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휘온에게서 얼핏 듣긴 했다.
황태자에게 초대권을 주는 척, 발레아나 공주의 관심을 끌 예정이라고.
물론 휘온의 작전대로 공주를 이곳까지 오게 하는 건 성공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으음, 황태자 저하를 언급하시는 공주님의 표정이 어째 심상치가 않은데……?’
이거, 건드리면 안 되는 지뢰를 밟은 건 아닐까?
자신을 향한 공주의 이 날 선 태도가 무엇 때문인지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공주님보다 황태자 저하를 먼저 챙겼다고 생각하셔서 섭섭하신 건가? 아니면 혹시, ‘감히 네까짓 게 울 오빠를 넘봐?’ 쪽인가?’
산수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시에, 발레아나 공주 역시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예, 예쁘다……! 이 언니 장난 아니게 예뻐!’
사교계의 요정 산수이 비덴비덴에 대해선 예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발레아나였다.
하지만 공주가 데뷔탕트를 치르기도 전, 비덴비덴 남작가에 불행한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산수이는 한동안 사교계에 나갈 수 없었고, 따라서 발레아나가 그녀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다. 저 물빛 머리카락 좀 봐. 게다가 뽀얀 살결은 또 어떻고. 혹시 저게 다 그 때밀이라는 것의 효과일까?’
발레아나 공주는 조금 전 자신이 취했던 오만한 태도도 모두 잊어버린 채, 잠시 넋을 잃고 산수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산수이가 그런 공주를 보며 물었다.
“저…… 공주님?”
발레아나 공주는 산수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제, 제국의 황태자에게 검증도 되지 않은 신기술을 선보일 수는 없는 법. 이에 누이인 내가 그 때밀이라는 것을 먼저 시험해 보고자 왔노라……!”
발레아나 공주는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억지스러운 권위를 내세우며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산수이는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뭐, 공주님이 무슨 생각이시든, 때 한번 밀어주면 알아서 술술 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공주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윽고 발레아나가 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택 내로 들어가자, 여태껏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던 얀피르가 다가와 산수이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주인, 나 쟤 마음에 안 들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도 불구하고 산수이는 이제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을 끌어안은 얀피르의 양팔을 가볍게 치워버리며 답했다.
“쟤 아니고, 공주님. 이 제국의 황녀님.”
“황녀 아니라 황제가 온다고 해도 똑같아. 주인한테 쌀쌀맞게 구는 놈들은 다 별로라고.”
“난 공주님 귀여운데? 아니다, 귀여움을 넘어서 사랑스러워.”
“뭐?”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주인, 설마 저런 까칠한 게 취향이었어?”
“취향?”
얀피르는 난감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하……. 이거 큰일이네. 난 나쁜 남자 같은 건 잘 못 하는데.”
“뭐 나쁜 남자? 얀피르 씨,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얼른 저랑 아궁이에 불이나 지피러 가시죠.”
“쓸데없는 소리 아닌데? 주인한테 사랑받는 게 나한테는 제일 중요한……!”
“예에, 알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얀피르 씨, 이제 저랑 함께 아궁이로 가 보실까요?”
산수이가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쓰다듬어주자, 얀피르는 또 마지못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쳇……. 하여간 자꾸 나 조련하는 법만 늘지.’
속으로는 푸념하면서도 얀피르는 산수이를 쫄래쫄래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
온탕에서 몸을 불린 발레아나 공주는 전신에 수건 한 장만 달랑 두른 채 쑥스러워하며 때밀이실로 들어왔다.
산수이가 그녀를 향해 정중히 묵례했다.
“오셨습니까, 공주님? 목욕하시면서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고요?”
“으, 으음. 딱히 없었다.”
발레아나 공주는 사실 자신이 탕 안에서 노곤하게 풀어지다 그만 잠들 뻔했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여기 엎드려 주십시오.”
산수이는 흰 대리석 판을 가리켰다. 석판 전체엔 공주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둔 흰색의 최고급 뱀부 타월이 깔려 있었다.
대리석 판은 미리 기분 좋은 온도로 달궈져 있어, 그곳에 눕자마자 발레아나 공주는 마치 자신의 몸이 석판 위에 버터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와, 아직 때밀이란 건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너무 좋구나!’
공주가 석판 위에 완전히 엎드리자, 산수이가 양손에 긴 이태리타월을 칭칭 둘러 감고는 말했다.
“그럼 공주님,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때밀이를 받기 시작한 발레아나 공주가 산수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술술 불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레아나가 산수이에게 물었다.
“너는…… 형제자매가 있느냐?”
이 말에 산수이는 직감했다.
‘시작인가!’
그런데 형제자매라.
지금껏 들어온 남들의 속 얘기 주제와는 사뭇 다른 것이라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아니요, 저 혼자입니다.”
물론 정확히는 원래 세계에선 천애 고아였기에, 형제자매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말이다.
“흐음, 그럼 너는 어렸을 때 누구와 놀았느냐?”
‘누구랑 놀았냐고?’
예상외의 질문에 산수이는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산수이 영애의 육신에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목욕탕집 영애라 그런지 죄다 탕 안에서 수영하는 장면밖엔 보이질 않았다.
“으음, 그것이. 제가 어렸을 때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산수이는 원래 세계에서의 추억도 상기시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보육원에서조차 친구가 별로 없었구나.’
친구를 사귈 만하면 그 아이가 어디론가 입양되고, 혹은 부모가 다시 데리러 오곤 했다. 그렇게 항상 혼자 남겨지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의욕조차 사라져서.
‘나중엔 그냥 인형 가지고 혼자 놀았지.’
그때 인형을 자기 동생 삼아 목욕도 시켜주고 마사지도 해주며 놀았다.
‘어떻게 보면 그때부터 세신사의 자질을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네.’
산수이는 속으로 쿡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공주를 향해 대답했다.
“혼자 놀았습니다.”
그 말에 놀란 공주는 고개를 돌려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혼자 놀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발레아나 공주는 정말로 놀란 표정이었다.
“목욕탕 안에서 혼자 수영도 하고, 인형 목욕도 시켜주고 그랬죠.”
“……외롭지는 않았느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산수이는 이 작은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발레아나의 예쁜 눈동자 속에서 어쩐지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뭐, 애초부터 혼자여서 외로울 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 산수이를 보며 공주는 감탄했다.
“강하구나. 남작 영애는 참으로 강한 자야. 나는 오라버니가 있었음에도 늘 외로웠는데 말이지.”
발레아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심지어 오라버니도 모두 내게 관심이 없다. 다들 너무나 공사다망하시어 시간이 없으신 건 알고 있다만…….”
그래서 이 공주가 데뷔탕트도 남들보다 일찍 치르고, 애어른으로 자라게 된 걸까.
‘그런 점은 나랑 비슷하기도 하네. 그래도, 이 공주님은 아직 누군가에게 응석을 부릴 나이인 것 같은데.’
산수이가 공주의 팔을 들어 올려 부드럽게 때를 밀어주며 말했다.
“공주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오빠란 존재들은 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니까요!”
“있으나 마나 하다고?”
“현실 남매라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현실 남매?”
공주는 눈만 끔뻑끔뻑했다.
“원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 오빠라는 존재들이에요! 걔들한텐 뭘 기대하면 안 된다고…… 아 물론, 이건 제 친구들이 한 말입니다. 저는 형제자매가 없어서 전혀 알 수 없지만.”
산수이는 이전의 삶을 떠올리며 말했다.
학생이었을 때, 오빠가 있는 친구들은 일단 아침 인사를 자기 오빠 욕으로 시작했다.
그중에 자기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름 아니면 그 새끼. 정말 백번 양보해서 격식을 차려 불러주면 오빠 새끼 정도?
산수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현실적으로, 남매끼리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공주님의 오빠를 떠올려 보세요! 분명 공주님한테 이것저것 시켜 먹고…….”
발레아나 공주가 고개를 대차게 끄덕였다.
“맞다. 가끔 시녀들이 끓여주는 차가 맛이 없다며 나에게 차 시중을 들게 한단 말이다.”
공주의 말에 산수이는 계속해서 오빠 새끼들의 단점을 열거해 나갔다.
“보통 성격 더럽고.”
공주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으음……. 슬프지만 저것도 맞는 말이네.’
발레아나가 생각하기에 이 제국에서 성격이 개차반이기로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다음이 휘온이고.
제 친오빠는 황태자라는 놈이 툭하면 칼을 휘둘러서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고 있고.
게다가 휘온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능구렁이라고, 발레아나는 생각했다.
산수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잘 안 씻고.”
“하아…….”
공주는 자신의 오라비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온몸이 피와 내장으로 칠갑이 되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그 꼴 그대로 궁 안을 휘젓고 다니던 일을.
“맛있는 거 혼자만 처먹고.”
공주는 또한 자신이 먹으려던 마카롱을 오라비가 홱 낚아채 그의 입속으로 쏙 넣고는 유유히 가버렸던 일을 떠올렸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도대체 난 그동안 왜 그렇게 오라버니를 따라다니지 못해 안달이었던 것인가?’
공주는 지난날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산수이는 그런 공주의 마음을 모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자매들처럼 옷이나 장신구를 바꿔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파자마 파티를 할 수도 없고. 남자 형제들은 재미도 더럽게 없고 암튼 일생에 도움이 안……!”
여기까지 뇌까리던 산수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공주의 오빠, 오라버니는 그러니까.
‘……황태자 저하잖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갑자기 엎드려 있던 발레아나 공주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뜬금없는 웃음 타이밍에 산수이는 더욱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망했다…….’
산수이는 그 길로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하, 하지만 황태자 저하 같은 분이 오빠라면 얘기가 다르죠. 공주님이 부럽습니다. 제국에서 제일 멋지고 훌륭하신 오라버니가 계셔서. 아하하…….”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그래? 정녕 내가 오라비가 있는 것이 부럽단 말이지?”
“네에 그렇습니다-!”
황족 모욕죄로 사형당하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산수이가 있는 힘껏 호들갑을 떨었다.
‘요놈의 주둥이! 주둥이!’
곧 침묵을 깨고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쓸모없는 나의 오빠 놈을 너에게 줄 테니 가지겠느냐?”
당황스러운 공주의 제안에 산수이는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어……. 네?”
공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교환은 등가로 이루어져야 하는 법. 대신 산수이 남작 영애, 네가 나의 의자매가 되어라.”
“예에에-?!”
놀란 산수이에게 발레아나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의자매가 된 것을 기념하며……. 네가 말한 그 파자마 파티라는 것을 함께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