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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06화 (106/150)

106화.

“휘, 휘온하고 프리트 저하가 지금 여기로 오고 계시다고요?”

뒤늦게 유모에게서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산수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지금껏 얀피르와의 관계를 남작저 사람들, 특히 유모에게 들키지 않겠다는 것만 신경 쓰느라.

정작 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걸 그 두 사람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나 휘온과 프리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자신과 얀피르가 연애 중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당장 어떤 사달이 날지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그들을 속이는 것 역시 차마 못 할 짓이었다.

산수이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얀피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직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제 휘온과 프리트에게 더 이상의 투자나 도움을 받아선 안 된다고.

그렇게 산수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침울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휘온과 프리트는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수이는 그들을 응접실에 모두 불러 모아놓고 무슨 대역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다.

“저, 황태자 저하…….”

프리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뭐야. 또 왜 이래, 남작? 내가 그냥 프리트라고 부르랬잖아.”

하지만 산수이는 그러지 않았다.

“……저하. 그리고 공작님.”

갑작스럽게 거리를 두는 산수이를 보며 당황한 두 남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던 찰나.

계속해서 머뭇거리기만 하던 산수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 앞으로는 더 이상 비덴탕에 투자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두 남자는 심히 당황했다.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왜 우리를 동시에 밀어내는 거야.

“산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래, 말해 봐 남작. 답답하게 자꾸 빙 돌려 얘기하지 말고.”

“저, 그게…….”

곤란해하는 산수이의 앞에, 지금껏 뒤에서 듣고만 있던 얀피르가 나서서 대신 대답해주었다.

“비덴비덴 남작령에서 다시 온천수가 나올 예정이라 그래.”

“!”

산수이가 놀란 눈으로 얀피르를 바라보았다.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씩 미소 지으며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고마우면, 나중에 뽀뽀해 줘.’

한편, 그 얘기를 들은 휘온과 프리트의 눈에선 놀라움의 빛이 번져나갔다.

그들은 화색이 된 얼굴로 산수이에게로 몸을 기울여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산수이? 대체 온천수 고갈의 원인이 뭐였습니까?”

“아니, 이런 경사를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거야, 남작? 그래서 대체 언제쯤 온천수가 다시 나오는 거지?”

하지만 모든 대답은 산수이가 아닌 얀피르가 대신했다.

“자세한 건 우리도 아직 몰라. 그 마족 놈이 안 돌아와서.”

“뭐야, 왜 얀피르 네놈이 대신 대답하는데? 난 산수이에게 물었다.”

“그럼 그 마족 놈은 지금 여기 없다는 소리인가? 그거 잘됐군. 오랜만에 평화롭게 목욕을 즐길 수 있겠어.”

두 남자는 산수이와 얀피르의 관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남작령에 온천수가 다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기뻐하며 크게 떠들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산수이는 죄책감에 딱 죽을 맛이었다.

그때였다.

휘온이 산수이를 향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혹시 루헤 님께서 돌아오시면,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도 되겠습니까? 제국의 실력 있는 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했던 그 원인이 대체 뭐였는지, 너무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래, 남작. 나 역시도 이 제국 땅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

하지만 그 별로 어렵지 않은 일에, 산수이가 정색을 하며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루헤 님은 저희 남작저의 손님이시기도 하니까요. 사람이 많으면 그분께서 불편해하실 거예요. 제가 먼저 들은 뒤, 나중에 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이상한 반응이었다.

산수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선을 그었다.

“……아무튼 그래서 이제는 저 혼자 힘으로 여길 운영해 나갈 생각입니다.”

“아니 저기, 남작?”

“산수이……?”

“그동안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로 깊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두 남자에게 예를 갖춘 뒤 자리를 무른 산수이.

그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날 밤, 휘온과 프리트는 남몰래 공작저에서 접선했다.

***

휘온의 서재 안.

프리트와 휘온은 서로 마주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고민 중이었다.

“대체 산수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확실한 건, 우리한테 뭔갈 숨기고 있다는 거야.”

“그 온천수 고갈의 원인 말이죠.”

“그게 아니면 뭐겠어.”

더 확실한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남자가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것이었다.

휘온이 답답한 듯 말했다.

“대체 그걸 저희에게 숨길 이유가 뭐죠? 애초에 루헤 님께도 아직 대답을 듣지 않았다면서…… 아.”

순간, 무언가 떠오른 두 남자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휘온을 향해, 프리트가 먼저 그 단어를 내뱉고 말았다.

“흑마법이 관여되어 있었나 보군.”

“……!”

“뭘 놀라고 그래, 휘온. 너도 방금 같은 생각을 한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합니다만…….”

“그 드래곤 놈은 알고, 우리는 알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뭐겠어. 딱 그거뿐이야.”

프리트가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마족 놈이 발견했다던 그 온천수의 고갈 원인이, 흑마법의 흔적이었던 거지.”

물론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지만.

두 남자는 그제야 비로소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인 얀피르나 마족인 루헤와는 달리, 오로지 인간인 자신들만 이 문제에서 제외하려는 이유를.

산수이가 그토록 죽상을 하고 저희들을 밀어내는 이유를 말이다.

휘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프리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프리트는 그런 휘온의 속을 다 읽었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산수이 남작을 옥에 처넣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

“제국 땅에서 흑마법을 사용하는 건 중죄잖습니까.”

“원리 원칙 따지기 좋아하는 우리 에데카나 공작님께선 남작을 엄벌에 처하고 싶으신가 보지.”

“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내뱉은 휘온은 제가 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지만 프리트는 크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휘온.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내가 황위에 오른다 한들 그녀를 처벌할 생각은 없어.”

“진심이십니까, 저하?”

“그래. 애초에 흑마법의 흔적이 비덴비덴 남작령에서 발견되었다 뿐이지, 산수이 남작이 그걸 직접 사용한 건 아닐 거 아냐. 그럼 미쳤다고 그 원인을 직접 찾아다녔겠어? 대마왕 놈까지 포섭해서?”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거랑 섭섭한 건 별개의 문제야. 얀피르 놈하고 그 마왕 놈은 믿어도, 우리는 못 믿겠다는 거잖아.”

“그야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고위 귀족, 게다가 저하께서는 제국의 황제가 되실 몸인데요.”

프리트가 짜증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휘온 넌 섭섭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휘온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섭섭…… 합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제국의 고위 인사인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대놓고 ‘흑마법 따위 상관없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잠시간 고민에 빠져있던 두 남자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것 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야. 앞으로 남작이 아무리 우리를 피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모른 척하고 옆에 붙어있겠어.”

“저하……!”

“휘온 넌 앞으로 더욱더 공격적으로 투자를 진행해. 난 비덴비덴 남작가에서 올라오는 모든 안에 허가를 내릴 테니까.”

“그런 거라면,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산수이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한편, 두 남자가 떠난 뒤 산수이는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사우나스를 하루속히 강림시켜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긴 것이다.

‘저 둘을 더 이상 속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이 미션을 끝내야만 해.’

원래는 그저 사우나스가 들어주겠다 약속한 한 가지 소원 때문이었지만.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길 포기한 그녀가 새롭게 빌기로 결심한 그 소원은 바로…….

그렇게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던 산수이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얀피르가 매일같이 퍼다 주는 다디단 사랑에 빠져 잠시 게을리하고 있었지만, 이제라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곳 영지민들을 위해서, 두 남자에게 하루라도 빨리 모든 걸 털어놓기 위해서, 그리고…….

그 소원을 빌기 위해서.

“그러려면 잃어버린 마력구의 행방부터 찾아야 해.”

그러니 일단은 루헤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땅굴에서 알껍데기 말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지금.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대마왕인 그밖에는 없었으니까.

***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루헤가 검은 연기와 함께 다시 산수이를 찾아왔다.

산수이는 제 방 안에 현신한 루헤를 보며 세상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루헤!”

하지만 산수이는 그가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한 가지 골치 아픈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수이.”

루헤가 산수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제가 준 로브를 두 번이나 사용했더군요?”

‘로브……?’

아 맞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놈의 마법 로브를 작동시키는 주문을.

당황한 산수이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단순한 주문일 뿐이었잖아요.”

“그렇죠.”

그가 미소와 함께 천천히 산수이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의 수이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아니 이 자식이.’

역시 마족이 주는 물건 따위,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절대 뽀뽀는 해 줄 수 없었다.

애초에 내 의지로 한 약속도 아닌데 이걸 왜 지켜야 돼!

게다가.

‘연애 시작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외간 남자한테 뽀뽀를 하라는 거야!’

인생 처음으로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시작부터 바람을 피우라는 거냐!

물론 그 말은 속으로만 꾹 삼켰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루헤는, 그저 예쁘게 웃으며 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자아, 수이. 난 준비가 됐어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마왕 놈은 뭐가 저리 당당한 거야.

“이건 말도 안 돼요, 루헤. 난 주문을 외운 것뿐이었다고요.”

“그럼 그냥 감사의 인사로 해 주면 되죠.”

“감사의 의미로 다른 건 안 될까요?”

“응, 안 돼요.”

아 미치겠네.

대체 그에게 뭐라 대꾸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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