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어서 오십시오. 비덴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산수이는 목욕탕을 찾아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직은 여성 고객님들이 대다수네. 이곳이 신분과 성별을 넘나드는 화합의 장이 되길 기대했지만…… 뭐, 처음부터 만족할 순 없지. 천천히 키워나가자.’
물론 남성 고객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다 함께 휴가를 즐기러 온 자들도 상당수였고, 휘온을 따라서 이곳에 투자하기 위해 영지를 둘러보러 온 이들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이 북적거림은 긍정적인 징조였다.
산수이는 미리 준비해 둔 홍보용 포스터를 비덴탕의 출입구 및 로비의 계산대 옆에 크게 붙여두었다.
[스크럽보다 더 혁신적인 제품! 이태리타월로 남작 영애가 직접 때를 밀어드립니다.]
게다가 오늘은 여탕 한가운데에 간이 마사지 베드를 놓고 때밀이 시범 퍼포먼스도 선보일 예정이었다.
‘아마도 얀피르나 휘온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귀족들도 일단 체험해보고 나면 만족해할 거야.’
하지만.
예정대로 때밀이 퍼포먼스를 펼쳤을 때, 목욕탕 한가운데서 산수이에게 때를 밀리는 유모의 모습을 본 귀족 여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게 뭐야? 흉측해!’
‘마치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 같아. 되게 아프겠다…….’
‘으, 으악! 검은 비가 내려! 설마 내 몸에서도 저런 게 나오는 거야?’
때를 민다는 것은 직접 겪는 사람이나 시원해하지, 딱히 타인들이 보기 좋은 구경거리는 아니라는 것.
내 몸에서 나오는 때는 괜찮지만 남의 때는 더러워.
그 내로남불의 심리를 산수이는 크게 간과하고 있었다.
***
때밀이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은 싸늘함 그 자체였다.
‘어떻게 때를 밀어보겠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남의 때가 밀리는 광경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저택 내의 사용인들이야 산수이의 오랜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응했던 것이고.
‘휘온 공작님 역시 때를 민다는 개념이 뭔지 모르니까 등을 내어주셨던 거지. 누군가의 등에서 시커먼 때가 수북이 밀려 나오는 걸 보신 후라면 싫다고 하셨을지도 몰라…….’
얀피르야 뭐, 자신이 뭘 하자고 했어도 좋다고 살랑거렸을 테지만.
‘어쨌든, 완전한 마케팅 실패네. 첫 이미지부터 완전히 망해버렸으니. 이걸 어쩐담…….’
휘온에게 호언장담을 한 결과가 이거라니.
산수이는 한숨이 나왔다.
물론 수익 면으로만 따졌을 땐 절대 실패한 결과는 아니었다.
텅 비어있던 이곳 비덴탕이 다시금 손님들로 바글바글하지 않은가.
아직까진 남탕 안의 손님 수는 다소 부족했지만, 여탕을 찾은 고객들은 대부분 만족해했다.
처음에는 하인들과 같은 탕 안에 들어간다는 걸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귀족 부인들도, 일단 몸을 풀고 나면 언제 그랬냐며 세상만사 다 상관없다는 듯 늘어지지 않던가.
“이렇게 여자들끼리만 목욕하니까 정말 좋다, 그치?”
“몸도, 마음도 정말 너무 편안해.”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란 걸, 산수이는 잘 알고 있었다.
‘에데카나 공작가의 이름 때문에 방문한 자들이다. 반짝하고 사라지실 고객들이야. 핫딜, 프로모션 같은 거랄까. 이 사람들이 비덴비덴의 단골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어.’
이들이 지속해서 목욕탕에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초반부터 망해버린 이태리타월의 이미지 때문에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
휘온 에데카나는 작금의 때밀이 퍼포먼스 사태에 대해 남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했으면서도 먼저 손쓰지 못한 내 잘못이다.’
사실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때밀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란 걸.
자신이 살롱을 방문했을 때 미리 때밀이와 이태리타월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진입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춰 줬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도 그가 말을 꺼내지 못한 건.
‘……그저 내가 스크럽을 즐긴다는 사실이 탄로 날까 봐서였지.’
모두의 앞에서 비덴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투자했다는 사실도.
제국의 모든 사내 역시 목욕탕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가.
하지만 휘온 자신이 피부 미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평생을 제국 남자로 살아온 그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휘온이 때밀이를 즐긴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가 지금껏 몰래 스크럽을 사용해왔다는 사실까지 함께 폭로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때밀이가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휘온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내가 왜 그분을 깜빡 잊고 있었지?”
그는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산수이는 자신을 찾아온 휘온과 마주 앉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앞에 놓인 차가 다 식어버릴 때까지 제대로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때밀이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저조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좀 더 고민해서 새로운 홍보 방안을……!”
“아닙니다, 영애. 이것은 제 불찰입니다.”
휘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것은 다…… 비겁한 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산수이는 놀라 물었다.
“비겁하다뇨? 공작님께서 왜…….”
“이상한 소문이 날까 두려워, 살롱에서 때밀이에 대한 언급은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휘온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심양면 도와드리기로 약속해놓고는, 절반밖엔 도와드리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애가 해주신 때밀이에 감탄했던 제가 말입니다.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휘온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런 모습은 산수이에게는 매우 신선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솔직하고 사과할 줄도 아는 남자였구나. 그리고…… 너도 참 피곤한 사회 안에서 사는구나.’
산수이는 휘온이 딱하게 느껴졌다.
아니, 남자가 스크럽 좀 하면 어때? 때 좀 밀고 피부 관리하면 어떠냐고.
정말 꼰대 같은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산수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작님께서 스크럽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그건 공작님 역시 저 때문에 비밀을 억지로 털어놓으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애……!”
그녀가 휘온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사과하실 게 아니라, 저랑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 영애는 정녕 천사인가, 휘온은 생각했다.
역시 그녀를 위해서 이 한 몸 바쳐 때밀이의 대중화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이 일이 잘 해결되고 나면 산수이 영애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지.’
그 생각은 속으로만 삼키며, 휘온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사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만.”
“그게 무엇이죠?”
“저에게, 때밀이 초대권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휘온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
이튿날.
산수이가 만들어 준 초대권을 든 휘온이 향한 곳은 바로 제국의 황궁이었다.
‘정보통에 의하면 황태자 저하께선 변방 시찰로 한동안 궁을 비우실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기회는 바로 지금뿐.’
황태자 모르게 휘온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제국 유일의 황녀.
발레아나 폰 카데베르 공주.
휘온은 산수이가 맨 처음 공주의 이름을 들었을 때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
“고, 공주님께 드릴 때밀이 초대권을 만들어 달라고요?!”
산수이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었다.
귀족들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때밀이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주한테 권해보자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공작이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내가 공작의 때를 밀어줄 때 머리까지 밀어버린 기억은 없는데?!’
하지만 휘온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거듭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발레아나 공주님께 초대권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 하지만……! 귀족들이 저렇게 싫어하는 때밀이를, 고귀하신 황녀님께서 좋아하실 리는 더더욱 없잖아요!”
게다가 사교계에 때밀이에 대한 혹평이 자자한데, 그 소문들이 공주님의 귀에 이미 들어가고도 남았을 게 아닌가.
이 사람 정말 제국의 천재, 뇌섹남 휘온 에데카나 공작 맞아?!
그러나 휘온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발레아나 공주님이라면 반드시 초대권을 들고 이곳을 찾아오실 겁니다. 제가 그러실 수밖에 없게 만들 거니까요.”
그리고 지금.
휘온은 산수이가 정성껏 만들어준 때밀이 앤드 마사지 체험 초대권을 가슴에 소중히 품은 채 황궁에 도착해있었다.
일부러 발레아나 공주가 자주 걷곤 하는 황궁의 후원 안쪽으로 말이다.
그는 품 안의 초대권을 슬쩍 꺼내 보았다.
짙푸른 바탕에 황금색 음각으로 ‘VVIP 초대권’이라 새겨 넣어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디자인이었다.
휘온이 초대권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VVIP……. 가장 특별한 고객이란 뜻이라 했던가. 다음에 산수이 영애를 만나면 꼭 나도 그녀에게 있어서 VVIP인지 물어봐야겠군.’
그렇게 휘온이 혼자만의 공상에 잠겨있던 찰나, 갑자기 후원 안쪽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한 명이 시녀 여럿을 이끌고 산책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목소리.
나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나풀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꼬마 숙녀는.
‘틀림없는 발레아나 공주로군.’
휘온은 초대권을 다시 가슴 안에 소중히 집어넣은 후, 공주가 있는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이곳에서 공주를 마주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깜짝 놀라며 예를 표했다.
“아니, 발레아나 공주님 아니십니까……? 에데카나 공작이 제국의 황녀님을 뵙니다!”
그런 휘온을 보며 덩달아 놀란 발레아나가 입을 열었다.
“어? 휘온 오빠……. 아, 아니 에데카나 공작! 여긴 무슨 일로? 설마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발레아나 공주가 그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휘온의 답변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황태자 저하를 찾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황녀님과 마주치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요. 제가 감히 황녀님의 산책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휘온은 뻔뻔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