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남작저의 사용인 휴게실.
이곳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유모와 집사의 산수이 남편 투표가 계속되고 있었다.
최근 눈부신 미모의 새 남편 후보가 등장하면서, 투표의 열기는 더욱더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유모가 먼저 집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등장하신 그분 말입니다. 정말 천사 같지 않습니까? 분명, 성품도 얼굴처럼 곱고 온화하실 거예요.”
“유모 말씀대로 꼭 명화 속에 그려진 성인과 같은 청년이더군요. 하지만 아직 우리가 그분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가령…….”
집사가 모노클을 빛내며 덧붙였다.
“그분의 직업이나 신분 말이죠.”
하지만 그의 말에 유모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유, 그리 착하게 생기신 분이 뭐 나쁜 일이라도 하시겠어요? 게다가 그분이 입고 계신 옷들을 좀 보세요. 이 제국에선 본 적 없는 귀한 것들이라고요. 분명 어디 머나먼 외국의 귀족이신 게 틀림없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혹시 압니까? 그분이 겉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위험한 곳에 몸을 담고 계실지.”
원래 암흑가에서도 꽃같이 고운 건 보스들인 경우가 많지 않나.
집사는 계속해서 의심을 거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휴, 집사님도 참. 루헤 그분의 청순가련한 얼굴을 좀 떠올려 보세요. 어디 그러실 분으로 보인답니까?”
유모의 단호한 말에 결국 집사 역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우리 산수이 남작님께서 알아서 사람을 가려 사귀시겠지요. 저는 그저 주인님의 판단력을 믿겠습니다.”
“하아. 우리 남작님께서는 대체 누구를 배필로 삼으시려나? 네 분 다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데 말이에요.”
대체 그 네 남자 중 누가 우리 남작님의 짝이 될까?
두 사람은 오늘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끝나지 않을 고민에 빠져있었다.
***
VVIP 때밀이실 안.
산수이가 루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루헤, 제 소원은요.”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비덴비덴 남작령에 온천수가 고갈된 원인을 알고 싶어요!”
아마도 사우나스가 그녀에게 바란 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남작령 온천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하라는 것.
제국 땅의 모든 학자들이 연구해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이제 대륙 최강의 마법사인 대마왕의 손을 빌려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산수이의 소원을 들은 루헤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뭐라고요? 정말로 그게 수이의 소원인가요?”
“네, 맞아요.”
예상치 못한 소원에 루헤는 크게 당황했다.
‘이건 예상외네요.’
보통 인간들이 마족에게 바라는 소원이야 뻔했다.
권력과 부, 명예. 혹은 영원한 젊음이나 영생.
물론 산수이가 그런 뻔하디뻔한 인간들과 다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이유가 뭐죠?”
산수이의 소원은 루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남작령을 발전시키고 싶은 거라면, 좀 더 구체적인 소원을 빌어도 좋았을 텐데.
가령, 영지의 재산을 더 늘려달라거나, 영토의 크기를 넓혀달라거나 하는 형태로 말이다.
산수이가 루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끝나지 않는다?”
루헤의 질문에 산수이가 서둘러 덧붙였다.
“돌아가신 남작님…… 아니, 부모님의 유지를 잇는 일 말이에요.”
“흐음…….”
뭔가 미심쩍다는 것을 느낀 루헤였다.
하지만 산수이가 하는 말에는 모순점이 하나도 없었다.
‘작고한 부모 때문이었나요? 수이가 이렇게 목욕탕 경영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어쨌든.
산수이가 루헤에게 바란 소원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요, 수이. 그대의 소원을 들어줄게요.”
“정말요? 정말 그게 가능한 거예요?”
“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해요.”
이 남작령 전체를 마력으로 훑어보려면, 아무리 마왕인 그라도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요! 원인을 알 수 있기만 한다면……. 아, 정말 고마워요, 루헤!”
산수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루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커헉. 루헤와 닿기만 해도 또다시 코에 피가 쏠리는 것 같아!’
그런 산수이의 상태를 눈치챈 루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더 피를 흘리면, 인간은 죽을 수도 있어요. 수이.”
“코, 코피 안 흘려요!”
“네에, 알겠어요.”
루헤가 웃으며 생각했다.
‘자꾸 이렇게 코피를 흘리면 나도 곤란하다고요, 수이. 앞으로 나랑 더한 걸 할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은 속으로만 삼킨 채, 루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수이 차례네요?”
“제 차례요?”
루헤는 산수이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그래서, 수이의 취향은 넷 중 누구죠?”
그가 싱긋 웃었다.
***
루헤가 말한 네 명의 후보 중 하나만 골라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네 명 다 잘생겼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자니 너무 부끄러웠다.
절대 네 명 다 자기 취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주,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에요!”
“흐응…… 정말이에요, 수이?”
아 이런, 전혀 안 믿는 눈치잖아!
그때 문득, 산수이는 이전에 프리트에게 지껄였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맞아, 그게 있었지!’
그래서 얼른 서둘러 그 말을 내뱉어버렸다.
“정말이에요. 제 이상형은 조신한 남자니까요!”
“조신…… 남?”
물론 딱히 이상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말을 맞추자.’
한편 자신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루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 그러니까, 얼굴만 가지곤 안 된다는 소리네요?’
어쩐지.
그래서 자신의 치명적인 모습을 보고도 여태껏 그녀가 넘어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네요.’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다르게, 루헤는 산수이를 향해 그저 청아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산수이는 루헤를 배웅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영지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시일이 걸릴 터였다.
“그럼 잘 부탁해요, 루헤.”
기대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루헤는 또다시 궁금해졌다.
‘온천수 고갈 원인 따위를 궁금해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마왕인 자신에게 그녀가 금은보화도 마다한 채 바랐던 저 괴상한 소원.
그 이유가 무엇이든, 조만간 알 수 있을 터였다.
루헤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산수이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루, 루헤?!”
그는 품 안에서 고동치는 산수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까지도 고민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또 그놈들이 수이에게 들이대겠죠? 당신에게 미혹술을 걸어놓고 가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산수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없는 동안 다른 놈들 얼굴은 보지 말아요, 수이.”
“예?”
루헤는 산수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검은 연기가 되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산수이는 방금 전 입맞춤을 받은 제 이마를 연신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어……? 이제 코피 안 난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이제 산수이는 몽마인 루헤와 몸이 닿아도 코피를 쏟지 않을 수 있는, 탈인간적인 정신력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저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얀피르의 머릿속엔 오해의 꽃이 자라나고 있었다.
“……!”
루헤가 산수이를 ‘수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볼에는 묘한 홍조가 돌았다.
그런데 산수이가 그를 직접 배웅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둘이 끌어안고 이마에 입까지 맞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산수이가 루헤를 바라볼 때의 표정이었다.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저 간절한 눈빛.
저것은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걸 의미하지 않나.
얀피르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 마왕 놈을 따라가 찢어 죽이고 싶었다.
물론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얀피르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본체로 변신하기도 전에, 저자의 손에 되레 죽고 말겠지.
하지만 설령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차마 그럴 순 없을 것이었다.
‘산수이가 정말로 저놈을 선택한 거라면.’
그럼 자신에게 저자를 죽일 권리 같은 건 없었다.
분명 그녀가 슬퍼할 테니까.
얀피르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혼자 중얼거렸다.
“보내줘야 하나…….”
하지만 대체 어떻게.
너를 향한 이 감정을 어떻게 멈출 수가 있겠어.
널 만난 이후론, 오직 이 눈과 마음에 너만 담으면서 살았는데.
그렇게 혼자만의 오해 속에 빠진 얀피르는 열심히 삽질을 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
카데베르 제국의 황궁.
심각한 표정의 프리트가 누군가의 방문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며, 그 안에서 발레아나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그녀가 활짝 웃으며 프리트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지만 발레아나는 곧 제 오라버니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말았다.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 있으세요? 설마 또 산수이 언니한테 들이대셨다 까이신 건 아니죠?”
“아니다!”
“그러면 왜…….”
뭔진 몰라도,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오라버니.”
프리트는 발레아나에게 지금껏 남작령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것은 발레아나 역시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휘온 공작, 얀피르 후작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경쟁자가 하나 더 늘었다니!
게다가 그자의 정체는.
“그러니까, 그자가 정말로 마왕이란 말씀이시지요?”
“그렇다.”
“마왕이 인간계로 넘어온 것은 명백히 조약을 깬 것. 어서 폐하께 알려드려야……!”
“아니, 그자는 조약을 깨지 않았다.”
프리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인간계로 넘어온 후, 단 한 건의 살생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자신이 휘온, 얀피르를 끌고 그자를 조지러 갔었지.
물론 루헤에게 정말로 작정하고 덤볐다면 차가운 시신이 되는 건 그들 세 남자였겠지만 말이다.
고뇌에 빠져있는 프리트를 향해 발레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오라버니?”
“나도 모르겠다. 후…… 전쟁이나 정치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여심일 줄은.”
깊은 한숨을 내쉬던 프리트는 결국 발레아나에게 제 진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발레아나,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흐음…….”
발레아나 역시 고민에 빠졌다.
‘언니는 연애나 결혼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어. 그러니 결국 언니에게 점수를 따려면 휘온 오빠처럼 언니 사업을 도와줘야 하는데. 아니면 얀피르 후작처럼 언니 옆에 사시사철 붙어서 보좌해 주거나.’
그럼 대체 제 오라비는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발레아나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프리트를 바라보았다.
허구한 날 황태자비로 앉히겠다는 소리나 하지, 진정 산수이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산수이는 결코 황후의 자리에 앉는다고 행복해할 사람이 아닌데.
‘울 오빠의 매력, 장점, 대체 뭐가 있…… 아!’
발레아나는 왜 자신이 여태 그걸 잊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땅에서, 오로지 프리트 한 사람만이 어필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지 않은가.
“오라버니.”
“그래, 발레아나! 묘안이 있는 거냐?”
발레아나가 프리트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도회를…… 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