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66화 (66/150)

66화.

카데베르 제국과 페니아 왕국 간의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사절단에게는 하루 동안 자유롭게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들은 왕궁 내의 귀빈실에서 머무르며 왕궁 및 페니아 수도의 시내를 구경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인원이 마차를 타고 페니아 도심 구경에 나섰지만, 산수이는 홀로 왕궁에 남아 정원을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나 정원에 있을지 모르는 바나나 나무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세계에서는 이름만 같았지 전혀 다른 과일일 수도 있으니까,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그렇게 산수이는 한참 동안 페니아 왕궁의 정원을 산책했다.

각양각색의 열대 식물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간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원 깊은 곳까지 들어와 버린 후였다.

“여기가 어디지……?”

키가 큰 나무들 사이에 시야가 갇힌 산수이는 길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던 찰나.

수많은 열대 식물 중 익숙한 형체 하나가 산수이의 눈에 들어왔다. 노랗고 긴 것들이 다발로 매달려있는 그것은, 바로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나나 나무였다.

‘저, 정말로 바나나 나무가 있었어!’

나무의 외형은 원래 세상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지만, 신기하게도 페니아의 나무에는 바나나가 두 배 이상은 더 많이 달려있었다.

“이 세계의 바나나는 좀 많이 열리는 편이네?”

혼자서 중얼거리는 산수이의 뒤로,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다가왔다.

“바나나가 마음에 드십니까?”

낯선 목소리에 놀란 산수이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헤슬리히 국왕이 서 있었다.

“구, 국왕 전하!”

산수이는 재빨리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하필 이때 마주친 게 이 나라의 국왕이라니. 그녀는 제가 출입해선 안 되는 정원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 산책하다 보니 그만 여기까지…….”

하지만 헤슬리히는 화를 내기는커녕 자애로운 표정으로 산수이와 바나나 나무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바나나 나무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 봅니다, 남작 영애님.”

설마 자신이 바나나에 대해 언급하는 걸 들었나?

산수이는 당황한 기색을 숨긴 채 빠르게 둘러댔다.

“그저 페니아에서만 자라는 신비한 과일이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본디 이 바나나는 페니아의 왕족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녀와 함께 이곳으로 와서 나눠 먹곤 했었죠.”

그녀? 누굴 얘기하는 거지?

어린 시절이라면.

‘사촌지간이라던 미모세 백작 부인? 아니면 자신의 누이인…… 제국의 황후?’

그때, 의아한 표정의 산수이 앞으로 갑자기 헤슬리히가 손을 쭉 뻗었다.

“?!”

깜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을 본 헤슬리히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런, 제가 영애님을 놀라게 했나 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헤슬리히의 손끝에는 바나나 한 개가 들려있었다.

“아……!”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영애님께 바나나를 권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무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국왕 전하.”

멋쩍어하는 산수이를 향해, 그가 바나나 껍질을 까서 내밀었다.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산수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또 한 번 놀랐다.

‘이거, 페니아의 왕족만 먹을 수 있다더니?’

하지만 제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바나나가 눈앞에 있는 데다가, 한 나라의 국왕이 직접 권하는데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산수이는 그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귀한 바나나를 맛볼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전하.”

“영애님의 입맛에도 맞았으면 좋겠군요.”

산수이는 그가 건네는 바나나를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일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바로 이거지!’

원래 세상에서 먹던 바나나의 맛과 똑같았다.

산수이는 정신없이 제 손에 들린 바나나를 먹어치웠다. 도대체 얼마 만에 먹는 바나나인지,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헤슬리히가 산수이를 향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맛있으신가 봅니다, 남작 영애님.”

그 목소리에 산수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오랜만…… 아니, 정말 놀라운 맛입니다, 전하. 세상에 이런 맛을 내는 과일이 있다니요.”

그리고 이걸 갖다가 바나나우유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산수이는 속으로만 외쳤다.

“입에 맞으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바나나는 저도 매우 좋아하는 과일이거든요.”

그가 쓸쓸한 표정으로 바나나 나무를 손으로 쓸어 만지며 말했다.

“이렇게나 많이 열렸는데, 이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현재로서는 저밖에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말입니다.”

확실히 나무에 열린 바나나는 심할 정도로 많긴 했다.

산수이는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헤슬리히 국왕은 아직 혼인 전이라고 했으니, 궁 안에 왕족이 많진 않겠네. 그럼 이거 다 나한테 팔면 안 되나? 바나나 얘기를 회담할 때 올려야 하나, 아니면 지금 슬쩍 떠봐야 하나……?’

그녀가 망설이던 찰나, 갑자기 헤슬리히가 산수이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저를 향하자, 산수이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럼 바나나도 맛있게 드셨으니, 영애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산수이는 제 입가에 묻은 바나나를 살짝 닦아내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바나나 뇌물까지 먹였단 말인가?

“무슨 부탁이신지요, 전하?”

“그건…….”

그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회담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헤슬리히는 또다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환영식에서 지었던 그 뜻 모를 미소.

산수이가 그 미소의 뜻을 알아채기도 전에, 헤슬리히는 그녀를 향해 신사답게 인사를 하곤 돌아섰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비덴비덴 남작 영애.”

***

회담 당일.

넓은 회의실에는 페니아 왕국의 귀족들과 카데베르 제국의 사절단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이어서 수많은 사항에 관한 논의가 바쁘게 오가기 시작했다. 각종 정치 외교적인 내용부터 시작하여, 제국에서 페니아 쪽에 다양한 학문과 기술 교육을 전파하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수이의 이태리타월이 주제로 올랐다.

회담이 지루했던지 내내 턱을 괴고 앉아있던 헤슬리히 국왕은, 그녀가 단상 앞으로 올라오는 순간 화색이 되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산수이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산수이 역시 그가 자신에게 특히나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중대한 발표를 앞둔 산수이의 손이 떨려왔다.

‘좀 긴장되지만, 바나나 교역을 위해서 힘내자! 어제 헤슬리히 국왕 전하의 반응을 봐선 잘하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해. 그나저나…….’

산수이는 여전히 저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헤슬리히를 보며 생각했다.

‘어제 말씀하신 그 부탁이란 건 대체 뭘까?’

하지만 헤슬리히는 아직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발표를 마치고 나면 어련히 알아서 말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산수이는 제가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은 산수이가 자신들에게 이태리타월과 관련된 서류를 건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회의에서는 대부분 두꺼운 서류 뭉치를 줄줄이 읽어대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어떠한 종이 쪼가리도 건네지 않았다.

‘뭐야. 저 영애, 설마 빈손으로 온 거야?’

안 그래도 사절단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녀를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많았다.

결국 그들 중 하나가 산수이를 향해 빈정거리려던 찰나.

산수이가 회담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떡하니 올려놓았다.

그것은 형형색색의 이태리타월들과 두꺼운 한 권의 책이었다.

“저건……?”

참석자들은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산수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발표를 시작했다.

“열대기후인 페니아에서는 목욕뿐 아니라 수영도 자주 즐긴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산수이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수영장에 타인의 더러운 때가 동동 떠다닌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뭐, 뭐라고요?”

“사실, 우리의 피부는 놀랄 만큼 방대한 양의 때를 숨기고 있습니다.”

인간 육체의 더러움에 대한 설명을 적나라하게 듣게 된 페니아 귀족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이태리타월이 개발된 후, 적어도 제국 땅에서는 더 이상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산수이의 마법과도 같은 입 털기에 귀족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빠져들었다.

‘원래 세계에서 [그것이 알고 싶네]를 애청해두길 잘했어.’

역시 세상에 배워서 쓸데없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어서 이태리타월 사용법에 대한 설명을 마친 그녀가, 마지막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책자는 대체……?”

“이것은 그동안 저희 비덴탕에서 때를 민 손님들께서 직접 작성하신 방명록입니다.”

말하자면 베스트 댓글을 모조리 긁어 온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녀가 방명록을 들고 큰 소리로 때밀이 후기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님 날 낳으시고 때밀이 날 만드셨다.]

[지금껏 해왔던 건 목욕이 아니었다, 몸에 물을 묻힌 것이었을 뿐.]

[비덴탕에서 때밀이받고 나니까 부부 사이가 좋아졌어요.]

그것은 너무나도 명쾌하게 이태리타월의 효능을 생생한 라이브로 들려주고 있었다.

착석해있는 모든 이들이 넋을 잃고 산수이의 발표에 빨려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것으로 발표를 마칩니다.”

준비한 것을 모두 마치고 좌중을 향해 인사를 올리자마자, 갑자기 한쪽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놀란 산수이가 고개를 들어보니, 손뼉을 친 것은 다름 아닌 페니아의 국왕, 헤슬리히였다.

“아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영애님.”

“과찬이십니다, 전하.”

헤슬리히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본 산수이는 슬슬 바나나에 관한 이야기를 던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헤슬리히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태리타월 수입에 앞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전하.”

헤슬리히 국왕은 산수이를 향해 또다시 일전의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때밀이라는 것을, 제가 영애님께 직접 받아볼 수 있을까요?”

“예에?!”

그 말에 장내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헤슬리히는 산수이를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태리타월의 명성에 대해서는 저 역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다만, 교역에 앞서 제가 직접 경험해 보고 싶군요.”

예상치 못한 헤슬리히 국왕의 요청에, 회담장에 있던 모든 참석자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물론 산수이가 제국 내에서는 세신사로 일하고 있긴 하지만, 한 제국의 사절단으로 파견된 그녀에게 동맹국에서 직접 때밀이를 부탁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 부분은 쉬쉬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정작 산수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국왕이 자신에게 부탁하려던 게 고작 저런 것이라면 백 번이라도 더 들어줄 수 있을 터였다.

‘기왕이면 때 밀어주고 친해진 다음에 바나나 좀 달라고 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어?’

게다가 헤슬리히 국왕의 때를 직접 밀어주면서 그의 속내에 감춰진 비밀 얘기도 듣고 나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바나나를 교역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목욕탕 사업을 하며 점점 무서운 사업가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산수이였다.

그녀가 헤슬리히 국왕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그러자 헤슬리히가 만족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긴말할 것 없이, 이 자리가 끝난 후 바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작 영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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