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루헤가 등장하자, 무도회장의 공기는 잠시 동안 얼어붙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천상의 미모. 신비롭게 짙푸른 머리칼과 붉고 매력적인 눈동자,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
떡 벌어진 어깨와 장신이 아니었더라면, 여인으로 오해했을 만큼이나 그는 아름다웠다.
그의 청아함에 압도된 귀족들은 그 자리에 서서 오직 루헤 하나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그의 몸에서 태생적으로 흘러나오는 몽마의 페로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저, 저분은 대체 누구시죠?”
“제국에서는 본 적 없는 차림새군요.”
“그럼, 이국의 왕자님?”
곧이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가, 가지런히 묶인 머리칼을 흩날리며 어디론가 향하자.
“처, 천사?!”
“맙소사, 저건 신의 강림이라 볼 수밖에 없겠어!”
그 우아한 몸짓에 연신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심각한 건, 다름 아닌 발레아나 공주였다.
“……!”
처음이었다.
자신의 오라버니보다, 휘온보다, 그리고 잘생겼지만 무서웠던 얀피르보다 더 고운 남자를 마주한 건 말이다.
열네 살 소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 어쩜 사람이 저리 아름다울 수 있지……?’
발레아나는 제 눈을 비비며 다시금 루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를 바라볼수록 상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분명 아까까진 루헤가 군중들 틈에 섞여 있었는데.
이제는 텅 빈 홀 가운데 그 혼자만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 홀 안에 웬 오징어가 저리 많이.’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있는 건 그 세 남자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 역시 발레아나의 눈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져 하나의 점으로 소실되었다.
발레아나는 공주의 체면도 잊은 채, 오직 루헤의 움직임만을 좇았다.
저 천상의 자태, 오묘한 머리 색, 그와는 대조적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루헤는 자신을 바라보는 만인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물만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걸음마다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리며, 마침내 그는 구석 테이블 의자에 쭈그려 앉아있던 산수이에게 도달했다.
“……수이.”
“루헤?”
그가 말없이 산수이의 앞에 무릎 꿇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다녀왔어요.”
순간 장내는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저, 저분은 산수이 남작님?”
“역시, 얀피르 후작님과의 염문설은 소문일 뿐이었나 봐요!”
“저리 신비스러운 정인을 숨겨두고 있으셨을 줄이야!”
전말을 알고 있는 세 남자, 얀피르와 휘온, 그리고 프리트만이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
하지만 그들이 무슨 수를 써 보기도 전에, 루헤가 먼저 비틀거리는 산수이를 일으켜 세웠다.
“술을 마셨군요, 수이.”
“많이는 안 마셨…… 으앗!”
순간 루헤는 산수이를 번쩍 안아 들고, 그녀의 작은 발을 제 큼직한 부츠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산수이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선물한 드레스를 선택해 줬네요.”
“역시, 루헤 당신은 바로 알아보네요?”
그는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였다.
곧이어 루헤는 자신의 새빨간 눈동자로 무도회장의 한쪽에 모여있던 악사들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모든 악사들이 동시에 같은 무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루헤가 만족한 듯 웃으며 산수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게 당신과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수이?”
***
산수이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던 루헤가 좌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두는 마치 꼭두각시가 움직이듯 일사불란하게 텅 빈 홀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루헤는 산수이를 끌어안은 채 회장 한가운데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세 남자가 절규했다.
“아, 안 돼! 주인!”
“하 이런 제기랄! 그녀와의 첫 춤을!”
“아아, 산수이…….”
그렇게 루헤와 산수이는 빠르게 군중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아아, 이국의 왕자님……!”
금단의 사랑에 빠져버린 발레아나.
그녀는 먼발치에서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루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졸지에 루헤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춤을 추게 된 산수이.
자칫하다간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저, 있잖아요. 루헤.”
루헤는 대답 없이 그녀를 향해 미소만 지었다.
“저, 사실 춤을…….”
“못 추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산수이가 멋쩍은 듯 웃었다.
“티 많이 났어요?”
“괜찮으니, 나한테 꼭 매달려 있어요, 수이.”
그렇게 루헤는 능숙하게 산수이를 리드하며 아름답게 춤을 췄다.
“아…….”
산수이는 잠시 동안 그가 마왕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그의 미모, 몸동작 하나하나 모두가 모두 우아한 예술품 같았다.
게다가 춤을 추기 위해 그를 안고 있자니, 일전의 참기 힘들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이 마왕님은 왜 이렇게 손만 대면 홀릴 것 같냐…… 아, 정말 인큐버스가 맞는 것 같은데.’
빙고.
이 꿈같은 순간에 흠뻑 빠져있던 산수이는,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뒤늦게 떠올렸다.
“맞다, 루헤!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그가 싱긋 웃으며 산수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찾았어요.”
“정말이에요?”
기뻐 날뛰던 산수이는 그만 루헤의 발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루헤가 그녀를 다시금 가볍게 안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다시 남작저로 찾아갈 테니, 지금은 나와의 춤에만 집중해요, 수이.”
으으,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집중을 할 수 있겠어.
일 중독자인 산수이에게 일 얘기를 나중에 하자니. 그런 고문이 또 없었다.
산수이의 심경을 눈치챈 루헤가 작게 쿡쿡 웃더니, 그녀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이 입은 드레스, 내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러게? 어떻게 보이는데요?”
루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죠.”
“네, 네? 뭐라고요?!”
그럼 지금 루헤의 눈에는 내가 알몸으로 보인단 얘기야?!
놀라 뒤로 자빠지려는 산수이의 등을 가볍게 받아내며, 루헤가 또다시 간지러운 귓속말로 속삭였다.
“농.담. 이에요.”
“루헤!”
“아하하…….”
그는 재미있다는 듯 산수이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고 웃기 시작했다.
이 작은 인간을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다. 뭘 말하든 항상 신선한 반응을 보여준다니까.
하지만 산수이는 잔뜩 성이 났다.
“장난치지 말고요! 어떻게 보이는데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루헤가 산수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수이 눈으로 직접 볼래요?”
“네?”
루헤가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검은 연기와 함께 산수이가 입고 있는 블랙 슈트의 모습이 바뀌었다.
루헤의 핏빛 눈동자 색깔을 연상시키는 그 드레스의 디자인은…….
“레, 레오타드?!”
그것은 목과 팔목 끝까지 감싸는 디자인의 붉은색 가죽 레오타드였다.
‘이런 미친!’
같은 재질의 붉은 가죽 부츠는 허벅지 위까지 올라와 있었고, 그 사이를 검은색 망사 스타킹이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에 달려 있는 건.
“뿌, 뿔?!”
산수이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머리 위에 돋아난 새카만 뿔을 더듬거렸다.
그런 산수이의 반응을 본 루헤는 또다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쿡쿡…… 아, 정말 너무 예쁘네요. 수이.”
결국 산수이는 참지 못하고 루헤의 가슴팍을 냅다 때렸다.
“야, 이 변태 대마왕 자식아!”
루헤는 그녀에게 순순히 맞아주면서도,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른 종족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건 옳지 못해요, 수이.”
“이건 비판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으로만 판단하지 말아요.”
“그럼 마계에선 이게 예쁜 거란 말이에요?”
루헤가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것도 그냥 예쁜 게 아니라, 품격 있는 아름다움의 정수죠.”
정말인가? 이게 마계에선 흔한 거야?
하지만 저를 보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의 루헤를 보면.
‘거짓말! 거짓말일 거야!’
그가 산수이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거짓말 아닌데?”
“이젠 독심술도 해요?”
“수이는 뭐든 얼굴에 다 보여요.”
“이익…….”
말재간으로는 루헤를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루헤. 설마 나, 지금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런 모습으로 보이고 있는 건 아니겠죠?”
“걱정돼요?”
“당연하죠!”
그러자 루헤가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여기에 입 한 번만 맞춰주면 말해줄게요.”
“미쳤어요?”
산수이는 루헤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는 산수이를 단단하게 끌어안고는 절대 놔 주지 않았다.
“맞다, 수이. 한 가지 알아둘 게 있어요.”
“또 뭐요!”
그가 산수이의 귓가에 대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나, 미친 건 아닌데. 변태는 맞아요.”
“야!”
산수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발을 세게 밟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저 꽁냥꽁냥해 보일 뿐이었다.
세 남자는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저, 저 마족 놈! 대체 뭘 하느라 주인을 저렇게 꽉 끌어안고 있는 거야!”
얀피르는 그르렁거리며 가까스로 제 살갗에 피어오르는 비늘을 억누르고 있었고.
프리트는 조용히 제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칼을 가져와.”
“저, 저하. 무도회장에선 칼을 쓰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장 가져오라고!”
그렇게 난동부리는 두 남자의 옆에선, 휘온이 벌써 칵테일을 열두 잔째 들이켜고 있었다.
벌컥벌컥—
한편 루헤는 자신을 향해있는 산수이의 분노 어린 시선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슬슬 그만 놀려야겠네요.’
그가 산수이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말아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각자가 원하는 드레스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산수이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럼 뭐해요! 이런 드레스를 상상하는 당신 같은 변태가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에 루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능숙하게 산수이를 한 바퀴 휙 돌린 후, 다시금 그녀를 제 품 안에 꽉 가두며 속삭였다.
“이런 모습을, 내가 다른 놈들한테도 보여줄 것 같아요……?”
그렇게 거미줄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루헤의 품 안에서, 산수이는 한동안 끝나지 않을 춤을 춰야 했다.
***
루헤와 장장 네 곡을 연달아 춘 산수이는 파김치가 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마법을 써서 끝나지 않는 무한의 연주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는…… 다시는 루헤랑 춤추나 봐라!’
그렇게 씩씩대며 자리에 앉은 산수이였지만.
저를 따라 들어오는 루헤의 얼굴을 또다시 보고 있노라면 지금의 화가 다 누그러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얼굴에 약한 거야, 나 자신아…….’
그때였다.
갑자기 산수이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주인, 이제 나랑 춤출 차례야.”
“무슨 소리. 당연히 이 몸과 먼저지.”
“그대가 선택해 주십시오, 산수이.”
여태껏 그녀가 돌아오길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던 세 남자가.
산수이에게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