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무도회?”
발레아나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말에 프리트가 놀라 물었다.
“네, 오라버니. 무도회를 여는 거예요!”
하지만 프리트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산수이 남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과 무도회가 대체 무슨 상관이지?”
“아아, 오라버니. 이렇게 모르셔서야.”
발레아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누구시지요?”
“나 말이냐? 그야 프리트 폰 카데베르…….”
“아이 참, 그거 말고요. 오라버니의 신분이요!”
“이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지.”
“바로 그거예요! 오빠가 산수이 언니한테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그거라고요.”
“잘생겼는데, 황태자이기까지 하다는 점 말인가?”
“…….”
이렇게 본인 입으로 직접 들으니 조금 짜증이 난 발레아나였다.
‘언니가 말한 현실 남매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발레아나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거 말고, 오라버니가 황제가 되실 거라는 점이요.”
그랬다.
사실 휘온이 아무리 돈을 처발라서 날고 기어봤자, 얀피르가 제 몸을 갈아서 산수이를 도와줘봤자.
황태자, 나아가 이 제국의 황제가 될 자의 조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산수이가 원한다면 그는 지원금은 둘째 치고 제국법도 바꿔줄 수 있을 테니까.
발레아나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려는 거였다.
“가장 화려한 무도회를 열자고요. 거기서 오라버니의 위치를 확실히 보여주는 거예요! 사업밖에 모르는 언니에게 가장 필요한 건 투자와 지원이니까요.”
하지만 프리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지원이 다 무슨 소용이지? 그녀가 나의 비가 된다면, 장차 이 제국의 황후가 되어 모든 걸 가지게 될 텐데.”
“하아, 오라버니. 산수이 언니는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고요! 자기 힘으로 남작가를 다시 일으키고 싶어 하시니까요!”
이제야 프리트는 조금이나마 납득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내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산수이가 그런 여인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군.”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좋다, 발레아나. 너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지.”
그 말을 들은 발레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맡겨만 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무도회를 준비할 테니까요!”
어느새 프리트는 산수이와의 연애 문제에 있어선 전적으로 발레아나의 말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쟁터의 피 웅덩이에서만 구르던 사내에게 있어서, 여심이란 적장의 목을 베는 것보다도 더 어려웠으니까.
발레아나의 계획은 곧 제국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일전의 사건 이후 뒤늦게라도 제 아들딸에게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할애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발레아나의 계획을 모두 들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은 짐 역시도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분명 발레아나 너에게도 좋은 가족이 되어주겠지.”
그 말에 프리트 역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며느리라니.
앞서나가도 너무나 앞서나가는 그들을 보며 발레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황제의 말이 그녀를 더 큰 충격에 빠트렸다.
“안 그래도 슬슬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아바마마?!”
“이참에 무도회에서 프리트 너의 황위 계승에 대해 선포하도록 하겠다. 아마 비덴비덴 남작이 보기에도, 이 제국에서 내 아들보다 더 매력적인 신랑감은 없을 것이야.”
이렇게 산수이가 모르는 사이 시월드…… 아니, 시댁 후보에서는 그녀를 황실의 며느리로 들이기 위한 작당 모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한편, 산수이는 그저 오매불망 루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그렇게 산수이는 매일같이 창문에 붙어서 먼발치만 바라봤다.
이를 지켜보는 건 얀피르에게 있어선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떠나간 임을 그리는 듯한 애절한 표정의 산수이를 바라보며, 그의 심장은 매일같이 파사삭 말라비틀어져 갔다.
‘주인 너 정말 그 마족 놈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그렇게 얀피르의 오해가 깊어지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유모가 서신 한 통을 들고 산수이를 찾아왔다.
“남작님, 황궁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황궁에서?”
산수이는 제 손에 들린 황금빛 편지 봉투를 가볍게 툭 뜯어보았다.
‘무도회?’
그것은 프리트 황태자가 페니아 왕국을 점령한 것을 치하한다는 명분의 황실 무도회였다.
“그 일이 있은 지가 대체 언젠데, 이제 와서?”
좀 뜬금없는 타이밍이라 생각되긴 했지만, 산수이는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랜만에 가서 기분전환이나 하고 올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무도회엔 대체 뭘 입고 가야 되는 거야?”
그간 목욕탕 경영에만 열중하느라 수도의 최신 유행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데다가.
세신하기 편한 옷들 위주로만 구매하다 보니 정작 이런 자리에 입고 갈 마땅한 드레스가 없었던 것이다.
산수이는 제 옷장을 벌컥 열어 그곳에 걸려있는 옷들을 죄다 살펴보았다.
프릴 없고 폭이 좁은 원피스, 세신용 반바지, 얼마 전에 새로 개발한 추리닝 스타일의 작업복…….
“으악.”
아무리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산수이라 해도, 황궁 무도회에 이런 옷을 입고가면 안 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으음, 어쩌지. 발레아나에게 연락해서 같이 쇼핑을 가자고 해볼까?’
하지만 그랬다간 분명 황실의 전속 디자이너까지 붙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니면, 휘온?’
이 제국 내에서 옷 잘 입기로는 휘온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말을 산수이 역시 들은 바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방문 쪽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들어오세요.”
유모인가?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얀피르였다.
“주인, 바빠?”
황궁에서 온 서신을 손에 든 채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서던 얀피르는, 난장판이 된 그녀의 방을 보곤 사색이 되었다.
옷장과 서랍장은 모두 활짝 열린 채 텅텅 비어있었고, 각종 옷가지며 장신구들이 사방에 널려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얼빠진 듯 서 있는 산수이까지.
“주인!”
얀피르는 재빨리 산수이에게 달려와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아? 안 다쳤어?”
그 덕분에 지금껏 둘 사이에 흐르던 불편한 공기가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었다.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활짝 웃었다.
“얀피르, 난 괜찮아. 그리고 도둑 든 거 아니야.”
“그럼 대체 방이 왜 이 모양이야?”
“으으, 그건…….”
산수이가 수줍게 말했다.
“너도 받았지? 황실에서 온 편지.”
얀피르가 손에 들린 서신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말하는 거지?”
“응. 그런데 거기 딱히 입고 갈 옷이 없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유행을 잘 모르잖아.”
산수이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주인, 넌 지금 모습 그대로 가도 충분한데 왜?”
“야, 비행기 그만 태워. 어지럽다.”
“비행기?”
아차, 또 습관적으로 원래 세계의 언어를 사용해 버렸다.
‘조심하자 좀!’
산수이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조, 좋은 생각이 났다! 얀피르, 나랑 같이 수도에 가지 않을래?”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 사게?”
“응. 그리고 네 옷도 함께 사고.”
“난 필요 없는데. 대충 아무거나 입어도 돼.”
“야아, 아무리 그래도. 첫 무도회인데!”
“난 됐으니까, 주인 네 옷이나 사러 가자.”
얀피르의 저 잘생긴 얼굴에 의상까지 제대로 갖춰 입혀 놓으면 정말 볼만할 텐데.
그렇게 아쉬움에 입이 삐죽 나온 산수이였지만, 얀피르는 도통 자신을 위한 쇼핑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주인? 수도에 의상실이 한두 개가 아니던데.”
“으음. 그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서, 휘온한테 들러 물어볼까 했어. 휘온이 또 이런 쪽엔 빠삭하…….”
“뭐, 휘온?!”
얀피르가 그르렁대며 말했다.
“그놈은 됐어, 주인. 그럴 거면 나한테 맡겨 줘.”
“뭘?”
“네가 입을 드레스 말이야.”
얀피르가 제 가슴을 탁탁 치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내가 만들어 줄게.”
“뭐어?!”
산수이가 놀라 소리쳤다.
“얀피르, 너 재봉도 할 줄 알아?”
“아니? 모르는데?”
“그럼 드레스를 어떻게 만든다는 거야?”
“그야 마법으로.”
얀피르가 산수이의 목에 걸린 검은 구슬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도 마법으로 만든 건데?”
“흐응…….”
산수이가 그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안에 담긴 뜻을 파악한 얀피르가 허탈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번엔 프러포즈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진짜지?”
“주인, 나 못 믿어?”
사실 얀피르가 만들어준 목걸이는 엄청 그녀의 취향이긴 했다.
‘드레스도 잘 만들 거 같긴 한데…….’
그래서 산수이는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그럼 부탁할게.”
얀피르가 기쁜 듯 웃었다.
“잘 생각했어, 주인. 휘온 놈보다야 내 센스가 더 낫지.”
그러고는 산수이에게 다가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야, 얀피르? 갑자기 왜 밑도 끝도 없이 끌어안는데?”
“옷을 만들려면 치수를 재야 하니까 잠깐만 이렇게 나한테 안겨있어 봐. 금방 끝낼…… 아야.”
산수이는 얀피르의 등짝을 냅다 후려쳤다.
“하여간 조금만 방심했다 하면!”
“아니 그럼 어떻게 해! 치수를 알아야 옷을 만들지!”
“가서 유모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아니, 그래도 직접 안고 재보는 게 제일 정확…… 아야.”
등짝을 호되게 맞은 얀피르는 구시렁거리며 방을 나섰다.
“저 짐승 진짜. 어떻게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내심, 얀피르가 어떤 드레스를 가져다줄지 기대가 되는 산수이였다.
***
며칠 후.
유모의 부름에 1층 로비로 향한 산수이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로비 전체가 온갖 상자 더미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유모를 향해 물었다.
“유모, 우리가 어제 시장에서 식료품을 이렇게나 많이 주문했던가요?”
“아유, 우리 남작님. 그게 아니에요. 이건 다 남작님 앞으로 온 선물들이랍니다!”
“선…… 물?”
“예, 그렇다니까요? 우선, 이건 황태자 저하로부터 온 거고요!”
유모가 커다란 황금빛 상자를 산수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상자 한가운데에는 카데베르 제국 황실의 사자 문양이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그리고 이건 에데카나 공작님께서 보내신 선물이고.”
그다음은 백호의 문양이 새겨진, 휘온의 머리칼을 연상시키는 밝은 은빛의 상자였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루헤라는 그 새로운 고객님으로부터 온 것 같고요.”
루헤의 적안을 연상시키는 새빨간 상자에는 거대한 뿔이 양옆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모가 산수이에게 검은색의 커다란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건 얀피르 후작님께서 전해주라 하셨습니다.”
산수이는 어안이 벙벙한 채 제 눈앞의 상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색상별로 크기별로, 종류도 참 다양했을뿐더러.
맨 위에 놓인 상자 앞에는 각각의 발신자가 자필로 쓴 편지까지 붙어있었다.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게 모두, 이번 황실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란 말이지……?”
제 눈앞에 놓인 네 가지 색의 선물 상자.
그녀는 이 중에서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