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제국의 황후가, 황제의 곁에서 행복해 보였느냐고?’
헤슬리히 국왕의 질문을 들은 산수이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사이좋은 남매도 존재하긴 하는구나?’
정략결혼 때문에 타국 땅에 살게 된 쌍둥이 여동생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산수이는 일전에 발레아나와 함께 오빠란 놈들의 무쓸모에 대해 논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어 서로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발레아나와 프리트의 표정 역시 연달아 떠올랐다.
‘그치, 그게 보통의 남매지. 황후 마마께서는 자상한 오빠를 두셨네.’
산수이가 미소 지으며 헤슬리히에게 답했다.
“예, 전하. 황후마마께서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헤슬리히의 얼굴에선 어쩐지 모를 쓸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를 눈치챈 산수이가 서둘러 말을 얹었다.
“황후마마가 많이 걱정되시나 봅니다, 전하.”
“당연히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슐레히트에게선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프리트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발레아나 공주에 대해 뭐라고 답했더라?
분명.
[발레아나? 귀찮지. 매일같이 징그럽게 안겨드는데 아주 미치겠다고.]
이런게 일반적인 반응 아닌가?
‘오빠는 둘째 치고 가족이 없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어.
산수이는 이 의미 없는 대화를 그만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헤슬리히의 때를 벅벅 밀었다.
“황후마마께서는 황제 폐하와 아주 금실이 좋아 보이셨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걱정하실 일은 하나도 없으십…….”
그때였다.
갑자기 산수이를 돌아본 헤슬리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금실이 좋았다고요? 대체 어떤 연유에서 그렇게 보신 겁니까, 남작 영애님?”
뭐야 왜 저래?
자기 여동생이 타국에서도 사랑받으며 잘산다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세상 다 산 거 같은 표정을 짓냐고.
‘설마?’
하지만 산수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헤슬리히가 먼저 말을 이었다.
“……영애의 눈에는 그녀가 황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헤슬리히의 눈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산수이의 머리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저 두 사람, 남매가 아닌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럼 그때 언급했던 여인도?’
산수이는 일전에 바나나 정원에서 헤슬리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그녀와 함께 이곳으로 와서 나눠 먹곤 했었죠.]
그렇게 말하며 바나나 나무를 쓸쓸히 바라보던 그의 표정도.
그 모든 것이, 제국의 황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산수이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순한 스캔들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여태껏 황제 폐하와, 제국 전체를 속여온 거야?’
그때 문득 또 다른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한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산수이가 서둘러 헤슬리히에게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두 분께서는 서로를 매우 사랑하고 계시던걸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황후마마께옵서 연신 배를 어루만지시는 것으로 짐작건대, 회임하신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헤슬리히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녀가 회임했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헤슬리히의 표정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듯했다. 황후의 회임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는 듯한 상반된 태도였다.
산수이는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예리하게 잡아냈다.
‘뭐야? 아까까진 그렇게 화를 내더니, 지금은 또 웃고 있어……?’
하지만 헤슬리히는 산수이의 앞에 서 제 입꼬리가 연신 올라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승리감에 빠져있었다.
‘그랬군. 그녀가 또다시 회임을 했어……!’
순간 그의 눈이 산수이와 마주쳤다.
헤슬리히는 서둘러 제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산수이는 이미 그 입가의 미소를 목격한 후였다.
산수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황후의 회임은 사실 나의 추측이었을 뿐, 제국에서 공표된 사실도 아니야. 그런데 지금 헤슬리히 국왕의 태도는, 마치 황후마마께서 임신할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보여.’
산수이가 헤슬리히의 등을 다시금 부드럽게 밀어주며 되물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표정이 매우 밝아 보이십니다. 조카가 태어나는 것이 기쁘신가 봅니다.”
“조카? 그 아이들은 모두…….”
순간 헤슬리히의 동공이 커지더니, 그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조, 조카지요. 그래, 사랑스러운 조카가 태어나는 데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산수이는 그 묻혀버린 말 너머의 진실을 눈치채고 난 후였다.
‘설마, 정말로?’
산수이의 손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두 사람, 정말로 남매지간이 아니었나 봐……!’
순간 자신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산수이가 서둘러 제 놀란 표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헤슬리히와 눈이 마주친 후였다.
***
헤슬리히 국왕은 본디 페니아 왕실의 쌍둥이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어린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자신의 딸을 통해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던 페니아의 선왕은 큰 혼란에 빠졌다.
결국 그는 비슷한 외모를 가진 양녀를 들여 왕실의 핏줄이라 속였다.
하지만 그 양녀는 페니아의 왕자, 헤슬리히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왕은 크게 진노했고, 결국 제국과의 국혼을 앞당기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어린 헤슬리히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뭐? 이벨린을 바로 제국에 보내시겠다 했다고?!”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제 아버지인 선왕에게 달려갔다.
“아바바마, 왜 이리 서두르시는 것입니까. 이벨린은 아직 어리…….”
하지만 선왕은 단호했다.
“닥쳐라, 헤슬리히. 내 너와 이벨린의 사이를 모르는 줄 알았더냐?”
“……!”
헤슬리히는 놀라 비틀거렸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렇게나 힘들게 자신들의 사랑을 숨겨왔는데.
선왕은 헤슬리히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다.
“당장 목이 잘리느니, 늙은 황제의 둘째 부인 자리가 그 아이에게도 낫지 않겠느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묻느냐! 감히 천한 핏줄이 우리 왕실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유혹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목숨으로 죗값을 치러야 할 터! 하지만 이렇게라도 고국을 위해 몸을 바칠 수 있게 되었으니 영광된 일 아니겠어!”
“아바마마!”
이젠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헤슬리히는, 그날 밤 몰래 그녀를 찾아가 속삭였다.
“이벨린, 우리 도망가자.”
그렇게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몰래 궁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국왕이 보낸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날 며칠에 걸친 추격전이 이어졌지만 어린 두 사람의 힘으로 그들을 따돌리기란 역부족이었다.
결국 궁지에 몰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그녀가 헤슬리히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헤슬리히, 우린 결국 붙잡히게 될 거야.”
“그렇지 않아! 우린 반드시 국경을 넘을 수 있어. 나를 믿고 조금만 더 버텨 줘, 응?”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제국으로 팔려 가야 하는 거라면, 부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기억만이라도 가지고 가게 해줘.”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안아줘, 헤슬리히.”
“이벨린, 너……!”
“사랑해, 헤슬리히. 제국 황제의 아내가 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건 영원히 너뿐이야.”
사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결코 제 아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걸.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그녀와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밤, 그들은 정을 나눴다.
며칠간 두 사람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꿈같은 나날들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국왕의 추격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헤슬리히의 아이를 임신한 후였다.
이듬달, 제국으로 팔려 가는 그녀를 보며 헤슬리히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생이별을 하게 된 두 연인은 다짐했다. 만일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를 제국의 황제로 만들자고.
그렇게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모든 이들에게 복수한 후, 다시 만나 여생을 함께 살아가자고.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자 그들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꿈이 이뤄질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는 황태자도 되지 못한 채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 아이가 바로 프리트 황태자의 동생, 제국의 2황자였다.
***
한편 마사지 베드 위에 엎드려있던 헤슬리히는 아까 제가 내뱉은 실언 때문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기랄,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2황자가 사실은 제국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는 그 엄청난 비밀.
그 사실을 하마터면 타인의 앞에서 내뱉을 뻔했다니. 그토록 매사에 신중을 기하며 살아온 제가?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산수이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들켜버린 것이다.
“너……?”
산수이는 서둘러 시선을 피한 뒤 태연한 척 다시 그의 때를 밀려 했지만, 헤슬리히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저, 전하?!”
콰당-!
그가 산수이를 마사지 베드 위에 거칠게 눕힌 뒤 물었다.
“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네년의 정체는 마녀인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잡아뗄 생각하지 마라. 네가 때를 밀어준 다음부터, 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니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거 놓으시고……!”
“너, 이미 다 눈치챘지 않느냐?”
“예……?”
헤슬리히는 천천히 산수이의 표정을 살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산수이의 가슴이 요동쳤다.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가 헤슬리히 국왕과 제국 황후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산수이는 짐짓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제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한 헤슬리히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다 알아버린 건가.”
그가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만…… 하는 수 없지. 다 들켜버린 이상, 죽여버리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헤슬리히는 산수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커, 커헉!”
산수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의 손 아래에서 파랗게 질려갔다.
그때였다.
번쩍-!
갑자기 헤슬리히의 눈앞이 일순 새하얗게 빛나더니, 이내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