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자신의 앞에 선 산수이의 드레스를 본 얀피르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변해갔다.
그런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양심에 찔리는 게 있던 터라 몸을 움찔거렸다.
“야, 얀피르?”
“주인, 이 드레스 대체 뭐야?”
“그야 네가 만들어 준…….”
“디자인이 똑같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가 큰 소리로 외치자, 주위에 있던 사용인들이 모두 놀라서 돌아보았다.
가까스로 분노를 삭인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타자.”
***
달리는 마차 안에서 얀피르는 창밖을 향해 턱을 괴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원래의 얀피르라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땐 돌리지 않고 그녀에게 바로 말했을 텐데.
‘어쩌지, 정말로 화가 많이 났나 봐.’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죄책감으로 쪼그라들었다.
“얀피르…….”
“왜.”
“미안.”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다, 마침내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그놈이 선물해준 드레스야?”
“그놈?”
“누구긴 누구야. 그 머리 긴 마족 놈 말이야.”
하여간 짐승 같은 촉이었다.
‘분명 루헤가 마법의 드레스랬는데, 어떻게 알았지.’
어차피 들킨 바에 발뺌할 생각은 없었다.
“맞아.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고?”
“응.”
“하아…….”
얀피르가 한숨 쉬며 말했다.
“냄새.”
“뭐, 뭐라고?”
“네가 입은 드레스에서 다른 놈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
옆에만 있어도 냄새로 알 수 있는 거야?
그때 갑자기 산수이의 머릿속에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 역시?’
갑자기 생리가 터졌던 날, 얀피르가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망토를 묶어줬던 것도?
중요한 때밀이 예약이 하필 그날과 겹쳤을 때, 말없이 일정을 바꿔줬던 것도?
게다가 그날만 되면 누군가 귀신같이 알고 찜질 주머니를 그녀의 방에 가져다 놓곤 했는데, 설마 그것 역시.
‘당연히 유모였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녀의 가슴속에 일렁이던 얀피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곧 고마움과 부끄러움으로 뒤범벅되어 번져나갔다.
얼굴이 딸기처럼 새빨개진 산수이를 보자, 얀피르는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어졌다.
‘에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인다고, 이 아가씨야.’
얀피르는 몸을 일으켜 산수이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곤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주인, 너한텐 항상 좋은 향기만 났어. 걱정하지 마.”
“으윽…….”
“아무튼, 이유나 좀 들어보자.”
“무슨?”
“주인 너, 나 말고도 공작이나 저하 놈한테도 드레스 받았잖아.”
“그, 그것까지 알고 있었어?”
“그럼 남작저 천장까지 박스가 쌓여있는데 모르냐?”
‘그건 그렇네.’
“근데 왜 하필 그 마족 놈이 보낸 드레스를 고른 거야?”
“그야…….”
사실은 얀피르가 준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착용감도 가장 편하고, 무엇보다 손수 만들어 준 선물이니까.
‘그치만 그 드레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본 순간, 이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마디로 그녀의 내적 영혼이 얀피르한테 삐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얀피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 산수이는 두 번째 이유를 대기로 했다.
“그야 당연하잖아. 네가 만들어 준 드레스를 입고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분명 휘온과 황태자 저하가 섭섭하게 생각할 거고, 그럼 난 또 너희 세 명 가운데 끼어서 매우 곤란…….”
“하, 내가 섭섭할 거라곤 생각 안 했고?”
“마, 마법의 드레스라 너도 몰라볼 줄 알았지!”
“하아. 이런 허접한 마법 도구로 드래곤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얀피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몸을 일으켜 제자리로 돌아갔다.
“됐다.”
그는 또다시 턱을 괴곤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산수이가 그의 옆으로 와 앉으며 얀피르의 팔에 매달렸다.
“얀피르으, 화 많이 났어? 미안해, 응?”
“나한테 왜 사과해?”
“응?”
“사실 무슨 드레스를 고르든, 그건 주인 네 자유지. 섭섭한 건 그냥 내 문제고.”
“그치만…….”
“그리고 주인 네가 자꾸 이러면, 나 헷갈리니까 이제 그만해.”
“헷갈리다니?”
그 말에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제 얼굴을 들이밀곤,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저런 설레는 질문에 잘생김이 컬래버레이션 되자, 산수이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부여잡고 대답했다.
“아, 아니?!”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얀피르는 굳어지는 제 표정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럼 미안하다는 말은 좋아하는 놈한테나 가서 해. 아니다, 그놈한테는 드레스 보내줘서 고맙다고 해야겠네.”
“뭐? 아니 대체 내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산수이의 물음에 얀피르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네가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 준 놈! 너 그 마족 놈 좋아하잖아!”
“뭐 루, 루헤를? 내가?!”
얀피르는 그의 이름조차 듣기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산수이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또다시 지끈거리는 제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아니 잠깐, 얀피르? 얘기가 왜 그렇게 돼?”
“너 그놈 돌아오기만을 목 빼고 기다리잖아. 매일같이.”
“뭐?”
몰랐다.
자신이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하고 있을 줄은.
게다가 그걸 얀피르가 눈치채고 있는 것도.
‘하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산수이는 저에게서 고개를 돌리려는 얀피르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눈을 맞췄다.
“얀피르, 오해야. 난 루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 얀피르의 눈썹이 요동쳤다.
그게 정말인가? 그 마족 놈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진짜?”
산수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루헤를 기다리는 건, 에휴. 루헤가 남작령의 온천수 고갈 원인을 알아 와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야.”
“뭐라고?”
정말, 고작, 그런 이유였단 말이야?
네가 그렇게 떠난 연인을 기다리듯 애절해 보이던 것도 결국 다 목욕탕 경영을 위해서였다고?!
“하, 하하…….”
얀피르는 이제껏 쓸데없는 오해를 했던 자신이 우스워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이래야 산수이 비덴비덴이지.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되물었다.
“그럼 주인, 네가 좋아하는 건 대체 누구야? 설마 휘온 그놈이야? 아니면 저하 놈?”
하지만 산수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얀피르. 알잖아, 내 마음속엔 온통 목욕탕 생각뿐이란 걸.”
“하지만 주인, 목욕탕이랑 연심이 어떻게 같을 수……!”
“같아.”
“뭐?”
“난, 정말 목욕탕이랑 때밀이가 너무 좋아, 얀피르. 걔들하고 결혼한 거나 다름없어.”
역시나였다.
산수이가 연애라니, 얀피르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긴 했다.
이 여자는 눈 감는 순간까지 일을 하고 있을 위인이라고.
‘여태껏 그렇게 겪어봤으면서. 하아.’
심적 허탈감에 얀피르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게다가 목욕탕이랑 결혼한 거나 다름없다고? 뭐야, 그럼 나 고작 때수건한테 진 거야?’
아니, 고작이 아니지.
저걸 대체 어떻게 이겨?!
그렇게 마차는 달려 그들은 마침내 황궁에 도착했다.
***
황궁 무도회장은 마치 제국의 모든 부를 끌어다 모아둔 듯, 눈이 부시게 화려했다.
산수이는 얀피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번쩍이는 샹들리에 아래 선 둘의 모습은 존재만으로도 빛이 났다.
하지만 함께 입장한 두 사람을 보며 수많은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두 사람, 연애 중이라던데.”
“같이 살고 있기까지 하다던데요?”
“에이, 혼인도 하지 않은 남녀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 들린다, 이놈들아.
어딜 가나 남의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저런 종류의 스캔들은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얀피르가 남작저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건 다행히 아직까진 최측근들만 알고 있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겠네.’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
갑자기 홍해가 갈라지듯, 그녀의 눈앞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자리를 비켰다.
‘응?’
그리고 저 맞은편에 보이는 것은.
황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녀에게 척척 걸어오고 있는 프리트 황태자였다.
그가 단걸음에 산수이의 앞까지 다가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참석해주어 영광이군, 산수이 남작.”
그러고는 몸을 돌려 얀피르를 힘껏 껴안으며 외쳤다.
“오-! 얀피르 후작도 왔군!”
“뭐야, 이거 안 놔?”
귀족들의 모든 눈이 프리트 황태자의 행동으로 쏠렸다.
곧이어 지금껏 주위에서 수군거리던 웅성거림이 쥐 죽은 듯 싹 사라졌다.
“크흠……! 역시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좌중을 보며, 산수이가 프리트에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저하.”
“저런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들의 말은 신경 쓰지 마, 남작.”
곧이어 프리트는 산수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드레스를 입어주었군. 역시 아름다워.”
산수이를 바라보는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프리트는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다행이야.’
하긴, 인간의 몸으로 이 드레스가 가짜라는 걸 깨달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개코여야 하는 것인가.
때마침 황태자를 찾는 부름에 프리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찰나.
곧이어 무도회장에 도착한 휘온 역시 산수이의 드레스를 보고 황홀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붉어지는 제 뺨을 손으로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산수이.”
‘으음, 휘온 역시 보통의 인간이었어.’
그때,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얀피르가 피식 웃기 시작했다.
“풉.”
이에 휘온이 빈정 상한 듯 물었다.
“왜 웃는 거지 얀피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얀피르가 왜 웃는지는 이 무도회장에서 오직 산수이만이 알 뿐이었다.
‘으으, 부끄러워!’
자신이 벌이고 있는 사기극을 눈앞에서 라이브로 관전하고 있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수치심에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역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안 돼.’
산수이는 후끈거리는 얼굴을 잠재우기 위해, 두 남자를 남겨둔 채 근처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있던 음료를 그대로 원샷했다.
“캬아-.”
하지만 그것은 주스가 아닌, 칵테일이었다.
‘으음, 왜 갑자기 천장이 도는 것 같지……?’
그녀는 산수이 영애의 몸이 타고난 알코올 쓰레기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이 세계로 넘어와선 일만 하느라 그 흔한 와인조차 입에 대지 않았었으니까.
그렇게 산수이는 밀려드는 군중 속에 휩쓸려 저 멀리 떠내려갔다.
“세상이 빙빙 도네……?”
“주인!”
“산수이!”
얀피르와 휘온이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갔지만, 그들의 목소리마저 음악 속에 묻히며 산수이는 점점 더 그들로부터 멀어져갔다.
“산수이 남작?! 제기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잖아!”
저 멀리서 이 사태를 목격한 프리트 역시 산수이를 붙잡기 위해 거칠게 인파를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남자가 사람들 틈을 지나 산수이에게 닿으려던 순간.
벌컥—
갑자기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새로운 방문객에게로 쏠렸다.
저벅.
검은색 벨벳 로브를 뒤집어쓴 그자는, 주변에 알 수 없는 한기를 내뿜으며 회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우아한 걸음 끝마다, 무도회장에 있던 참석자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윽고 그가 회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자신의 로브를 벗어 내리던 순간.
“……!”
이 세상의 것이라곤 볼 수 없는 그의 미모를 본 모든 사람들의 숨이 일순 멎어버렸다.
루헤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