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카데베르 제국의 정기 회의가 열리는 대형 회의실 안.
회의 시작 시각이 거의 다 되었지만, 여전히 황태자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를 기다리다 지친 고위 귀족들은 연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거나 길게 하품을 했다.
제 아들의 빈 자리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항상 전쟁터에 나가느라 정기 회의에 불참하던 제 아들의 이미지를 이렇게나마 좀 개선해줄까 했는데, 이 망할 자식은 오늘도 역시 얼굴을 비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황태자 저하는 대체 언제 오시는 겁니까?”
“오시기는 한답니까?”
귀족들의 불만 섞인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그들의 대부분은 ‘역시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와 함께 황제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황태자 없이 회의가 시작되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황태자 놈이 등장한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프리트 황태자가 아니었다.
“……에데카나 공작?”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니다.”
그는 정중히 몸을 굽혀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급히 휘온의 등 너머를 살폈으나, 프리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제 미간을 짓누르며 휘온에게 물었다.
“에데카나 공작, 지금까지 황태자와 함께 있던 것이 아니었나?”
휘온이 난감한 표정으로 아뢰었다.
“송구하지만, 황태자 저하께옵서는 금일 정기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실 예정입니다.”
휘온의 충격 발언에 장내는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황제가 절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 어째서냐!”
“그것이…….”
하지만 휘온이 뭐라 대답을 이어갈 수도 없게,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더욱더 커져갔다. 휘온의 목소리는 이미 그들의 외침 속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사람을 종잇장 베듯 썰고 다닌다는 소문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지지 세력을 잃어가던 프리트였다. 그나마 요즘 목욕에 푹 빠진 이후로 좀 온순해졌다 싶었더니만, 기어이 오늘도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결국 황제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황후의 최측근 중 한 명인 고위 귀족이 입을 열기 시작했으니까.
“혹여 저희가 어리석어, 황태자 저하께선 원치 않으시는데 자꾸만 억지로 국정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휘온이 반박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지만 황후의 측근들은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카데베르 제국이 얼마나 복되었습니까! 설령 황태자 저하께서 제국의 안위에 관심이 없으시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그분의 부담을 덜어주실 선물을 황후마마께 다시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새로운 선물이라는 것은 황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일컫는 것이었다. 임신 초기 단계라 최측근만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오늘로써 모두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말에 놀란 가신들은 일제히 일어나 황제에게 축하를 전했다.
“설마, 황후 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겁니까?”
“아니, 폐하! 이토록 기쁜 소식을 어찌 저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경하드리옵니다, 황제 폐하!”
장내는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휘온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어서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찰나, 황제가 얼굴을 찌푸리며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조용-! 그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성별도 알 수 없는 아기일 뿐이다!”
황제의 말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황제가 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령 아들이 태어난다 해도, 그 아이를 후계로 삼을 생각은 없으니 경들은 경거망동한 언행을 삼가라.”
황제의 으름장에 모두는 다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황후 측근들의 입꼬리는 연신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제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봤자, 그것 역시 프리트 황태자가 건재할 때의 이야기 아닙니까, 폐하.’
한편 지칠 대로 지친 황제는 고개를 돌려 휘온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발사하며 물었다.
“에데카나 공작, 그래서 프리트는 대체 어떤 연유로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야, 그렇지?”
휘온은 황제의 저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프리트가 사고를 치고 다닐 때마다 그는 으레 휘온을 바라보며 너만 믿는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이번에도 내 아들이 싸지른 똥을 똑똑한 네가 잘 처리해 주리라고 믿는다’라는 무한한 신뢰의 눈빛.
‘에휴, 내 팔자야.’
속으로만 몰래 한숨을 푹 내쉬며, 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태자 저하께옵서는, 제국을 놀라게 할 만한 위대한 발견 때문에 금일 불참하시는 것이니 부디 양해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위대한 발견이라니?”
“그것은…….”
휘온이 좌중을 향해 미소 지으며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 저하께서 그 위대한 발견과 함께 곧 돌아오실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 이상일 테니, 기대해도 좋다 하셨습니다, 폐하.”
***
“……그래서.”
얀피르는 제 앞에 선 프리트를 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남작저까지 내려와서는 저에게 한다는 소리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 위대한 발견이…… 나였냐?”
프리트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드래곤. 사라진 줄 알았던 한 종족의 발견보다 더 위대한 것이 또 어디 있겠…….”
“너 그냥 주인 만나러 페니아 왕국에 가고 싶어서 정기 회의 땡땡이친 거잖아!”
자신을 향해 그르렁거리는 얀피르를 향해, 프리트가 뻔뻔하게 답했다.
“어허, 땡땡이라니! 제국이 드래곤족을 찾아 몇백 년을 헤맸다 하지 않았냐. 그러니 얀피르 네가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하는 건 당연한 절차…….”
“아 됐고, 땡땡이는 네놈이 쳤는데 왜 내가 변명거리가 돼 줘야 해? 싫어, 안 해.”
어림도 없다는 얀피르에게 프리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렇게 불만이면 얀피르 네놈도 나와 함께 산수이 영애를 보러 가면 되잖아. 지난번처럼 함께 날아간다면 이동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고…….”
“하아? 변명거리도 모자라 이젠 날 탈것으로 이용하시겠다? 미안한데 난 못 가. 주인이 여기 관리를 부탁했거든.”
“뭐 그럼 할 수 없지. 나 혼자 다녀오는 수밖에.”
“웃기고 있네. 너도 가지 마. 네가 주인이랑 단둘이 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더러우니까.”
“지금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거야!”
“시끄럽고,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서 회의에나 참석해!”
프리트와 얀피르는 오늘도 이처럼 아웅다웅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제국이 그간 비밀리에 찾아 헤맸던 드래곤을 찾아낸 것이 다름 아닌 프리트 황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지지율이 엄청나게 상승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프리트는 얀피르와 상호 수호의 동맹을 직접 맺은 장본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얀피르는 이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가 프리트를 바라보며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조만간 황제를 보긴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어.”
“그래 잘 생각했다, 얀피르! 그러니 내가 페니아 왕국에 다녀온 후 바로 함께…….”
“그런데 네놈의 말을 듣다 보니 영 귀찮네. 황제는 내가 만나고 싶어질 때 찾아갈게.”
얀피르는 크게 하품하고 의자에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나 이제 잘 거니까 그만 꺼져.”
“이 자식이……!”
프리트가 참지 못하고 얀피르에게 덤벼들려던 찰나, 갑자기 얀피르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주인……?”
벌떡 일어난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얀피르의 이상 행동에 놀란 프리트는 그의 멱살을 잡아 쥐려던 것도 잊었다.
불길한 예감이 프리트를 사로잡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하지만 얀피르는 프리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내 프리트에게 팔을 잡히고 말았다.
“이거 놔!”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얀피르가 백지장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듯 절망하며 외쳤다.
“주인…… 지금 주인이 위험하다고!”
***
어디선가 갑자기 뿜어져 나온 강렬한 빛 때문에 놀란 헤슬리히는, 산수이의 목을 조르던 제 손을 놓아버렸다.
팟—
그와 동시에 새하얀 빛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헤슬리히는 크게 당황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산수이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헤슬리히의 손아귀 아래에서 숨이 끊어지려던 찰나, 갑자기 눈앞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마치 헤슬리히를 튕겨내듯 저에게서 떨어트려 놓은 그 빛은, 다름 아닌 산수이 자신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목걸이에서.
‘얀피르가 준…… 목걸이?’
하지만 곧이어 헤슬리히가 무서운 목소리로 산수이에게 외쳤다.
“너, 정말 마녀였군!”
헤슬리히는 재빨리 마사지 베드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헤슬리히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져다 놓은 단도가 준비되어 있었다.
헤슬리히가 단도로 그녀를 겨누며 내뱉었다.
“죽어라!”
산수이가 차마 피할 새도 없이, 헤슬리히는 그녀의 목을 향해 단도를 강하게 찍어 내렸다. 하지만 칼끝이 그녀의 목에 닿으려던 찰나, 다시금 아까의 새하얀 빛이 칼날을 튕겨냈다.
“크윽……!”
헤슬리히는 단도를 떨어트린 채 제 눈을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산수이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얀피르가 준 목걸이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이 목걸이가, 나를……!’
방금 전 두 번의 공격으로 명확해졌다. 이 목걸이가 그녀를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
산수이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아까 헤슬리히에게 목을 졸린 탓에, 몸이 제대로 가눠지질 않았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헤슬리히가 서둘러 산수이에게 다가와 제 팔로 그녀의 몸을 다시금 짓눌렀다.
“크윽! 이거 놔!”
그의 시선이 산수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
“그 빛의 정체가 이거였군?”
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이걸 어떻게 숨겨서 들어온 거지? 분명 국경에서 마도구에 대한 검문이 있었을 텐데……?’
처음 보는 모양새의 목걸이였다. 도대체 무슨 기능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사 물건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어쨌든 지금 제가 이 눈앞의 남작 영애를 죽이려 할 때마다 방해하지 않았던가.
오묘한 빛깔의 목걸이를 바라보는 헤슬리히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이렇게 검문에도 걸리지 않는 마도구들은 보통 위험했다. 소유자를 지키기 위해 상대에게 저주를 걸거나, 심할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속으로 생각했다.
‘쯧, 일이 귀찮게 됐어. 이 마도구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진 이 남작 영애를 당장 죽이지도 못하겠는데.’
그는 혀를 차며 산수이의 손에 감겨있던 이태리타월을 풀어내어, 대신 그녀의 손목을 세게 묶었다.
산수이가 거세게 저항하며 소리쳤다.
“제국의 사절단으로서 파견된 제게 이러시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닥쳐라. 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널, 내가 살려둘 성싶으냐?”
“후회하실 겁니다.”
헤슬리히는 저를 당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산수이를 향해 조소하며 말했다.
“후회? 그럴 리가.”
그렇게 산수이는 페니아 왕국의 지하 깊은 곳에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