기…….”
“약혼으로 끝나지 않을 거잖아. 안 그래?”
고개를 든 클라우스의 입가에, 이전까지는 본 적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비스몽트 공작의 약혼식장에서 왕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있었다는 소식은 마른 들에 불길이 번지듯 온 나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예상하고 우려했던 대대적인 피바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에 관련된 죄인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오는 구경거리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김빠지는 이야기였지만, 필리파는 모든 일들을 조용히, 뒤에서 처리했다.
“굳이 일을 시끄럽게 만들 건 없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필리파는 풀물이 든 장갑을 벗고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응접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에른스트는 그런 필리파를 우려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폐하. 어떤 자가 폐하를 노렸는지, 그리고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은 자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대대적으로 보여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겁쟁이로 보이세요, 사촌은?”
에른스트의 잘생긴 이마가 한순간 찡그려졌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공격을 당했을 때, 누가 날 공격했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건 겁이 많은 자들이나 하는 일이죠. 누군가 달려와서 도와주길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안타깝지만 저는 그런 성미가 못 된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어떻게…….”
“이 나라의 왕이니까 더더욱 그럴 수 없다는 걸, 사촌이라면 이해하실 걸로 아는데요. 돌아가신 선왕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 있는 한, 나는 그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어떤 일도 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