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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25)화 (124/148)

“아르디나 할스레이크…….”

샤르망이 벌떡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원망의 표정을 지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표정이 무너지는 걸 막았다.

어떻게든 그들의 비위를 맞추자. 맞춰야 한다.

속으로 세뇌하듯 빠르게 외었다.

며칠 동안 배고프지 않았다 뿐이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물론 해가 뜨고 지는 게 지상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달라 눈요기가 되긴 했다.

하지만 마법을 쓸 때마다 조금씩 좁아지는 철창 사이로 그걸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힐과 함께 오는 게 아니라 혼자 와서 고생할 걸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들었다.

거기다 며칠 동안 자고 일어날 때마다 아힐을 마주하는 건 꽤 부끄러운 일이었다.

청결 마법 같은 작은 마법조차 쓸 수 없었다면 샤르망은 그대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아힐에게 아무런 힘도 못 쓰게 해서 미안했다.

아힐은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사람처럼 굴었지만 이런 곳에 갇힐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함하다 못해 분노하여 샤르망을 어디 망망대해에 던져버릴지도 몰랐다.

아무리 신의 피와 힘을 가졌다고 해도 그렇지.

그리고 대륙 전쟁을 막는 건 넓게 보면 할스레이크도 도움이 됐으면 됐지 전혀 관계없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들의 기술은 신의 힘을 융합해 지상에 있는 것보다 더 뛰어난 것들을 만들어냈지만, 그것들의 재료 중 일부는 지상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빌이 이곳에 오기 전에 잠시 귀띔을 해줬는데, 샤르망이 알던 것과 다르게 할스레이크인 대부분이 유희와 가까운 행위를 위해 지상에 내려온다고 했다.

겉으로 절대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던 할스레이크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었다.

과거 샤르망이 깜빡 속았었던 것이다.

그래놓고!

‘우리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지만 어떻게 보면 버려진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할스레이크를 견고히 지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경험이 부족한 자들이라 생각하면 쉬울지도 모르죠. 사실 우린 지상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과거에 할스레이크인들과 꽤 가까워졌었다고 생각했는데.

에빌이 지나가듯 흘렸던 말을 당시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아르디나를 보니 이해가 되었다.

형제인데도 왜 이렇게 다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샤르망이었으니 얌전히 수그리고 들어가기로 했다.

“저희는 침입자가 아니라 할스레이크의 수장인 당신께 도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나를 능멸하려 했던 것이구나. 버러지 같은 것이.”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냉기가 느껴졌다. 약간의 경멸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르디나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그녀는 거의 눈을 내리깔 듯 샤르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샤르망의 기억보다 훨씬 더 퀭하고 깊은 수심에 찬 얼굴이었다.

“절대 능멸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도와 고민을 덜어드리고자 했을 뿐이에요.”

아르디나가 코웃음을 쳤다.

“나를 도와? 감히 네가 무슨 수로 나를 돕지? 주제넘은 인간이로군.”

“……아르디엘 할스레이크 때문이 아닙니까? 이 게이트를 열어준 것도 그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감히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아르디나가 일갈했을 뿐인데 주변의 공기가 묵직하게 샤르망을 짓눌렀다.

“샤르망.”

동시에 아힐이 샤르망을 막아섰다.

“힘을 거두어주십시오.”

아힐과 눈을 마주한 아르디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아르디나는 앞에 선 남자가 자신의 기운을 물길 가르듯 갈랐다는 걸 알아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것.

뒤에 선 여자도 특이한 마나 구조를 가지고 있고 마력의 양이 상당했다.

그러나 남자는 휘몰아치다 못해 자신들과 비슷할 정도의 마력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저런 자들은 인간 사회에서도 한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걸 아르디나는 알고 있었다.

더구나 여자는 영혼에 현재의 시간과 이미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함께 갖고 있었다.

그 말은 신의 뜻을 거역하고 시간을 거슬렀다는 뜻이 된다.

혼자 벌일 정도의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하니 저 청년이 일으킨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둘 다 보기 드문 인간의 유형이기에 잠시 흥미가 일었으나 그녀가 느끼고 있던 분노가 더 컸다.

애초에 인간 따위가 자신들의 일에 파고드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감히 신이 주신 시련을 우습게보고 반신인 자신에게 불쾌한 물건 따위를 내밀다니.

신의 뜻을 거스른 흔적이 있는 영혼을 갖고 있으면서 또 넘보려고 하다니 말이다.

괘씸했으나 한낱 인간 따위에게 많은 말을 쏟아붓고 싶진 않았다.

“보기 드문 힘을 가졌구나. 흥미롭지만 그뿐. 더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내 아량을 베풀어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아르디나가 그들을 내쫓기 위해 허공에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아예 철창째 쫓아내 버릴 생각이었다.

샤르망이 그걸 보고 서둘러 열쇠를 꺼냈다.

아예 틈을 주지 않으니 대화는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 이곳에 남는 게 먼저다.

“저는 아르디엘의 사자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 열쇠라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르디엘의 부탁으로 그 안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야 합니다.”

샤르망은 에빌이 시켰던 그대로 말했다.

아르디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자는 이미 할스레이크를 떠난 자이다. 그러니 열쇠를 내놓고 떠나라.”

“그럴 수 없습니다. 아르디엘의 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할스레이크의 규율을 지키시는 분이시잖아요. 물건만 얌전히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한참 샤르망을 노려보듯 쳐다보던 아르디나가 열어둔 게이트를 없애버렸다.

아르디나가 뭔가 짧게 말했지만 샤르망은 알아듣지 못한 채 열쇠를 뺏길까 봐 꽉 쥐고 있었다.

어차피 아르디엘이 허락한 자가 아니면 열쇠를 가져갈 수 없다고 했지만 혹시나 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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