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산수이는 제 짐 속에서 고운 비단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비단 안에 들어 있던 건, 그녀가 만든 이태리타월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최고급 제품이었다.
‘이 때밀이에 바나나우유가 달려있다……!’
산수이는 이태리타월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헤슬리히 국왕의 때를 밀기 위해 페니아의 왕궁 목욕탕으로 향했다.
제국 황실의 것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페니아 왕궁의 목욕탕은 실로 장관이었다. 페니아 특유의 색감을 자랑하는 타일들로 온 천지가 장식되어 있었으니까.
이렇게 또다시 타국의 왕족 전용 목욕탕에 들어와 있자니, 산수이는 일전에 제국 황실의 목욕탕에서 프리트의 때를 밀어주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갑작스럽게 청혼받고 엄청나게 당황했었지.’
들이대는 거야 얀피르한테 매일같이 겪어와서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런 불도저 같은 남자는 또 처음이었다.
다짜고짜 처음 만난 날 그저 때 한번 밀렸다고 저와 결혼해달라니.
도대체 이 산수이 영애의 육신은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이리도 자신을 죄 많은 여자로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어느새 페니아 왕궁의 시녀들이 산수이에게 다가왔다.
“전하께서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영애님.”
이제 정말로 이 나라 국왕의 때를 밀어줄 시간이 온 것이었다.
산수이는 시녀들을 따라 목욕탕 내부에 딸린 마사지실로 들어갔다.
곧 하반신을 가린 채 마사지 베드에 엎드려 산수이를 기다리고 있는 헤슬리히 국왕이 보였다.
시녀들은 제 주인인 국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가 도착하였습니다, 전하-.”
산수이 역시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전하, 분부 받들기 위해 왔나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작 영애님.”
이어서 헤슬리히는 시녀들을 향해 명령했다.
“너희들은 그만 나가보도록. 때밀이가 끝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조치하라.”
“예, 전하.”
시녀들은 방 안에 산수이와 국왕만을 남겨놓고 모두 물러갔다.
손에 이태리타월을 칭칭 둘러 감고 있는 산수이에게 헤슬리히가 입을 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 영애님. 어제의 바나나 뇌물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군요.”
그러면서 헤슬리히는 그녀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산수이 역시 헤슬리히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이런 부탁은 몇 번이라도 들어드릴 수 있답니다, 전하.”
그 말을 들은 헤슬리히의 표정이 순간 묘하게 변했다. 그는 또다시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산수이에게 말했다.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영애님.”
순간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진 낯선 표정에 위화감을 느낀 산수이였지만, 곧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럼 전하, 때밀이를 시작하겠습니다. 도중에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산수이는 헤슬리히의 구릿빛 피부 위에 제 손을 얹어 때를 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신없이 헤슬리히의 때를 밀고 있던 찰나, 그는 산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목침 아래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
산수이가 페니아 왕국의 사절단으로 선발되기 며칠 전.
제국의 황후는 황제에게 아뢰어 자신의 고국 페니아가 이태리타월을 교역하길 희망하니 산수이 남작 영애를 사절단에 포함해 달라 부탁했다.
“폐하, 제 오라비가 페니아 왕국에도 이태리타월을 유통하고 싶다 간청하였습니다. 그 제품의 원개발자인 비덴비덴 남작가의 영애를 이번 사절단에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소, 황후? 게다가 페니아 측에서 이태리타월을 수입하여 준다면 분명 우리 제국에서도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터.”
워낙 제국 내에서 그 이름이 유명했던 산수이와 이태리타월이었던지라, 황후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황제의 허가를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새벽, 황후는 페니아 왕국에 있는 제 오라버니에게 전령구를 날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헤슬리히는 제 방 창문을 향해 날아든 전령구의 발에 묶여있던 편지를 빠르게 낚아챘다. 이 순간을 위해 새벽에도 취침에 들지 않고 있던 그였다.
그는 전령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빠르게 쪽지를 읽어나갔다.
곧 그의 얼굴이 환희와 고통으로 얼룩지며 일그러졌다.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표정의 그가 손에 들린 편지를 꽉 쥐어 구겨버리며 중얼거렸다.
“프리트가 마음에 둔 영애라. 뉘 집 여식인지 참으로 가엾구나. 정인 한번 잘못 뒀다가 골로 가게 생겼으니.”
헤슬리히는 제 입으로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제 손에 들린 쪽지를 타들어 가는 양초 심지 끝에 대어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헤슬리히 국왕과 그의 누이인 제국의 황후가 준비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프리트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국의 2황자를 죽음에 몰아넣었던 장본인에 대한 복수.
하지만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과하도록 비틀린 애정이라는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게 헤슬리히는 핏빛 웃음을 지으며, 제국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계획해 놓았다.
열대기후의 페니아에는 제국에선 자라지 않는 수많은 식물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아 오로지 페니아의 왕족만이 알고 있는 특수한 약초들도 있었다.
헤슬리히가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수면제였다.
단순히 잠이 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수면제를 복용하던 전후 상황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게 만드는 강력한 성분의 약초였다.
헤슬리히와 황후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
헤슬리히는 자신의 때를 밀고 있는 산수이에게 강제로 수면제를 먹일 생각이었다. 이후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헤슬리히의 침소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었다.
산수이와 헤슬리히 국왕 사이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절단으로 파견된 자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녀가 이웃 나라 국왕과 함께 침소에 들었다는 소문이 돌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이었다.
그렇게 되면 산수이는 헤슬리히의 첩실이 되어 다시는 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될 테니.
‘물론 그 영애는 아무도 찾지 않는 첨탑에 처박혀 홀로 쓸쓸히 여생을 보내게 되겠지만. 그때 프리트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데?’
헤슬리히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가 태워버린 편지의 검은 잿가루만이 계속해서 공중에 흩날렸다.
***
헤슬리히는 목침 밑에 몰래 감춰둔 수면제를 꺼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산수이가 자신의 때를 미느라 방심하고 있는 사이, 뒤에서 그녀를 붙잡아 수면제 가루를 입 안에 강제로 털어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이 영애가 가진 때밀이의 능력.
그녀의 이태리타월이 자신의 몸에 닿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지,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준비한 음모보다도 더욱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결말을 불러올 터였다.
마침내 수면제가 헤슬리히의 손끝에 닿으려던 찰나, 갑자기 그는 제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을 억압하던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듯한 기분, 그리고…….
제 마음속에 숨겨둔 위험한 비밀들을 산수이에게 줄줄이 꺼내놓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
그래도 안전할 것만 같은 환각에 빠진 상태.
‘뭐지, 이 기분은……?’
그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의아함을 느꼈다.
수면제 봉지를 쥐었던 헤슬리히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려갔다.
마침내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나른해진 그가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남작 영애께서는…… 연모하는 이가 있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때를 밀던 산수이의 손이 멈칫했다.
근래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그녀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단연코 연모 아니면 사랑, 청혼, 그리고 고백 따위의 단어일 것이었다.
‘아니 제국에서부터 왜 이렇게 다들 같은 주제만 입에 올리는 거야?’
아마도 헤슬리히가 때를 밀리며 털어놓으려는 고민이 연애에 관한 것인가 보다 하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하긴. 저런 미남에, 한 나라의 국왕인데 아직도 결혼을 안 했다는 게 의외이긴 했어. 도대체 어떤 분을 마음에 두고 있으시길래?’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전담 시녀? 이미 남의 여인이 된 귀족 가문 영애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것도 아니면…… 혹시 사내인가?’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산수이가 서둘러 입을 열어 헤슬리히의 질문에 답했다.
“딱히 연모하는 이는 없습니다.”
“연모하는 이가 없다?”
“그렇습니다. 제 마음이 향해있는 곳은 오로지 때밀이뿐입니다, 전하.”
그 말을 들은 헤슬리히가 속으로 생각했다.
‘프리트 황태자와의 관계는 비밀에 부칠 생각인가 보군.’
어차피 산수이의 마음이야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프리트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런 헤슬리히를 향해 이번에는 산수이가 질문했다.
“그러는 전하께옵서는, 국모의 자리에 염두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으신지요?”
“페니아 국모의 자리라면.”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답했다.
“……없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헤슬리히의 말에 산수이는 조금 놀랐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결혼해서 후사를 보는 것이 의무인 세상 아니었던가?
그때 갑자기 헤슬리히가 산수이에게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영애님께서는 이곳에 당도하시기 전, 사절단 파견 예식에도 참석하셨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제국의 황후도 만나보셨겠군요.”
‘갑자기 웬 황후?’
아 맞다, 제국의 황후는 헤슬리히 국왕의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이라고 했지.
“예, 만나뵈었습니다.”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두 사람이 남매지간인 만큼, 더더욱 신중하게 답해야겠다고 생각한 산수이였다.
“소문대로 무척 아름다운 분이시던걸요? 매력적이시고, 기품 또한 흘러넘치시고.”
하지만 헤슬리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걸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제 누이의 표정이 어떻던가 하는 것입니다.”
“표정…… 이요?”
의아해하는 산수이에게, 헤슬리히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제국 황제의 옆에서 행복해 보이던가요?”
그렇게 묻는 헤슬리히의 표정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