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피곤한 하루였다.
휘온은 여느 때와 같이 시중들을 모두 물러나게 한 뒤, 대리석 욕조 안에서 혼자 목욕을 즐겼다.
들어온 지 벌써 한참이나 지난 터라 그의 몸은 이미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모래시계를 바라봤다. 곧 얼마 남아있지 않던 금빛 모래가 아래로 모두 떨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흐릿한 물안개 속에서 몸을 일으킨 휘온이 대리석 욕조 밖으로 긴 다리를 내뻗었다.
그의 매끈한 쇄골 사이로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대로 몸을 타고 내려가, 다리 사이를 지나 욕실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세면대 앞에 선 휘온은 자신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피부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그러자 거울 너머로 그의 촉촉하게 젖은 은발이 반짝거렸다.
그는 세면대 위에 놓여있던 노란색 이태리타월을 집어 들었다.
“흐음…….”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이태리타월을 집어 들어 자신의 오른손에 끼우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목욕용품이라곤 전혀 상상할 수 없게 생겼어.”
이윽고 휘온은 마사지 베드에 걸터앉아 스스로 자신의 때를 밀기 시작했다.
쓱싹—
산수이 영애의 말대로, 불어난 몸에 이태리타월이 닿자 곧이어 때가 밀려 나왔다.
‘정말로 몸이 불어야 때가 잘 나오는군. 그녀의 말대로야.’
사실 산수이가 떠난 후, 휘온은 서재에서 시험 삼아 이태리타월로 자신의 팔목을 밀어보았었다.
하지만 그땐 아프기만 했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사실 미친 짓이었지. 그러다 서재에 때 가루라도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는지…….’
약간의 결벽증이 있던 휘온은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제 몸에서 이 더러운 노폐물 찌꺼기가 나오는 건 결코 유쾌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몇 번을 본다 해도 적응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던 수제 스크럽 제품보다, 사용 후의 만족감은 이 이태리타월 쪽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알기에 그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몸에서 때가 한층 더 많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휘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 더러운 걸 산수이 영애에게 보이고 만 것인가. 수치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군.’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제가 왜 그런 부끄러운 제안을 수락했던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휘온은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잠시간 고뇌했다.
하지만.
만족스럽게 밀려 나오는 때를 보면서도, 휘온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니야.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 좀 더 시원하면서도, 사르르 녹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단 말이다.’
결국 휘온은 때를 밀던 손을 멈추고 바닥으로 축 떨어뜨린 채 되뇌었다.
‘이렇게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녀가 때를 밀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난……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그날 밤.
휘온은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몸은 그 구원과도 같은 때밀이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아, 한 번만 더 그녀의 때밀이를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밤이 지나갔다.
***
이른 아침부터 비덴비덴 남작저를 방문한 휘온 에데카나 공작의 등장에, 집사와 유모를 비롯한 모든 하인들은 놀라 눈만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에…… 에데카나 공작님이시라고요?”
제국 수도에서 변방의 이곳까지, 그것도 이 시간에 도착하려면, 공작은 대체 새벽 몇 시에 출발한 것이란 말인가.
‘적어도 수탉이 울기 전에 출발하신 게 아닐까…….’
집사는 생각했다.
게다가 예절과 체면을 중시하기로 소문난 공작이 사전 통보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남의 저택을 방문하다니.
제국의 예법상 아무리 공작의 지위가 높다 한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에 눈먼 연인들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휘온 에데카나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남작저의 하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안주인이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무언가 실수를 하고 돌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얼음같이 차갑고 냉철하기로 이름난 에데카나 공작이 저렇게 아침 일찍부터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었다.
휘온이 집사에게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예를 갖추며 말을 건넸다.
“이른 아침부터 실례가 많습니다만,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다, 당장 모셔오겠습니다요……!”
이 말을 끝으로 하인들은 혼비백산하며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혼돈의 상황 속에서 오직 집사와 유모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편 후보 2번의 등장이군요.’
그들의 마음속 남편 투표가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
아직 잠에서 덜 깬 산수이는 휘온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공작이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찾아왔다고?! 대체 왜? 나 혹시 저번에 뭐 실수했나?’
설마 이제 와서 투자를 무르겠다거나, 그딴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산수이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그때, 갑자기 이불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드래곤 모습의 얀피르였다.
“……뭔데 이렇게 아침부터 시끄러워?”
“얀피르?! 넌 또 왜 여기서 자고 있어-!”
휘온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놈이 하나 더 나타났다.
그러나 얀피르는 태연하게 하품을 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흐암…… 그럴 일이 좀 있어.”
“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여길 들어와!”
그러나 얀피르는 대답 대신, 갑자기 주위를 경계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이내 그의 눈가에 살기가 어렸다.
“이 냄새……. 그 허여멀겋게 생긴 재수 없는 놈의 냄새가 분명한데.”
얀피르는 빛의 속도로 날아올라 산수이 방의 창문에 찰싹 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엔 예상대로 에데카나 공작가의 백호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보였다.
화가 난 얀피르가 그르렁거렸다.
“역시, 어젯밤 잠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내가 이래서 주인을 혼자 둘 수가 없다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창문을 깨고 뛰쳐나갈 기세였으나, 곧바로 산수이에게 목덜미를 콱 잡혀버리고 말았다.
얀피르가 바동거리며 말했다.
“주인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나 저 녀석한테 가 봐야 한다고!”
“그래? 잘 생각했어.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빨리 이 방에서 나가렴.”
“옷을 왜 갈아입어……? 설마 주인, 저 녀석에게 잘 보이려고?!”
“저 녀석 아니고 공작님이라고 했지! 그리고 손님이 찾아오셨으면 당연히 예를 갖추어 맞이해야지. 그냥 손님도 아니고 우리 목욕탕의 물주님이신데.”
휙—
얀피르는 순식간에 복도로 쫓겨났다.
“공작님한테 해코지하지 말고, 네 방에 가서 얌전히 있어.”
“크르릉…….”
산수이의 방문이 탁 하고 닫혔다.
***
잠시 후.
“에데카나 공작님을 뵙습니다.”
산수이는 응접실에서 휘온을 맞이했다.
그녀가 들어서자 휘온은 기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멋쩍은 듯 입꼬리를 내리고 헛기침을 했다.
“여, 영애. 이른 아침부터 예고도 없이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사실 휘온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 보니 이성이 맛이 간 걸까.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그는 사람을 불러 비덴비덴 남작저로 갈 채비를 하라 일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이런 충동적인 행동은 그의 인생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때밀이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안달하며 달려오게 만드는 것인가.’
하지만 놀란 표정의 산수이를 마주하자, 휘온은 정신이 퍼뜩 드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자신의 때를 밀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는 속마음을 꾹 참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투자 전에 비덴비덴 영지를 한번 직접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아, 그러시겠죠. 그래서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서신도 없이 찾아오셨군요.’
산수이는 속으론 짜증이 가득했지만, 억지로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휘온을 응대했다.
“아닙니다, 공작님. 제가 알아서 먼저 이곳으로 모셨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제 불찰을 용서해 주시길.”
산수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뼈와 가시를 팍팍 심어서 휘온에게 날렸다.
“그럼, 우선 비덴탕부터 둘러보실까요?”
***
영업이 종료된 시각.
산수이는 텅 빈 비덴탕 안을 휘온과 함께 걸었다.
재오픈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홀함 없이 관리되어온 비덴탕의 내부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수도에 있는 목욕탕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겠군.’
탕 내부 곳곳을 둘러본 휘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관리되었군요. 정말 멋진 곳입니다.”
그런 휘온의 말에 산수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사실 따로 있지 않은가.
휘온은 계속 머뭇거리며 자신의 진짜 목적을 언제쯤 말해야 하는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어느새 탕 내부에 딸린 작은 방 앞에 도착했다.
휘온이 물었다.
“이 방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이곳에서 고객님들의 때를 밀어드릴 생각입니다.”
휘온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의 때까지 밀어줄 생각이란 말인가. 이 영애는 진정 신분을 초월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군.’
산수이는 휘온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는 덮개가 씌워진 대형 마사지 베드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시다시피 아직 오픈 전이라, 구색을 미처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공작님께서 저희 비덴탕을 홍보해주신 이후에 선보일 예정이라서요.”
휘온은 자신이 기다리던 그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영애.”
“네?”
“저에게 이 때밀이실의 첫 번째 고객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휘온은 온탕에 들어가 몸이 충분히 불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천년같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곧 애타게 기다리던 산수이 영애의 때밀이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으니까.
곧이어 휘온에게 남작저의 하인 하나가 다가왔다.
“목욕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공작님.”
“아니다. 내가 알아서 준비하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산수이 아가씨께 바로 들라 이를까요?”
“나는 괜찮으니 시간을 충분히 가지시라 이르도록.”
“예.”
휘온은 몸을 좀 더 불리기 위해 온수 속으로 깊이 들어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그의 몸이 발갛게 익어 오르기 시작했다.
휘온은 욕탕에서 나와 허리에 수건을 둘둘 감은 채 때밀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마사지 베드에 엎드려 누웠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베드 위에 처음으로 올라 눕자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흠. 내가 이곳의 첫 손님이란 말이지.’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다……!’
휘온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지만, 짐짓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산수이 영애.”
그렇게 말하며 휘온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자신의 등에 닿는 이태리타월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데.
벅벅벅—
그것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잔뜩 기합이 들어간 거친 손놀림이었다.
깜짝 놀란 휘온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 영애……? 오늘은 지난번보다 좀 거치신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휘온의 뒤에서 손에 이태리타월을 감은 채 씩 웃고 있는 건 산수이가 아닌.
“어이, 우리 구면이지?”
눈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얀피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