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2화 (12/150)

12화.

‘이 나에게 두 가지 요청이라…….’

휘온은 산수이의 말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세상 수수한 차림으로 공작저 문지방을 넘더니, 이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소원을 한 가지도 아닌, 두 가지나 말하겠단다.

그는 이 영애가 자꾸만 더 마음에 들었다.

‘무, 물론 이성으로서의 관심 같은 게 아니다. 난 그저 능력 있는 자들을 좋아할 뿐.’

그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했다.

“말씀하십시오, 영애.”

“우선 저희 비덴비덴 남작령의 목욕탕 사업에 전폭적인 투자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휘온은 깜짝 놀랐다.

‘때수건만이 아니라 목욕 사업 전반에 투자를 해 달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당돌하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휘온은 그녀가 싫지 않았다.

산수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비덴탕은 그저 단순한 목욕탕이 아닐 겁니다. 조금 전 경험하신 때수건과 같은 획기적인 제품들을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니까요.”

때수건 같은 신기한 물건들을 새롭게 개발하겠다는 것인가.

휘온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것은 돈 냄새를 맡은 사업가의 눈이었다.

“흠, 좋습니다. 영애의 실력은 이미 충분히 보여주셨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수건 말입니다. 기능성은 뛰어나지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휘온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제국민들에게 선보이려면 아무래도 좀 더 세련된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어떤 이름입니까?”

“이태리타월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제국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세련된 단어로 조합된 이름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 이름에선 바다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무언가 한없이 포근한 것이 자신을 감싸는 것 같기도 하고.

“멋진 이름이군요.”

휘온은 그녀의 작명 센스에 감탄했다.

“그럼 영애의 두 번째 부탁은 무엇입니까?”

“에데카나 공작님께서 저희 비덴비덴 남작령에 투자하신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졌으면 합니다.”

그 말인즉슨, 휘온 자신의 입으로 사교계에 소문을 내 달라는 것이었다.

‘당돌할 뿐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한 영애였군……?’

이 제국 내에서 가장 뛰어난 사업가이자, 패션의 선두를 달리는 휘온 에데카나였다. 그가 사용한 아이템들은 거의 하루가 지나지 않아 동이 났고, 서민들 사이에선 모조품까지 유행하곤 했으니까.

어디 그것뿐이랴. 그가 어딘가에 투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면 너도나도 그곳에 가진 돈을 모두 갖다 박곤 했다.

그런 그가 직접 사교 파티에 나가 그녀의 목욕탕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분명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너도나도 휴가지로 비덴비덴 남작령을 선택하겠지.

게다가 그곳에서 제작된 목욕용품들은 분명 불티나게 판매될 것이다.

산수이의 속뜻을 눈치챈 휘온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곧 있을 귀족 살롱에서 그대의 목욕탕을 소개하도록 하죠.”

‘얼굴값 하는 놈인 줄만 알았더니, 눈치도 빠르고 말도 잘 통하잖아?’

산수이가 휘온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투자하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할게요.”

이렇게 휘온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영애 또한 처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모두 다 신선해. 이런 여인은 처음이야.’

휘온은 미소를 지으며 산수이의 악수에 응했다.

“저 역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저 그리고…… 사실 선물로 드리려고 준비한 것이 있는데요.”

산수이가 예쁘게 포장된 또 다른 비단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공작님만을 위해 특별히!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제작한 이태리타월입니다.”

“리미티드 에디션……?”

아, 이런 단어는 여기서 쓰이지 않지.

산수이가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세,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오로지 공작님만을 위해 제작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하하…….”

“저만을…… 위한?”

그 말을 들은 휘온은 또다시 가슴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아까부터 자꾸 왜 이러는 거야. 진짜 미치겠군.’

애써 가슴을 진정시킨 휘온이 산수이에게서 건네받은 비단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와 빨간 줄무늬 자수가 아름답게 콜라보된,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때수건이 들어있었다.

‘이, 이것은……!’

휘온은 그 클래식한 디자인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칫 밋밋할 뻔했던 노랑과 검정 줄무늬 사이에 붉은 실 자수로 포인트를 주다니. 어디 놓여있더라도 눈에 띌 색상에 조화로움까지 놓치지 않았다. 대체 이 영애의 미적 감각의 끝은 어디인가……?’

휘온은 시간이 허락한다면 밤새 산수이 영애를 앉혀놓고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논하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껏 이토록 자신과 잘 통하는 여인을 본 적이 있던가?

휘온은 자꾸만 산수이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휘온은 산수이를 직접 에스코트하며 그녀를 귀빈실까지 안내했다. 처음 보였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때밀이가 확실히 제대로 먹히긴 했나 보네.’

그녀의 옆에서 점점 더 떨려오는 휘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수이는 휘온의 이 태도 변화가 그저 이태리타월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귀빈실 앞에 다다랐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산수이는 휘온에게 짧게 인사한 후 귀빈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휘온은 계속해서 말을 이으며 쉽사리 그녀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저, 산수이 영애…….”

“네, 공작님?”

“오늘 영애 덕분에 그간 쌓인 피로가 싹 가셨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에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뭐.”

“아닙니다. 영애께선 정말 훌륭한 기술을 가지셨습니다. 그대의 때밀이 덕분에 오늘 밤은 편하게 잠들 수 있겠…….”

바로 그때였다.

“누가…… 누구 때를 밀어?”

갑자기 뒤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휘온과 산수이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얀피르였다.

“야, 얀피르?”

그가 산수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 설마 이 자식 때도 밀어줬어?”

“이 자식이라니, 공작님한테! 죄송합니다, 공작님. 우리 애…… 아니, 얀피르 경이 외국 출신이라 아직 제국어가 서툴러서…….”

당황한 산수이는 얀피르의 머리에 손을 얹고 90도로 내려 휘온에게 인사를 하게 시켰다.

그러면서 자신도 함께 고개를 조아리며 얀피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므븝그튼그 쓰믄 그믄 은든다…… (마법 같은 거 쓰면 가만 안 둔다).”

그 모습을 본 휘온은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이 불쾌한 감정의 근원은 대체 뭐지?’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휘온이 저도 모르게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호위 기사의 때도 밀어주신 겁니까, 영애?”

그때 둘 사이에 얀피르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 때를 제일 먼저 밀어줬거든?”

“으악 얀피르! ……경!”

공작에게 계속해서 반말을 찍찍 해대는 얀피르를 보자니 산수이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산수이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휘온과 얀피르는 불꽃 튀는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휘온이 애써 점잖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산수이 남작 영애께선 참으로 자애로우신가 봅니다. 아랫사람의 때도 친히 밀어주시다니요.”

그러나 얀피르는 휘온의 말에 박힌 가시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산수이를 향해 물었다.

“주인 설마 너, 저 녀석의……!”

“으아아악!”

산수이는 그만 저도 모르게 얀피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얀피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리질 않는 법이지!’

도대체 자신이 왜 얀피르 눈치를 봐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위험한 짐승 애새끼의 입을 막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얀피르는 산수이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주인 너 갑자기 왜 이래?”

“얀피르, 우리 이 얘긴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하자, 응?”

“아니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얘기라고…… 어?”

그때 얀피르는 보고 말았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휘온의 얼굴을.

얀피르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근데 공작 너 이 자식, 왜 얼굴이 빨개지지……?”

“빠, 빨개지긴 누가 빨개졌단 말이냐!”

당황한 휘온이 말을 더듬었다.

얀피르가 고개를 돌려 산수이를 바라봤다.

“주인.”

“으, 응?”

“솔직히 말해 봐.”

얀피르가 천천히 산수이에게로 다가왔다.

“뭐, 뭘?”

“주인 너, 나하고 한 약속 지켰어, 안 지켰어?”

“어, 어?”

산수이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얀피르가 화난 목소리로 그르렁댔다.

“내가 분명히……!”

산수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망했다.

파국이다.

이제 공작가의 투자는 물 건너 가는 거겠지.

그렇게 비덴탕 경영은 망하고, 난 꼼짝없이 이 세계에 평생 갇혀 살…….

“꼭 때 밀어준 값 받으라고 했지!!”

“응?”

“음?”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휘온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도, 돈을 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서로를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는 산수이와 휘온 앞으로, 얀피르가 재차 되물었다.

“정말 공짜로 밀어줬어?!”

***

다음날 산수이와 얀피르는 남작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휘온이 마차 앞까지 직접 배웅을 나왔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산수이 영애.”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산수이가 마차에 오르기 전, 휘온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걸 본 얀피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휘온을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그 역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얀피르를 맞서 바라봤다.

하지만 그 도발에 대한 회답이라도 하듯, 얀피르는 휘온에게서 빠르게 산수이의 손을 낚아채 손등을 가볍게…….

핥았다.

할짝.

그걸 본 휘온의 온몸에 도도독 소름이 돋았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저자가 마치 짐승이 핥듯 영애의 손등을 핥은 게 맞나?!’

아니 그런데 저 영애는 왜 저리 태연한 모습이냔 말이다. 세상 어떤 사내가 여인의 손등에 입맞춤하는 대신 개처럼 핥느냐고!

설마 저들 사이에선 저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건가?

휘온은 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였다.

그런 휘온을 보며 얀피르는 승리의 미소를 씩 짓곤 산수이가 마차에 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한편 산수이는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둘의 눈싸움만 봐도 대충 알 것 같긴 했다.

‘내가 연애는 못 해봤어도, 이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다.’

절세미인 산수이 영애의 삶은 정말로 피곤했겠구나.

하지만 산수이의 몸속에 들어있는 안수희의 영혼이 느끼기엔 그저 자신은 제삼자일 뿐이었다.

‘너희가 그러든지 말든지. 난 빨리 미션 클리어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거야. 하필 내가 죽던 날이 드라마 마지막 회 방영일이었단 말이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얀피르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휘온은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산수이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주 재미있는 호위 기사를 두셨군요, 산수이 영애.”

한편, 얀피르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산수이의 손등을 다시 한 번 핥았다.

“……저기요, 얀피르 씨. 아까 이미 한 번 핥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새끼 냄새가 아직 안 빠졌거든.”

“뭐?!”

“내 거라고 다시 표시해 놔야 해.”

“아니 저기, 내가 왜 네 거일까?”

“내가 먼저 침 발라놨었으니까.”

음…… 이쪽은 인간의 연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동물적인 영역 표시를 하는 것일지도.

그때 얀피르가 갑자기 물었다.

“근데 주인.”

“응?”

“저 공작 놈, 죽여 버려도 돼?”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허공에 손바닥을 펼치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가 단호히 말했다.

“안 돼.”

“쳇…….”

그렇게 마차는 달리고 달려 비덴비덴 남작령으로 향했다.

산수이가 공작령에서 이루고 온 성과에 저택의 모든 사람은 환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데카나 공작의 후원이라니! 그것은 이 비덴비덴 남작령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놀랄만한 일은 정작 따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