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마계에 위치한 마왕성 안.
빛나는 모노클을 쓴 보랏빛 머리의 한 마족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슐레히트.
대마왕 루헤의 보좌관이었다.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슐레히트는 제 주인인 루헤보다도 몇백 살은 훨씬 더 먹은 고위 마족이었다.
마계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는 정신계 마법을 주특기로 사용하는 슐레히트.
그는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대대로 선대 마왕들의 보좌관으로 군림해왔다.
지금까지 제가 모셔왔던 수많은 마왕들과는 항상 합이 잘 맞았다.
대부분 호전적이고 걸걸한 성격을 지녔던 그들에게, 말수가 적고 두뇌 회전이 빠른 슐레히트는 최고의 참모였으니까.
그렇게 역대 마왕들과 함께 마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며 큰 보람을 느끼고 살아왔었는데.
하지만 그런 호시절은 갑작스레 끝이 나고 말았다.
루헤 슈바츠발트가 새로운 대마왕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말이다.
‘하아, 제기랄. 분명 또 어디선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겠지.’
루헤가 왕좌에 오른 이후부터, 슐레히트는 자신이 보좌관인지 아니면 보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항상 나무늘보처럼 길게 늘어져있는 루헤를 찾아내, 밀린 업무를 그의 손에 들려주는 일.
그것이 슐레히트 하루 일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오늘도 어디선가 퍼질러 처자고 있을 자신의 주군을 찾아 마왕성을 빙 돌고 있던 슐레히트.
마왕의 침실에는 진즉 찾아가 보았지만, 이 눈치 빠른 놈은 이미 제가 들이닥칠 걸 알고 자리를 피한지 오래였다.
‘이런다고 제가 못 찾을 거라 생각하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게 슐레히트가 새롭게 발걸음을 한 곳은.
마왕성의 첨탑 꼭대기에 있는 낡고 오래된 빈방이었다.
얼마 전부터 루헤가 그곳에서 온수를 받아놓고 들어가 낮잠을 잔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왜 멀쩡한 용암 수영장을 놔두고 맹물에 들어가 계시는 거냐고!’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마왕이었다.
제가 지금껏 모셔왔던 군주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첨탑에 위치한 빈방의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마왕님, 슐레히트입니다!”
“으헉……!”
그 목소리에 간이 욕조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루헤가 경기를 일으키며 깨어났다.
루헤는 입가에 흐른 침을 슥 닦으며, 세상 아름다운 미소로 슐레히트를 바라보고 웃었다.
‘읏……!’
방금 전까지 루헤를 생각하며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던 슐레히트였지만.
저 찬연한 미소를 보고 나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반라의 루헤가 촉촉이 젖은 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잘 잤어요, 슐레히트? 좋은 아침.”
누가 인큐버스의 피를 이어받은 자 아니랄까 봐.
하여간 제가 불리해지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미모 공격을 해댔다.
그러나 슐레히트는 이미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모노클을 고쳐 쓰며 대꾸했다.
“아침이 아닙니다, 마왕님. 이미 점심 드실 시간도 지났단 말입니다.”
“……그럼 좋은 저녁?”
슐레히트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제발 그만 좀 일어나십시오! 정무를 보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정무를!”
“그 정무…… 나중에 보면 안 될까요?”
루헤가 간이 욕조에 팔을 괸 채 슐레히트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안 됩니다.”
“매정해라.”
“대체 이젠 물에서 주무시는 연유가 뭡니까? 마왕성 침대가 푹신하다고 그렇게 좋아하셨으면서.”
“그야…… 하아암.”
나른하게 하품하던 루헤가 슐레히트를 향해 다시금 배시시 웃었다.
“물속에 있으면 슐레히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요.”
이 자식이!
슐레히트는 더 길게 대꾸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저 욕조 가까이로 다가가 손을 뻗어 주문을 캐스팅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수건 한 장이 튀어나와 루헤의 양손에 묻은 물기를 모조리 말리기 시작했다.
“……?!”
그 수건은 곧이어 보랏빛 연기와 함께 욕조 트레이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루헤가 누워있는 간이 욕조에 딱 맞는 크기로 설치되었다.
슐레히트가 그 트레이 위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자, 어서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옆에서 뜨겁게 쳐다보고 있으면 집중하기 힘들다고요.”
“제가 나가면 다시 주무실 거잖습니까.”
“으응, 어떻게 알았죠? 이상하다, 정신계 마법은 나한텐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런 건 마법 따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흐응…….”
루헤가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슐레히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미인계는 더 이상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소용없습니다.”
“그것 참 아쉽네요.”
“한 시간 있다 와서 검사할 겁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그 안에 다 보란 말이죠?”
“그러길래 미리 해 두셨어야죠.”
“졸린데…….”
“이미 하루의 절반 이상을 주무셨거든요? 아무튼, 정확히 한 시간입니다. 더는 안 봐드립니다.”
슐레히트는 더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씩씩대며 방을 나가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여태껏 욕조에 게으르게 늘어져있던 루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흐응,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요.”
크게 기지개를 켠 그가 트레이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루헤가 붉은 눈동자를 번쩍이며 빛과 같은 속도로 서류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건 루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딱히 마법을 쓰지 않아도 이깟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그 마음을 먹기가 어려워서 문제지.
우리 애가 머리는 참 좋은데 공부를 안 해.
그것이 루헤의 부모,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들이 늘상 하던 말이었다.
사실 그들은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제 아들이 마왕이 될 자질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무한한 마력과 힘, 게다가 뛰어난 머리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천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영재 중의 영재, 신동 마족이었다.
애가 매일 늘어져 있긴 하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마계를 쥐어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늘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린 루헤는 너무 일찍부터 한 가지 사실을 배워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역사서에 적혀있던, 마계 대전의 참혹한 결말을.
본디 마족은 지하세계에 본거지를 두고 살면서, 자유롭게 인간계와 천상계를 오갈 수 있었다.
그 사이에는 어떠한 조약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마족들이 지상의 땅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결과.
그들은 천족에게 패하여 영원히 지하 속에만 갇혀 살게 된 것이었다.
“쓸데없이 과욕을 부리다가 이 꼴이 났다는 거네요……?”
루헤의 게으른 천성을 고려했을 때, 그 역사서를 되도록 늦게 뗐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날 이후 루헤는 굳게 다짐했다.
더욱더 열심히 놀고먹기로.
그의 부모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저런 재능을 가지고도 야망을 품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루헤는 끝끝내 자신의 힘을 숨긴 채, 마계 깊은 곳에 처박혀 재야에서 낚시나 하는 삶을 선택했다.
마치 의식처럼 행해지던 딱 한 가지 일만을 제외하면.
몽마인 그는 가끔씩 역대 마왕들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의중을 살폈다.
혹시라도 또다시 전쟁 따위를 일으키려는 정신 나간 놈이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루헤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마계에 축적되어 온 오랜 지식들, 과거 전쟁에 얽혀진 비화, 천족들의 비밀. 그리고…….
마침내 선대 마왕이 제2차 마계대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마왕성으로 날아가 그를 살해했다.
그 대가가 바로 눈앞에 쌓여있는 이 서류들이었다.
‘하아…… 정말이지, 너무너무 귀찮다니까. 낚시나 하고 살던 때가 더 행복했는데 말이죠.’
루헤는 계속해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에 결재를 해 나갔다.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그가 빙긋 웃었다.
“아니지, 역시 그때보단 수이한테 등을 밀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으려나……?”
***
“온천수를 대신할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고?”
산수이가 호언장담한 그 묘안이란, 그저 얀피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며칠 후, 황궁으로부터 산수이에게 서신이 도착했으니까.
황제의 인장이 찍혀있는 그 서신에는 산수이의 황궁 방문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산수이는 잔뜩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입궁 준비를 했다.
얀피르가 다가가 말했다.
“나도 같이 가, 주인.”
“황제 폐하께서 넌 왜 왔냐고 하시면 뭐라 그러게?”
“그게 뭔 상관이야. 내가 내 반려 지키러 같이 가겠다는데.”
“하지만 거기 프리트도 함께 있을 거고…….”
“걱정 마, 티 안 낼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얀피르는 또다시 산수이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산수이가 당황해하며 외쳤다.
“이러는데 퍽이나 티가 안 나겠다!”
“거기선 티 못 내니까 지금 많이 내 둬야지.”
쪼옥—
순식간에 그의 입술이 산수이의 입에 닿았다 떨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못 견디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아…… 진짜 예뻐 죽겠네.”
“바, 방금 1일 1뽀뽀 한 거다? 오늘은 이걸로 끝!”
“그럼 이번엔 키스하자.”
“안 된다고!”
“핥는 건?”
“내가 같은 수에 또 넘어갈 줄 알고?”
“쳇…….”
제 품에서 빠져나가는 산수이를 바라보며 얀피르가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젠 산수이보다도 제가 더 간절히 사우나스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우나인지 뭔지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돌아버리겠네, 진짜.’
하는 수 없었다.
산수이가 계획하고 있는 저 새로운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도와주는 수밖에.
얼마 후 마차를 타고 황궁에 다다른 산수이와 얀피르.
산수이는 제 손에 들린 신규 사업 기획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산수이가 말한 묘안이었다.
‘이제 이것만 황제 폐하께 승인받으면, 그 사업에 착수할 수 있어!’
과연 이게 사우나스가 원하는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혹여 이것이 사우나스가 원했던 정답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영지민들의 오랜 숙원은 풀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산수이와는 다르게.
그녀의 옆에 선 음흉한 드래곤 한 마리는 속으로 전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흐음.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주인하고 뽀뽀하기 좋지?’
얀피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사각지대만을 찾고 있었다.
일단 궁 내부로 들어갔다 하면 남의 눈을 피하기 더더욱 어려울 텐데.
그럴 거면 이렇게 밖에 있을 때 정원에서 길을 헤매는 척 빨리 한번 거사를 치르고 가야…….
그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산수이에게로 다가갔다.
“주인. 여기 말고 저쪽 길로 가는 게 어때?”
“응? 하지만 분명 저번에 왔을 땐 이쪽…….”
“나 믿고 한 번만 따라와 봐.”
그렇게 얀피르를 따라서 익숙지 않은 길로 들어서던 산수이.
그녀는 얼마 안 가 자신이 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간 이 짐승!’
하지만 이미 되돌아가기엔 늦어버렸다.
키가 큰 나무들로 사방이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는 이 미로 같은 정원을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터였다.
“너 또 뽀뽀하려고 여기로 데려온 거지!”
“아닌데?”
얀피르가 능글맞게 웃으며 산수이에게 다가왔다.
“키스할 건데?”
“야!”
산수이가 주먹으로 얀피르의 가슴을 냅다 후려치려 했지만, 곧 그의 단단한 손에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왜, 싫어?”
“화, 황궁에서 이러면 안 되지!”
“어차피 여기 있으면 아무도 우리 못 봐.”
“그래도…….”
“주인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그러니까 싫으면 지금 말해 줘.”
하지만 산수이는 얼굴만 벌게진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얀피르가 만족스럽게 씩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렇게 한동안 나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정원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