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망이 기습할 때처럼 빠르게 몸을 돌렸다. 동시에 제 주변에 보호막을 쳤다.
때맞춰 주변의 넝쿨들이 가시를 드러내며 샤르망을 에워싸려고 하고 있었다.
이건 자연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정령의 힘이 아니다.
주술사 혹은 마법사가 힘을 빌려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 이곳에는 마법사는커녕 레이나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이 아예 없었으니 아마도 이 힘의 주인은 레이나일 것이다.
주술사들의 힘으로 이렇게 빠르게 공격을 해오거나 주변 사물을 움직이기는 버겁다.
마법사나 다른 이들과 아예 힘을 쓰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술사들이 저주에 특화된 것도 그 탓이다.
그러니 아마도 이전부터 주변에 주술의 힘이 깃든 약초의 재를 뿌려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샤르망은 방어막으로 저를 에워싸는 넝쿨을 막은 뒤 마력을 칼날처럼 만들어 쳐냈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주술 소리가 들릴 정도면 거의 지척인데 눈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기척까지 완전히 없앴어.’
주변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도 그렇고 어쩐지 레이나도 과거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엔 이 숲에 찾아왔을 때에는 샤르망이 먼저 레이나를 발견할 때까지 샤르망을 공격하지 않았었다.
이곳에 또 다른 주술사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때였다.
“이게 누군가요.”
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레이나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치 뜻밖이라는 말투였다.
샤르망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마치 마른 바닥을 긁는 듯한 쇳소리.
축 늘어지고 색이 바랜 잿빛 분홍색의 긴 머리카락.
그에 반해 형형한 붉은 색의 눈동자와 일부러 늘린 것처럼 길쭉한 눈매는 여전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자취를 감췄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젊어 보였다.
‘확실히 달라졌어.’
지금까지 샤르망이 만났던 상대들은 과거와 관계나 대화가 달라졌어도 외형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과거 샤르망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성격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한데 레이나는 저렇게 먼저 입을 여는 사람도 아니었을 뿐더러 저런 젊은 모습도 아니었다.
샤르망이 기억하는 레이나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는데.
어째서?
생각하는 사이 레이나가 조금 더 다가왔다.
“레이나, 안녕하세요.”
샤르망은 최대한 친근하게 인사하려고 했다.
샤르망의 심장을 꾸준히 노리긴 했지만 그것만 빼고 생각하면 불쾌해할 이유는 없었다.
레이나나 샤르망이나 륀트벨 황제의 명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샤르망 또한 누군가에게, 아니, 다수에게 적대적인 사람이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동질감이 드는 상대긴 했다.
그래서 더욱 불쾌했던 것일 테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이상 낮추고 들어가야 할 사람은 샤르망이었다.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곳까지 약초를 캐러 오진 않았을 테고, 나를 만나러 왔나?”
레이나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네, 맞습니다. 륀트벨을 떠난 줄은 알았는데어디 계신 줄을 몰라서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샤르망이 순순히 말하자 레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다지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방금 샤르망에게 힘까지 쓰면서 들어오는 걸 막았다기에는 오히려 반가워하는 기색처럼 보였다.
“황제의 명으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륀트벨의 신하가 아니지요.”
“라칸의 명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레이나의 눈동자가 커다래지더니, 이윽고 웃음을 팍 터뜨렸다.
“라칸이라. 하핫!”
“…….”
“당신의 입에서 황제 이름이 그대로 흘러나오다니 너무나 놀라운데요.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로군요.”
샤르망은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레이나가 긍정의 뜻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모습이 바뀌었군요.”
레이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을 살피듯 손까지 벌린 채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지금 모습이 더 낫죠?”
“…….”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까닭은?”
레이나의 눈이 다시 샤르망을 향했다.
“레이나가 저를 좀 도와줬으면 해서요.”
“도와달라고요? 내가 당신을?”
“네, 저를 도와줬으면 합니다.”
그러자 레이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샤르망과 레이나의 거리는 사람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가까워졌다.
“도움을 청하러 왔다라. 은퇴한 황궁 주술사의 도움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요.”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주술의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륀트벨을 위해 힘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죠. 당신의 안부가 가끔은 궁금하긴 했었으니 얼굴을 본 걸로 해결했다고 생각할게요. 그럼 돌아가 주겠어요?”
레이나가 웃으며 말했지만 무척이나 단호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만약 륀트벨을 위한 힘이 아니라면 대답이 바뀔까요?”
“그럼?”
“개인적인 일로 주술사의 저주에 관해 알고 싶어서 온 겁니다. 또 레이나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어서요. 그에 대한 사례는 반드시 하겠습니다.”
샤르망이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레이나는 그런 샤르망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사례라.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금은보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다른 원하는 걸 안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나의 시선이 샤르망의 목 아래로 향했다.
명치 부근 그 어딘가.
노골적인 시선에 샤르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외형은 바뀌었으나 그건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의 샤르망이 레이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과거의 샤르망이 은둔한 레이나를 찾았던 이유.
그건 레이나의 죽음이었다.
라칸에게 밉보인 레이나는 샤르망의 손에 죽었다.
과거와 달라진 레이나의 모습이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이 레이나는 선황제의 주술사였고 라칸에게 밉보였다.
언젠가는 라칸이 보낸 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칸이 개과천선하지 않는다면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제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는 이들은 모조리 없애는 게 그의 성정이니까.
과거에는 그 일을 수행하던 사람이 샤르망이었지만, 샤르망이 없는 지금의 륀트벨에서도 숙청으로 갈려나간 사람이 여럿이었다.
샤르망 대신 그 일을 처리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이야기다.
레이나도 이대로 둔다면 자신의 죽음을 막진 못할 것이다.
여기서 라칸이 레이나를 노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레이나가 대대적인 준비를 해두었다고 해도, 라칸이 보내는 모든 암살자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이곳을 빠져나가려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샤르망은 자신이 있었다.
샤르망이 돕는다면 레이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케니즈와의 대화 이후 레이나가 위험에 빠뜨리기 전에 평화가 도래할 수도 있겠다.
샤르망이 입을 열었다.
“내 심장은 말고요.”
“흐응, 아쉬워라.”
레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심장은 못 주지만, 대신 드릴 도움 외에 또 다른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들어드릴게요.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요.”
“당신이 내게 주는 도움이라. 그건 한 가지 정도 알 것 같은데.”
레이나가 비죽 미소를 지었다.
섬뜩해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씁쓸하게 바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혹시 당신의 눈에 내 죽음이 보이기라도 하나요?”
“…….”
샤르망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챈 레이나의 발언에 샤르망은 동조의 뜻으로 침묵했다.
그러자 레이나가 끄덕였다.
“역시, 내가 살아가게 두진 않을 것 같더라니. 그래도 꽤 오래 조용하다 싶었는데.”
“어려운 부탁을 들어달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질문에 가까워요. 그것만이라도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듣기만이라면 어려울 것 없죠. 마침 심심했으니 들어나 보죠.”
“고맙습니다.”
“혼자 왔어요?”
샤르망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참 쳐다본 레이나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턱짓했다.
“따라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