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공작가의 외아들이었던 휘온은 어려서부터 친구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이 제국의 황태자.
하필 그의 나이가 황태자와 동갑이었던 터라, 제국의 충신이었던 휘온의 아버지는 태자 저하를 위한답시고 뻔질나게 휘온을 궁에 데려갔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성격 까칠하기로 유명한 그 두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강심장은 제국 내 귀족 자제 중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아무튼 휘온이 그렇게 황태자와 어울려 놀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들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과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제국 유일의 황녀.
발레아나 폰 카데베르 공주였다.
“오빠아-!”
날 때부터 오빠바라기였던 그녀는, 그들이 어디서 놀고 있든 귀신같이 찾아내 쫓아오곤 했다.
“또 들켰네요, 저하.”
“제길, 귀찮아. 튀자.”
여자애, 그것도 한참이나 어린 꼬맹이와 같이 놀아주는 것이 사내아이들에게 있어선 결코 즐거울 리 없었다.
하지만 발레아나 공주의 눈에는 오빠들이 하는 건 뭐든 신기하고 재밌어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십여 년, 어느덧 꼬마 숙녀로 자라난 발레아나 공주는 더 이상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어떻게든 칼싸움 연습에 끼어보려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황금빛 물결치는 금발에 벽안. 인형 같은 외모로 제국 내에서 손꼽는 미인으로 자라난 발레아나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데뷔탕트를 치르며 제국 사교계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그녀의 숨겨진 면모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과 호기심.
그리고 은근히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점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휘온과 황태자를 제외하면 친구가 거의 없었던 발레아나 공주.
데뷔탕트 이후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들과 교류하며 지내긴 했지만,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그녀들은 좀…… 불편해요. 뭐랄까, 항상 말과 속이 다르달까요.”
그런 공주가 전적으로 믿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오라버니인 황태자와, 어려서부터 같이 뛰놀던 휘온뿐이었다.
휘온 역시 공주가 어려서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봐온 터라, 내심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남들에게 발레아나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다만.
‘……귀찮은 것뿐이지.’
귀찮다.
그래, 그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현실 남매.
어려서부터 질리게 봐서 이젠 얼굴만 봐도 귀찮고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
휘온과 황태자 모두 발레아나 공주를 아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찮아하고 있었다.
만일 남들이 그녀를 괴롭힌다면 그놈을 잡아다 참수시켜 버릴지언정 내가 놀아주기엔 너무, 너무 귀찮은.
속내 여린 우리 발레아나 공주만 오빠들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을 뿐.
그런 발레아나 공주 앞에서 황태자와 휘온 두 사람만 공유하는 비밀 얘기가 오간다?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발레아나 공주님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가장 좋은 미끼는 역시 황태자 저하뿐이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황태자라도 팔아먹을 수 있는 휘온 에데카나였다.
‘뭐 어때. 내가 반역을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발레아나 공주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로 무장된 휘온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고, 그저 휘온의 계획대로 호기심과 궁금증만이 폭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라버니를 뵈러 오셨다고요? 무슨 일인데요, 네?”
휘온은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고기를 낚는 마음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저하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런데 혹시 황태자 저하가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평소 훈련하시던 곳에 가 봐도 영 보이시질 않는군요.”
휘온은 계속해서 공주에게 미끼를 던져댔다.
그의 말을 들은 발레아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으음, 오라버니는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런데, 오라버니께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제가 대신 전해드릴 수도 있는데…….”
하지만 휘온은 쉽사리 공주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궁에 안 계시는군요. 제가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주님.”
휘온은 공주에게 인사 후 미련 없이 홱 돌아섰다.
그런 휘온의 뒷모습을 본 공주는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가 팔에 매달렸다.
“휘온 오……. 아니 공작! 무엇 하러 귀찮게 여기까지 걸음을 두 번 하세요? 그냥 저에게 부탁하시면 되잖아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공주님께 심부름을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저하와 약속을 잡고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참, 제가 대신 전해드린다니까요!”
두 사람은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그 사이 휘온은 일부러 안주머니를 느슨하게 벌려 가슴팍에서 초대권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게 했다.
잔디 위에 떨어진 초대권을 본 발레아나의 눈이 커졌다.
“어?”
“어이쿠, 이런……!”
휘온은 당황한 척 서둘러 초대권을 집으려 했지만, 발레아나가 더 빨랐다.
물론 그것 역시 계산된 것이었지만.
“이게 뭐지? 초…… 대권?”
“하아…….”
휘온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발레아나가 초대권을 앞뒤로 살피며 물었다.
“흐음…… 이건 무슨 초대권인가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서 돌려주십시오.”
“흐으음?”
공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초대권을 들고 튀기 시작했다.
“고, 공주님?!”
휘온이 그녀를 뒤쫓았지만, 발레아나는 이미 멀리 달아나 초대권을 뜯어본 후였다.
“어? 이 초대권…….”
초대권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던 발레아나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휘온을 향해 물었다.
“이 초대권, 최근 화제가 되었던 비덴탕의 때밀이에 관한 것 아닌가요?”
휘온이 곤란한 듯 연기하며 말했다.
“실은…… 하아. 네, 그렇습니다.”
발레아나 공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때밀이란 거, 굉장히 혐오스러운 데다 고통스럽다 들었는데. 그런 걸 어찌 오라버니께……?”
“후, 사실은…….”
휘온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역시도 비덴탕을 방문하여 그 때밀이라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만, 그 거친 수건으로 몸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무, 무엇을요?”
“이것이야말로 전장에서 싸우시며 온몸이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한 황태자 저하를 위한 것이란 걸……!”
“……!”
휘온은 발레아나 공주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남성이 피부 관리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인 줄은 압니다만, 저하와 함께 목욕할 때마다 그분의 온몸에 가득한 고통의 흔적들을 보며 신하 된 자로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제 가슴을 움켜쥔 채 계속해서 술술 열변을 토해냈다.
그의 말에 발레아나 공주는 진심으로 감동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아아, 휘온 공작……!”
“그분을 위한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도중, 때밀이를 보곤 무릎을 탁 치게 된 것입니다. 황태자 저하께서 그 고왔던 아기 때 피부를 되찾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휘온은 아기 피부라는 말을 특히 강조해서 언급했다. 그 말을 듣던 발레아나의 눈이 커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설마 이 때밀이라는 걸 받으면, 피부가 아기처럼 고와진다는 말씀이신가요……?”
휘온은 끄덕이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객들의 말에 따르면 마치 피부가 비단결처럼 부들부들해지고, 몸의 긴장이 이완되어 피로도 풀린다고 하더군요.”
휘온은 자신이 느꼈던 것들을 남의 얘기 하듯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게다가 때만큼의 무게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니, 다이어트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때 좀 덜어낸다고 얼마나 빠지겠냐마는…….
휘온은 그 속내만큼은 꿀꺽 삼킨 채 능청을 떨었다.
“비, 비단 같은 피부에 다이어트까지?! 하지만 소문과는 영 다른데…….”
“원래 아름다워지는 데는 고통이 따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공주님.”
그런 휘온의 말을 들은 발레아나는 잠시 고민하다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휘온 공작? 이 초대권, 저한테도 한 장 주시면 안 돼요?”
***
휘온은 초대권을 발레아나에게 넘기며 약조했다.
서로 오늘 일은 황태자에게 비밀로 하자고.
“황태자 저하께서 아시면 부끄러워하실 테니까요. 무릇 사내의 피부 관리란 모른 척해 드려야 하는 법입니다.”
“과연, 역시 휘온 공작의 깊은 충성심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거예요.”
“황태자 저하께는 제가 따로 은밀히 새로운 초대권을 드릴 테니, 그 초대권은 공주님께서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고마워요, 휘온 오…… 아니 공작!”
물론 황태자에게 줄 초대권 따위는 없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한껏 들떠있는 발레아나를 보며 휘온은 씩 웃었다.
***
휘온에게서 서신을 받은 산수이는 깜짝 놀랐다.
“저, 정말로 공주님이 그 초대권을 받으셨단 말이야?”
게다가 이른 시일 안에 비덴탕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도대체 이 휘온 에데카나 공작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거야?’
대관절 그는 제국의 황녀를 어떻게 구슬린 것인가.
하지만 그의 재간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른 고객도 아니고, 무려 공주마마.
그것도 사교계의 핵심 인물인 그녀가 이곳을 방문한다!
‘자칫 잘못했다간 더 큰 위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걸 기회로 만들어 보이겠어!’
휘온이 힘들게 마련해준 기회다. 실패 없이 해내야 한다.
그날부터 남작가의 모든 사용인은 공주를 맞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고.
그리고 며칠 뒤.
드디어 약속의 날이 되었다.
제국의 황금 사자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된 황실 마차가 비덴탕 앞에 도착했다.
산수이는 마차에서 내리는 공주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게 사람인지 인형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작고 예쁜 소녀가, 기품이 넘치는 자태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공주를 본 산수이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코를 문질렀다.
‘귀여워! 안아주고 싶어-!’
산수이는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다잡으며, 자신의 앞에 선 발레아나에게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녀님을 뵙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사랑스러웠다. 산수이는 공주의 저 탐스러운 볼때기를 한 번만 꼬집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그대가, 내 오라버니에게 때밀이 초대권을 보낸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로군?”
산수이를 내려다보는 공주의 시선엔 시퍼런 한기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