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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07화 (107/150)

107화.

루헤가 산수이를 향해 거듭 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뽀뽀를 바라던 찰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그 안으로 들이닥친 건.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는 얀피르였다.

“어이, 마족.”

얀피르의 표정을 본 산수이는 심장이 쿵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야, 얀피르?”

아 이걸 어떡하지.

분명 그 귀신같은 감각으로 전부 다 듣고 온 게 분명했다.

화가 잔뜩 난 채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큰일 났다.

이제 생각할 수 있는 결과는 뻔했다.

여기서 얀피르가 드래곤으로 변신해 루헤와 싸우거나.

아니면 둘의 연애가 들통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 낀 산수이가 어쩔 줄 몰라 하던 찰나.

루헤의 코앞까지 다가온 얀피르가 결국 그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루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인사가 먼저 아닌가요?”

“그놈의 뽀뽀가 그렇게 받고 싶었냐?”

“……예?”

“그럼 어디 실컷 받아 봐.”

쪼오옥—

얀피르는 그대로 루헤의 볼에 제 입을 맞추어버렸다.

“!”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누구도 얀피르를 말릴 새가 없었다.

루헤는 두 팔로 거세게 얀피르를 밀어냈지만 이미 일은 치러진 후였다.

핏기없이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루헤에게서 떨어진 얀피르는 제 소매로 입을 쓱 닦아내며 썩소를 날릴 뿐이었다.

“이 미친 드래곤이!”

루헤는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광분했다.

얀피르가 실실 쪼개면서 빈정거렸다.

“뭘 그렇게 화를 내. 네놈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그 뽀뽀, 내가 대신 해 준 건데.”

“뭐, 뭐라고요?”

“왜, 영 별로였어? 그럼 이번엔 볼에다 말고, 입에다 해 줄까?”

얀피르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루헤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저리 꺼지지 못해요?!”

마침내 참다못한 루헤가 마법을 캐스팅하려 하자, 얀피르가 혀를 쯧쯧 찼다.

“어디 한번 해봐. 이 저택을 날려먹는 것도 모자라, 그녀까지 죽게 만들고 싶다면 말이야.”

“크읏……!”

루헤가 망설이던 찰나, 어느새 얀피르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아직도 뽀뽀가 하고 싶어? 휘온 놈하고도 했는데, 네놈이라고 못할 건 없지.”

“크아악!”

정말 할 생각이었다.

저 미친 드래곤이, 천추의 원수나 다름없을 마족인 제게.

정말 입을 맞출 생각이었다!

루헤는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제가 날뛰면 날뛸수록, 저놈은 더더욱 입술을 들이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겨우 얀피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루헤.

그는 일전에 자신의 옆자리에서 구역질해 대던 휘온의 심경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몇백 년 동안 느껴본 수많은 감정들 중, 가장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한편, 본의 아니게 이 모든 상황의 관조자가 되어버린 산수이 비덴비덴.

그녀는 자신의 인생 첫 남자 친구가 다른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는 걸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하하…… 하하하.’

얀피르가 루헤를 향해 마지막 경고를 내뱉었다.

“앞으로 주인한테 뽀뽀 받고 싶을 때마다, 일단 나랑 먼저 입부터 맞추고 시작하자. 어때, 좋지?”

“…….”

어쨌든, 얀피르의 판단은 옳았다.

둘 사이의 비밀 연애를 들키기는커녕.

그날 이후 다시는 루헤가 산수이한테 뽀뽀해달라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니까.

***

산수이는 루헤에게 드래곤의 동굴에 관해 설명했다.

“그 안엔 이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녀가 테이블 위에 동굴에서 주워온 얀피르의 알껍데기를 올려놓았다.

“……!”

그걸 본 루헤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서렸다.

그가 알껍데기를 집어 들고 한참을 살폈다.

“이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얀피르가 대답했다.

“드래곤의 알껍데기다. 내가 그 안에 봉인되어 있었지.”

“…….”

알껍데기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루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루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게 수이 당신이 찾던 거예요.”

“네? 설마……?”

“그래요. 이 알껍데기가 그 마력구라고요.”

그 말에 산수이와 얀피르가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네에?”

“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그들을 향해, 루헤가 말을 덧붙였다.

“확실해요. 여기에서 온천수를 만들었던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니까.”

산수이는 놀라 얀피르를 돌아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얀피르가 봉인되어 있던 알이 온천수를 만들어내는 원천이었다는 거야?

그렇다는 건.

‘혹시 동굴로 내려가서 남은 알껍데기를 다 주워다가 하나로 이어붙이면, 재활용해서 쓸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산수이가 머릿속으로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던 찰나, 루헤가 얀피르를 향해 물었다.

“당신, 드래곤 중 무슨 일족이죠?”

“일족?”

얀피르는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루헤가 귀찮은 듯 말을 이었다.

“하아…… 당신이 가진 고유의 속성 말이에요. 물이라든가, 바람 같은 거.”

“으음, 모르겠는데.”

“그럼 가문은요?”

하지만 얀피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루헤가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설마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겠죠?”

망설이던 얀피르가 결국 입을 열었다.

“……드 라첸.”

“……!”

그 이름을 들은 루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미치겠네. 드래곤의 황족이라는 걸 왜 이제야 말해요!”

“그야 나도 얼마 전에 알았으니까.”

“하아…….”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루헤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황족은 대대로 불의 일족. 그러니, 당신 역시 불의 속성을 지녔겠죠.”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놀라 물었다.

“내 속성이…… 불?”

옆에서 듣고 있던 산수이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입에서 막 브레스 내뿜는 그거요? 그건 드래곤이면 다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루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불의 일족이 가진 힘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해요.”

루헤가 테이블 위의 알껍데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자들을 봉인해봤자, 잠들어있는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력이 새어 나오죠.”

“……!”

루헤가 말을 이었다.

“아마 당신에게서 새어 나온 불의 마력이, 멀리서 흐르던 지하수까지 한데 끌어모아 모조리 끓여버렸던 것 같군요.”

루헤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충격에 빠졌다.

산수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비덴비덴 남작령의 온천수를 만들어내던 게…….”

얀피르 역시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봉인되어있던 나의 존재 자체가, 마력구였다는 거야?”

루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력구는.

바로 알의 형태로 봉인되어 있었던 불의 드래곤 얀피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원래 이곳 비덴비덴 남작령은 지리학적으로 비덴탕이 위치한 자리에서만 지하수가 샘솟아 나왔다.

하지만 잠들어있던 얀피르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은, 지하에 흐르고 있던 수많은 물줄기들을 이곳 비덴비덴 남작령으로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가 잠들어있는 지하 깊은 곳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더군다나 그에게서 흐르는 강력한 불의 기운은 지하수를 온천수로 만들었고.

이는 유구한 세월 동안 영지민들에게 풍부한 자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얀피르의 봉인이 풀려버린 지금.

온천수는 둘째 치고 이 남작령에 다시는 예전과 같이 풍부한 지하수가 흐를 일은 없었다.

영원히.

황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말했다.

“주인, 내가 가끔씩 다시 땅굴로 들어가서 누워있을까?”

산수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매일같이 생매장당하는 기분으로 살게? 절대 안 돼.”

“아니면 매일 지하수에 대고 불의 마력을 사용하는 건?”

그러자 이번엔 루헤가 피식 웃었다.

“봉인구 안이라면 모를까, 이 거대한 대지에 마력을 모두 빨려서 죽고 싶어요?”

얀피르가 미치겠다는 듯 외쳤다.

“아 그럼 어떻게 해! 주인한테는 그 온천수가 꼭 필요한데!”

“뭘 해도 소용없어요.”

루헤가 뒤로 기대 누우며 말했다.

“당신을 다시 봉인시켜 지하 속에 처박아 두면 모를까.”

“그, 그건 안 돼요!”

산수이가 다급히 외쳤다.

“……?”

유난히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고 루헤의 눈이 의심으로 물들려던 찰나.

산수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 온천수를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킬 순 없다고요.”

“……어차피 불가능해요, 수이.”

“왜요?”

“그 봉인은 오직 드래곤 황족에게만 전해지는 술식이에요. 마왕인 나조차도 만들 수 없다고요.”

루헤가 얀피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설령 당신이 그 술식을 기억해 낸대도, 스스로를 봉인시킬 수는 없어요.”

얀피르가 외쳤다.

“그럼 온천수는……!”

루헤가 딱 잘라 말했다.

“포기하세요.”

하지만 좌절감에 빠진 얀피르와는 달리, 산수이는 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포기하겠어요.”

산수이의 입에서 포기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얀피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주인, 미안해. 이게 다…… 다 내가 다시 깨어난 탓이야.”

“참나, 네가 왜 미안해해? 오히려 다들 너한테 고맙다고 큰절이라도 올려야지. 몇백 년간 온천수 공급해 줬던 거 아냐, 그것도 공짜로.”

“하지만!”

산수이가 얀피르에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거라면, 빨리 털어버리고 다른 길을 찾으면 돼.”

“주인 넌 진짜……!”

그때, 산수이를 향해 갑자기 루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수이.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네?”

“그 땅굴엔 대체 어떻게 들어갔던 거죠? 마왕인 나조차도 풀지 못했던 마법진이었는데 말이에요.”

어, 어떡하지?

얀피르의 반려로서 들어갔었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는데!

하지만 그런 산수이의 속내를 눈치챈 얀피르가 낮게 한숨 쉬었다.

‘에효. 하여간 표정을 못 숨긴다니까.’

하는 수 없이 이번에도 또 내가 둘러대 줘야지.

그가 루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주인이 거길 어떻게 들어가. 땅굴 앞까지 와서 발만 동동거리길래, 내가 혼자 들어가서 다 주워왔지.”

“흐음.”

다행히 루헤는 금세 흥미가 식었다는 듯, 하품을 크게 하고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럼 난 이제 쉬어야겠어요. 오랜만에 때를…….”

하지만 얀피르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때 밀고 싶으면, 나한테 밀어.”

“미쳤어요? 당연히 수이한테 밀 거…….”

“오늘 주인 기분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 그래? 너 나한테 뽀뽀 받고 때 밀래, 그냥 때 밀래?”

“……그럼 전 이만.”

루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검은 연기가 되어 방 안에서 사라졌다.

이제 방 안에는 황망한 표정의 둘만이 남겨졌다.

얀피르가 산수이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주인, 정말로 괜찮으니까 언제든 말만 해. 난, 이 한 몸 바쳐서라도 다시 온천수가 될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산수이는 단호했다.

“얀피르, 너 그 일로 다시 한 번만 더 미안하다 하면, 정말 화낼 거야!”

“하지만…….”

“게다가 내 인생 처음으로 생긴 남자 친군데, 안 돼. 못 잃어.”

‘뭐? 나, 남자 친구?!’

주인이 지금 자기 입으로 날 남자 친구라고 부른 거야?!

그 단어를 들은 얀피르는 순간 또다시 멍하니 굳어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산수이가 그의 시선을 피하려던 찰나.

정신이 돌아온 얀피르가 산수이의 손을 덥석 붙잡고 연신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남자 친구……. 하아. 그치, 이렇게 예뻐 죽겠는데 널 두고 다시 땅속에 갇혀야 한다니, 말도 안 되지.”

또다시 눈깔이 풀려 저에게 덤벼들려 하는 얀피르를 저지하며, 산수이가 빠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그리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뭐……?”

놀란 얀피르가 제 품 안에서 그녀를 놓아주며 물었다.

“주인,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거야?”

“그럼, 당연하지.”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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