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96화 (96/150)

96화.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셋이 동시에 손을 내밀면.

누구를 골라도 끝나지 않을 지옥이 시작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옆에 선 루헤 역시, 어디 산수이가 누굴 고르나 보자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있으니.

지금의 이 모습이 모두의 시선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머머……. 저것 좀 보세요! 산수이 남작을 두고 싸움이 났나 봐요!”

“황태자님에 공작님, 드래곤 후작님도 모자라 신비의 이국 왕자님까지?!”

“부러워라!”

망했다.

만일 이 세계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내일 아침 실검 1위를 찍는 건 자신이었겠다고 생각하는 산수이였다.

‘에효…….’

마음 같아서는 네 남자를 모두 물리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목욕이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회적 체면도 생각해 줘야겠지.’

그래서 산수이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세 명의 손 중 하나를 골라 덥석 잡았다.

“!”

그는 다름 아닌 프리트 황태자였다.

‘프리트가 이 무도회를 연 거나 마찬가진데, 당연히 먼저 챙겨줘야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을 선택한다면, 무도회의 주최자인 그가 매우 곤란해지리라.

갖은 고생으로 사회생활에는 도가 튼 그녀였다.

산수이가 프리트의 앞에 마주 섰다.

“영광입니다, 황태자 저하.”

“좋은 선택이야, 남작.”

그렇게 산수이는 크고 단단한 프리트의 손을 잡고 홀로 나섰다.

허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얀피르와 휘온에게, 산수이가 고개를 돌려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둘이 가위바위보라도 하고 있어요.”

***

그렇게 프리트와의 춤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손만 대도 미혹되어버릴 것만 같았던 루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프리트의 몸은 뇌를 제외한 모든 곳이 근육으로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특히나 그가 크고 강인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굳세게 움켜쥐자, 산수이의 마음이 천천히 안정되어갔다.

두려운 것이 없는 강인함이 그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말 단단하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넓은 가슴팍에 제 작은 손을 올려놓자, 애써 진정시켜놨던 번뇌가 다시금 요동쳤다.

‘이, 이건 진짜……!’

왜 그렇게 뭇 여성들이 흉부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프리트의 때를 밀어주며 몇 번이고 봐 왔던 가슴이었지만, 이렇게 함께 춤을 추며 보고 있자니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프리트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대가 내 가슴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는걸.”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저하! 저는 그저 춤을 춰야 하니까 그런…….”

아 맞다.

춤을 출 때 손을 올려야 되는 부분은 가슴이 아니었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산수이가 화들짝 놀라며 프리트의 가슴에서 제 손을 뗐다.

“으악! 실수예요, 실수!”

“음? 실수라기엔 아까 내 가슴 위로 손을 올릴 때부터 그대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던걸.”

“제, 제가 언제요!”

“뭘 그리 당황하고 그래, 남작. 사람이 가슴 좀 좋아할 수도 있지.”

으어으아.

아까 루헤한테 변태라고 한 거 취소.

‘진짜 변태는 나잖아!’

낯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산수이와는 다르게, 프리트는 계속해서 능숙하게 춤을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가슴 역시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는데 말이야.”

***

프리트와의 훌륭한 가슴…… 아니, 춤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산수이.

‘다음은 누구지?’

산수이는 저 멀리 울상이 된 채 찌그러져있는 얀피르를 보며 짐작했다.

‘휘온이 이겼구만.’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향해 휘온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얀피르 저자는 가위바위보 규칙을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얀피르에게 아직 가위바위보에 대한 지식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휘온 역시 완벽한 예법으로 산수이를 리드해 나갔다.

좋은 스승이기도 한 그는 산수이가 자신을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휘온. 사실 춤에는 영 자신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휘온 덕에 좀 나아진 것 같아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산수이가 해맑게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역시 휘온하고 춤을 추는 게 제일 편해요!”

순간 휘온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발끈한 그가 제 얼굴을 산수이에게 들이대며 물었다.

“……편하기만 합니까?”

“네?”

“설렘은 정말 요만큼도 없냐고요.”

“!”

없을 수가 있겠냐, 이 자식아!

‘그, 그렇게 갑자기 들이대지 말란 말이야!’

아까 프리트의 가슴에서 받은 설렘을 이제야 겨우 진정시켰는데. 이번엔 잘생긴 은발남의 공격이냐.

평소엔 젠틀하기만 하던 휘온이 갑자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자, 산수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도 전에 심장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한편, 휘온은 산수이가 자신 때문에 동요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춤을 추느라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와 숨결이 닿을 정도로 밀착해 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자꾸만 자신을 피하는 시선, 붉어진 얼굴, 쿵쾅대는 심장.

이때다 싶었던 휘온이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난 그대를 보면 항상 그런 기분입니다, 산수이.”

“무, 무슨 기분요.”

휘온이 산수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떨린다고요.”

***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얀피르와의 춤이었다.

정말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던 그는, 산수이와 휘온의 춤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녀를 향해 튀어 나갔다.

“기다렸어, 주인.”

“으응. 잘 부탁해, 얀피르…….”

가위바위보 하는 법은 잊어버린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춤추는 법은 몸이 알아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홀을 한 바퀴 채 돌기도 전에, 얀피르는 산수이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맛이 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나가자, 주인.”

그렇게 얀피르는 춤을 멈춘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산수이는 제 앞에 선 얀피르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내가 힘들어하는 게 다 티가 났나 봐. 첫 무도회라 얀피르도 엄청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바로 황실 무도회장 구석에 자리한 테라스였다.

새카만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주인, 춥겠다.”

얀피르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산수이에게 걸쳐준 뒤, 곧바로 밖으로 나가 주스 두 잔을 가져왔다.

“이번엔 술 아니니까 안심하고 마셔. 딸기주스야.”

“윽…… 고마워.”

산수이는 아까 칵테일을 마시고 비틀거렸던 자신의 추태를 떠올렸다.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녀는 얀피르와 가볍게 건배했다.

솨아아—

시원한 밤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간질였다.

“얀피르!”

“주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불렀다.

“주인 먼저 말해.”

산수이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미안했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얀피르가 웃으며 물었다.

“미안한 건 뭔지 알겠는데, 고마운 건 뭐야?”

“그냥. 드레스에 대해서 프리트나 휘온한텐 말 안 해준 것도 고맙고, 이렇게 나 챙겨주는 것도 고맙고. 또…….”

산수이는 살짝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매번 나한테 져 줘서 고마워.”

“응?”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얀피르 넌 매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잖아. 나, 그거 다 알고 있어.”

산수이가 얀피르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얀피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달빛이 어렸다.

두근—

다 알고 있었구나, 산수이도.

그의 눈에는 오늘따라 그녀가 더욱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벅차오르는 이 마음을 더 이상은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얀피르는 말없이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뜨거운 눈빛에 산수이는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그래서 얀피르의 시선을 피해, 제 손에 들린 딸기주스만 계속해서 홀짝였다.

입가에 서서히 딸기 물이 배어들자 안 그래도 붉은 그녀의 입술이 한층 더 촉촉하게 젖어들어 갔다.

얀피르는 이제 더는 참기 힘들다는 듯, 산수이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포근히 감쌌다.

“야, 얀피르?”

하지만 얀피르는 대답 대신 그윽한 눈빛으로 산수이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산수이에게는 마치 영원같이 느껴졌다.

이윽고 얀피르가 손가락을 뻗어 산수이의 얼굴을 가만히 덧그렸다. 그의 손끝이 흘러내려 입술에 가 닿았다.

그리고 마침내 얀피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인.”

“으, 응?”

“나 지금 너한테 키스해도 돼?”

“……!”

그 순간 산수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안자, 산수이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가슴 속이 아찔하게 간질거렸다.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숨결이 가까워질수록 산수이의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얀피르의 옷깃을 꽉 쥐었다.

마침내 둘의 입술이 포개지려던 순간.

갑자기 테라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 산수이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 서 있는 건,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산수이를 찾아 나선 휘온이었다.

“산수이, 여기에 있…….”

그 순간 휘온의 눈에 둘의 모습이 들어왔다.

산수이를 부둥켜안은 채 입술을 내밀고 있는 얀피르와, 손을 뻗어 그를 저지하고 있는 산수이가.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휘온이 주먹을 있는 힘껏 꽉 쥐고 얀피르에게로 달려들었다.

“내,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이 드래곤 놈, 감히 나의 산수이에게!”

얀피르 역시 갑작스런 휘온의 등장에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그가 멈칫하던 찰나, 산수이의 손이 관성의 법칙에 따라 얀피르를 뒤쪽으로 훌쩍 밀어버렸고.

“크, 크르릉……?”

달려오는 휘온의 위로 얀피르가 넘어지며.

쪽—

두 남자는 서로 하나로 포개어진 채, 테라스 바닥에서 입을 맞췄다.

“크, 크아아악?!”

“아아아아악!”

뒤에서 그 모든 대참사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산수이의 얼굴 역시 새하얗게 질렸다.

“허억.”

때마침 휘온을 뒤따라온 프리트와 루헤 역시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

얀피르와 휘온의 첫 키스는 딸기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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