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산수이는 제 방까지 옮겨진 수많은 상자 더미를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 난 몸이 한 개인데. 그날 저걸 모두 입을 수는 없다고!’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우선 손에 집히는 첫 번째 상자부터 열어보기 시작했다.
바로 프리트가 보낸 황금빛 상자였다.
바스락.
[이 제국을 전부 그대의 손에 쥐여줄 수 있지만, 우선은 가볍게 이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 프리트 폰 카데베르 -]
‘미친! 무슨 제국을 전부 나한테 줘!’
이런 사람이 황제가 되어도 정말 괜찮은 거야?
제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면 기절할 거라고 생각하며, 산수이는 그가 보낸 황금색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크림색의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가 들어있었다.
“어, 이건……?”
그것은 최근 이태리타월 수출을 준비하다 알게 된, 최고급 무역품 중 하나였다.
‘저 먼 동방의 나라에서만 구할 수 있다던, 엄청 귀한 비단이잖아!’
이 크림색 비단은 움직일 때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마치 황금빛 밀밭이 춤을 추는 듯 반짝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 비단을 구하기 위한 항로가 워낙 험난해서, 제국에선 부르는 게 값이라 불리는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랄까.
‘와, 그런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라니. 역시 황실은 다르네.’
게다가 드레스 윗부분에는 각종 크리스털과 진주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냥 한눈에 봐도 명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드레스 색상에 맞춰서 보낸 구두와 머리 장식에도 진귀한 보석들이 알알이 박혀있었다.
더군다나 이 머리 장식은.
‘티아라잖아.’
누가 봐도 나 황태자랑 결혼해요, 하는 존재감을 뽐낼 수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티아라였다.
“……기각.”
적어도 수도에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가격의 티아라를 산수이는 미련 없이 뒤로 휙 던져버렸다.
“다음.”
산수이는 이번엔 휘온이 보낸 은빛 상자를 열어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대가 필요로 하는 걸 가장 먼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 휘온 에데카나 -]
“허, 허억!”
상자를 열자마자 그 안에서 쏟아지는 광채에 산수이는 눈이 멀 지경이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푸른 드레스가 놓여있었다.
목부터 팔 끝까지는 고급 레이스로 이루어져 있었고.
푸른 비단의 벨 라인 드레스 전체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다이아몬드들이 장식되어있었다.
꼭 별 무리가 드레스 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아니, 대체 이 드레스 한 벌에 다이아몬드를 몇 개나 쓴 거야?’
원래부터 휘온이 부자인 건 알았지만 정말 엄청난 대부호였다는 사실을, 산수이는 오늘에야 다시금 실감했다.
차라락—
드레스 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수많은 다이아몬드들이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산수이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거 입고 춤추다가 다이아몬드 한 개라도 떨어트리면 어떡해?’
실로 엄청난 심적 부담감을 안겨줄 드레스였다.
게다가 구두며 장신구에도 역시나 굵은 다이아몬드가 한가득 달려 있었으니.
‘하악. 그냥 무도회고 뭐고 이거 하나만 뜯어다 팔아서 서울에 집 한 채 사고 싶…… 아니지. 정신 차려.’
흔들리는 동공을 바로 잡고 산수이는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루헤가 보낸 새빨간 상자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도회가 열리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이런 걸 보냈대?’
그렇게 루헤가 보낸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 들어있던 건.
“으응?!”
초현대적인 디자인의, 여성용 블랙 슈트였다.
“이게 뭐야?!”
게다가 재봉선도, 바지에 달린 지퍼 역시 온전히 현대에서 보던 그런 것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루헤가 어떻게 이런 디자인을 알고 보냈단 말이야?’
게다가 세트로 맞춰서 보낸 구두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신는다던 그 명품 브랜드의 제품이었고.
“키, 킬힐?!”
액세서리 역시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클러치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자신의 눈앞에 놓인 현대판 물건들을 보며 산수이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모든 걸 갖춰 입고 서 있으면 엄청나게 힙할 거 같긴 했다.
하지만.
‘나 설마 정체를 들켰나? 루헤한테?’
대체 언제? 어떻게?
역시 루헤는 마왕이라 나 같은 인간의 영혼은 단박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걸까?
그렇게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쭈욱 흐르던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유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작님, 드레스 고르시는 걸 도와드리러 왔…… 어머나!”
유모가 산수이의 손에 들린 블랙 슈트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쩜, 너무 여성스럽고 우아한 드레스네요! 저 붉은색 좀 봐!”
“붉은…… 색이요?”
“네에. 그동안 선대 주인마님의 옷시중을 평생 들어왔지만, 이렇게 색이 선명한 붉은색은 처음 봅니다. 게다가 이 드레스 끝자락에 달린 레이스 좀 보세요.”
“유모, 대체 무슨 소리예요. 여기 붉은색 드레스가 어디 있어요? 이건 검은색의 바지…….”
“역시, 남작님께서도 이 붉은색이 마음에 드신다고요?”
“유모?”
유모의 말에 당황하던 산수이는 이내 깨달았다.
‘설마 이거, 마법이 걸린 드레스인가?’
산수이는 하녀 한 명을 더 불러와 이 드레스에 대한 감상을 말하게 했다.
“와! 제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는 처음 봅니다, 남작님! 그런데 이런 흰색 드레스는 결혼식에서나 입는 것 아닌가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하녀의 말이 유모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은 나도 처음이라니까?”
드레스의 이상한 힘을 확인한 산수이는 루헤가 보낸 상자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설명서 없나?’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상자 바닥에서 루헤의 쪽지를 찾아냈다.
[나의 수이, 마법의 드레스는 눈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봐야 해요. - R -]
산수이는 무릎을 탁 쳤다.
‘각자에게 원하는 디자인으로 보이는 드레스구나!’
게다가 드레스에 대한 평론까지 제가 원하는 대로 알아서 걸러져 들리는 모양이었다.
‘루헤의 마법, 완전 상상 이상이잖아……?’
마왕의 능력을 제 눈으로 확인한 산수이는 점점 흥분되기 시작했다.
이런 마력을 가진 루헤라면,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루헤한테 맡기길 잘했어. 분명 온천수가 고갈된 원인을 찾아와 줄 거야. 그럼 이제 정말 사우나스 님의 미션을 해결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마지막 상자에 손을 뻗었다.
바로 얀피르가 보내 온 검은색 상자였다.
걱정 반, 기대 반인 마음으로 산수이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이, 이건……!”
칠흑같이 어둡고도 아름다운,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얀피르가 보내 준 건 지금까지 앞서 본 세 개의 드레스 중 가장 심플했다.
왜냐하면 이 드레스는 산수이가 늘 즐겨 입던 세신용 원피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주인 넌 그냥 평소 그대로가 제일 예뻐. - 너의 드래곤 -]
얀피르가 항상 저에게 해주던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가 보내준 드레스는 자신이 평소 즐겨 입던 디자인인 만큼 착용감이 편안했다.
게다가 드래곤의 비늘이라는 이 소재는 마치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 가벼웠다.
하지만 이 드레스는 결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산수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드래곤의 비늘이 빛에 반사되어 제각기 다른 색으로 부서졌다.
어떨 때는 푸른빛으로, 어떨 때는 보랏빛으로.
때로는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떠 있는 듯이 찬란한 빛을 쏟아내기도 했다.
마치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 그리고 새하얀 피부색처럼.
그 드레스를 보며 산수이는 다시금 생각했다.
‘완전 산수이 비덴비덴만을 위한 맞춤형 드레스네.’
산수이는 원래 세계의 자신인 안수희가 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았다.
‘으음…… 옷이 날개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마지막 드레스까지 모두 입어본 산수이는, 제 눈앞에 펼쳐져있는 네 개의 드레스를 보며 결단을 내렸다.
‘좋아, 내가 입고 갈 것은…….’
산수이가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하자.”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 전에, 꼭 확인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생겼어.”
***
얀피르는 남작저 내 온실에 쪼그려 앉아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얼마 전 산수이에게 보여주었던 그 보랏빛의 꽃들이었다.
그가 꽃을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쯤 주인이 내가 보낸 드레스를 봤겠지?”
“그래, 봤다!”
갑자기 들려오는 산수이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얀피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
산수이는 얀피르에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머리카락을 홱 낚아챘다.
“으악! 주인?”
그러고는 그의 머릿속 두피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탈모 온 건 아닌지 확인한다, 왜!”
“탈모?”
당황한 얀피르를 향해 산수이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드레스 만든다고 온몸의 비늘을 죄 잡아 뜯어 놓은 것 같으니까 그러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산수이를 마주하자, 얀피르는 저도 모르게 좋아서 웃음이 났다.
‘아 진짜. 너무 좋다니까, 너.’
그는 몸을 일으켜 산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나 비늘 별로 많이 안 뜯었어.”
“거짓말! 드레스뿐 아니라 구두랑 장갑도 네 비늘로 만들었던데. 그게 어떻게 많은 게 아니야?”
“나 몸 크잖아. 주인처럼 귀여운 사이즈의 드레스 만드는 데는 고작해야 비늘 몇 장밖에 안 들어.”
“그래도!”
“게다가 드래곤의 비늘은 꽤나 빨리 자란다고.”
얀피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그러지 마, 얀피르. 네가 아픈 거 싫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비늘을 마구잡이로 뜯어내다가 그 잘생긴 얼굴에 정말 탈모라도 오면 어떡해.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네 얼굴은 국보나 다름없어. 제발 귀하게 아끼라고!’
산수이는 그 말만은 속으로 꾹 삼켰다.
“그리고, 뭐?”
얀피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왜, 뭔데.”
얀피르가 또다시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심장이 고장 나게 생긴 산수이는, 대뇌를 거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어버렸다.
“저, 정말 이번엔 프러포즈 같은 거 아니냐고.”
그 말에 얀피르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하아…… 그게 그렇게 걱정됐어? 어떡하냐, 이번 선물엔 좀 다른 의미를 부여해뒀는데.”
“뭐?! 무슨 의미?”
프러포즈 말고 뭐? 대체 그거 말고 또 남은 게 뭐가 있지?
당황해하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바보, 농담이야.”
“진짜야? 정말 아무 의미도 없어?”
“어.”
자신의 선물이 저렇게까지 부담스러웠나?
낙심한 얀피르는 이만 돌아서려 했다.
그때 갑자기 산수이가 살며시 얀피르의 옷자락을 잡았다.
“!”
그녀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고, 고마워, 얀피르. 정말로.”
“마음에는 들어?”
“당연하지! 내가 받은 드레스 중에서 제일…… 예쁜걸.”
그 말에 놀란 얀피르가 물었다.
“어…… 그럼 무도회 날 그거 입어 줄 거야?”
산수이가 잠시간의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응.”
“진짜? 정말이야 주인?”
너무나 기뻐하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그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
무도회 당일.
산수이는 새벽부터 무도회 참석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미리 골라둔 의상을 입은 그녀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치장을 마쳤다.
“이 드레스로 고르길 잘하셨어요, 남작님.”
“그래요?”
“예, 남작님과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렇게 저택을 나선 산수이는 마차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얀피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산수이의 모습을 본 얀피르의 눈이 돌연 커졌다.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산수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얀피르의 눈에선 꿀 같은 사랑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산수이의 손을 맞잡은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