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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95화 (95/128)

<95화>

길리언의 옆에 선 크레센트 이스타지오는 말했다.

이 모든 상황은 부당하다.

나는 황실의 잘못을 통감하며,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내 아비를 고발하고자 한다.

헤지스 이스타지오에게는 황제로서의 자격이 없다.

나는 형을 지키기 위해서는 낳아준 아비를 적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제 실수로 만든 치부인 사생아를 부덕의 소치라며 죽여 없애려 하였고, 저 대신 제 전처의 아들을 전장으로 보냈으며, 나는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손발이 잘린 채로 궁 안에만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 이렇게 나라가 기울어가니, 이제는 형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먹어야 함을 깨달았다. 저 부덕한 황제를 끌어내리고, 내가 제대로 된 황조를 세우리라.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수도 치안을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포트군은 나름 빠른 행동력을 보여주며 잠시간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나 적은 황궁 밖만이 아니라 황궁 내부에도 있었고, 더욱이 황태자가 자신의 기사단 일부를 끌고 나간 상황이었기에 반군을 막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군을 이끈 제2황자 크레센트 이스타지오는, 제 이복형인 길리언 크렘벨 공작과 함께 황궁을 차지했다.

* * *

탕!

황제의 침실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문이 열렸다.

미처 도망치지 못해 침의를 입고 서 있던 헤지스 이스타지오와, 갑주를 갖추고 검을 든 크레센트 이스타지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분기를 채 감추지 못한 헤지스가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 이제 내려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크레센트는 동요 없이, 언제나처럼 미소가 걸린 얼굴로 말했다.

“부덕한 아버지를 두어 이렇게 빨리 황위를 승계받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요.”

헤지스를 놀리듯 말을 잇던 그는 유들유들 웃는 낯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승계가 아닌가.”

그 장난스러운 태도에 화가 난 헤지스가 크레센트를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어떻게 이런 시국에, 이런 장난질을 벌여!”

하지만 그는 곧 크레센트의 옆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에게 붙잡혀 제압당하고 말았고, 그는 두 손을 뒤로 붙잡힌 채 소리쳤다.

“나라를 트리발로스에 넘겨줄 셈이냐! 이런 시기에 내분이 일어났다가는 전쟁의 흐름도 어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몰라 이리하는 게야!”

“아버지. 제가 그 정도로 생각이 없겠습니까.”

크레센트는 두어 걸음 그에게로 다가가, 위에서부터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트리발로스의 침공도, 형님의 출진도 모두 제가 그린 그림이란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밑그림은 길리언 크렘벨이 그려놓은 것이군요.”

“뭐?”

헤지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진심으로 노해서 외쳤다.

“케이든을 죽일 셈이냐! 그 애는 네 형이야! 아무리 황좌가 탐이 나도 그렇지, 어찌 네 형제를 죽이려 든단 말이냐!”

“그러면 저 또한 아버지께 묻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왜 제 형제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그 말에 헤지스가 기가 찬다는 듯 답했다.

“길리언 크렘벨을 네 형으로 인정이나 하느냐?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나의 자비다. 황족으로서의 지위조차 아까운 피라고!”

그때, 문밖에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왔다.

남자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는 왜, 그 모든 게 아까우셨습니까. 아버지.”

문 쪽에서 들려 온 물음에 헤지스가 홱,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길리언을 본 헤지스가 제 속의 분노를 감추지도 않고 외쳤다.

“왜냐고? 그것이 궁금해서 이런 일을 벌였느냐!”

“그렇습니다. 퍽 궁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여 그리하였지요.”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크레센트의 옆에 선 길리언이 헤지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찌, 조금쯤은 후회하십니까?”

헤지스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래. 그때 포트 공의 말대로 너를 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하.”

길리언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 마당에까지 와서 이딴 말이나 지껄이는 건가.

“그래서 왜 그러셨습니까? 왜 제게는 아까우십니까, 폐하.”

“알려주지 않겠다. 누구 좋으라고 그 궁금증을 풀어준단 말이야.”

“끝까지 그리하시겠다.”

길리언이 다소 분기가 오른 얼굴로 으르렁대며 말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나? 당신이 자비라 일컫는 그 쓸데없는 행동이 아니꼬웠던 공작 부인 덕에 알았지. 당신의 어리석은 동생이 입을 잘못 놀려서 말이야. 결국 당신 인생은 당신이 꼰 셈이 되었군. 축하하지.”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전하. 저는 이만하면 됐습니다. 상대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만 구금하지.”

크레센트의 지시에 길리언이 물었다.

“구금입니까? 저라면 곧장 죽이겠습니다만.”

“아버지의 처형은 내가 정식으로 황위를 받고 심판하는 모양새를 잡아주는 게 좋아. 전 국민 앞에서 말이야.”

“황제파 세력의 귀족들이 가만있지만은 않을 텐데요.”

“그것도 형님께서 살아 돌아올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지. 구심점도 없이, 명예도 없는 황제를 위해 누가 싸우겠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헤지스가 다시금 외쳤다.

“네가 기어코 네 형을 죽일 심산이로구나!”

헤지스는 눌려 있던 고개를 힘으로 치켜들며 크레센트를 향해 소리쳤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말도 안 되는 화합 따위를 이뤄보겠다고 네 어미를 궁에 들인 게 잘못이었어!”

“하하! 그것을 이제 아셨습니까?”

크레센트가 돌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모든 건 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다. 아버지께서 그런 아들들을 낳아서, 그리 크도록 키우셨으니 말입니다.”

“크렘벨 공작의 도주부터 타국의 침략까지. 황족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만 골라서 하는구나. 천벌을 받을 거다!”

“그건 지금 아버지께서 받고 계시는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데.”

그는 너무 웃은 나머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고는 말했다.

“아버지를 지하에 가두고, 크라이언트와 에덴버 저로 군사를 보내 가주들을 보호해라.”

* * *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반군은 그대로 황궁을 차지했다.

그다음으로 그들이 취한 행동은, 앞으로 내려올 북부 병력을 컨트롤하기 위해 곧장 크라이언트와 에덴버 저로 군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각하!”

밤늦은 시간의 에덴버 저.

수도의 소란이 전해지자, 저택의 사용인들이 소리 높여 저택의 주인을 찾았다.

“반역이라고?”

“예! 지금 수도 거리에는 군인들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오늘 아침까지도 그런 얘기는 들어온 바가 없었어!”

“일단 가시면서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엘렌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정보실에서 들어온 이야기는 없었나?”

“지금 말씀드리는 게 정보실에서 급히 전해온 전갈입니다. 길리언 크렘벨과 크레센트 황자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요 거점에서는 아무런 징후가 없었으니 아무래도 산맥을 타고 넘어온 것 같다며, 곧장 도주할 것을 당부해왔습니다.”

“군대가 넘어오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그래서 소수의 부대로 수도에 한정된 작전을 펼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일단 바깥의 영지로 피신해 다음을 도모하실 것을 당부해왔습니다.”

“확실히 그렇겠군.”

그녀는 바삐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러면 아버지랑 엘시어는?”

“크라이언트에도 전갈이 갔다고는 알고 있지만, 황궁은 무리입니다. 영제께서는…….”

“그래. 어려웠겠지. 아, 하필 영지군 편성도 안 끝난 지금.”

엘렌은 제게 드문 한탄을 뱉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제이시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이걸 노리고 엘시어를 끌어들인 게 너무 빤해서 화가 나네요.”

엘렌이 후, 하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영제가 걱정되시는 게…….”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만일 제가 남았다가 아버지께서도 탈출하지 못하신다면 그땐 정말 답이 없어요. 일단 가야 해요.”

“알겠습니다.”

“중간에 내려오고 있는 북부군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됩니다. 그러면 전하께 전갈을 보내 역으로 포위 작전을 펼칠 수 있을 거예요.”

“예. 그렇다면 불편하시겠지만 일단 북쪽 샛길을 달려 곧장 숨어야 합니다. 성문이 열려 있다면 그대로 빠져나가 저희도 산맥을 향하고, 닫혀 있다면…… 그때는 일단 적당한 곳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지요.”

그들은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와 곧장 북쪽을 향했다.

그러나 멀찍이 보이는 성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곧장 우측으로 꺾어요. 이대로 슬럼가로 갑니다! 다들 무기만 들고 적당히 옷은 버려요!”

마차는 엘렌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샛길로 꺾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엇!”

그들의 앞을 마차 한 대가 와서 막았다.

히히힝―!

말의 놀란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히 멈추었고, 제이시가 한차례 욕을 갈기며 앞의 마차를 쳐다보았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는 한 남자가 내렸다.

길리언 크렘벨이었다.

* * *

“내리지.”

길리언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엘렌의 마차를 향해 걸어왔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야. 내려. 대화를 하지.”

밖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제이시가 말했다.

“내리지 마세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도 마차가 한 대뿐입니다. 문을 열고 내리면서 제가 그를 공격할 테니, 각하께서는 곧장 일직선으로 튀어나가 처음 나오는 골목에서 꺾어 들어가세요. 곧장 슬럼가로 가시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미안해요. 제이시.”

“괜찮습니다. 저도 처음 한 방만 치고 곧장 쫓아갈 테니까요. 그럼 셋에 나가시는 겁니다.”

그녀는 마차의 문을 붙잡고 조용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콰앙!

문이 세게 열리며 두 인영이 마차의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제이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곧장 길리언이 있을 곳을 찔러 들어갔고, 그녀의 뒤를 이어 나온 엘렌은 타닥, 정면을 향해 뛰어갔다.

“큭……!”

길리언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 제이시의 손목을 잡아채며 뒤로 물러섰다.

“아윽!”

손목이 비틀린 제이시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엘렌은 잠시 멈칫했을 뿐, 그대로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그것을 확인한 길리언은 잡고 있던 제이시를 내팽개치고 엘렌을 향해 달려갔다.

“젠장! 멈춰!”

빠른 속도로 달려간 길리언은 기어코 엘렌의 뒷덜미를 잡아채려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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