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는 그대에게 호의를 베푼 거야.”
크레센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어라 대처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엘렌은 속이 답답해졌다.
자신을 생각하면 엘시어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것은 반대로 자신이 허튼짓을 하면 엘시어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도 저도 못하게 손발을 잘라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황자로서의 권력이 있었다.
“……신경 써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일이 진행되어 조금 놀라 찾아뵈었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제의 일은 내게 맡기고 그대는 그대의 일에 집중하도록 해.”
엘렌은 길리언이 갖고 있을 크레센트의 약점을 어떻게든 찾아놓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며, 제 입술을 짓씹었다.
* * *
“당했어.”
엘렌은 털썩, 마차 의자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영제께서는 그럼 인질로 잡히신 겁니까?”
“그런 셈이죠.”
제이시의 물음에 엘렌이 푹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어쩐지 자신에게 가감 없이 적대감을 표출하더라니.
회의에서 느껴진 꺼림칙함이 이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나름의 호의를 보이며 접근했을 이들이 갑자기 대놓고 한두 마디 공격할 때,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 이건 정말…….”
그녀로서는 꽤나 뼈아픈 실책이었다.
갑작스럽게 터진 전쟁 이후로 그녀가 모르는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태도가 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곧장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들과 제대로 설전을 벌이는 회의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변명을 붙여가며 탓을 하려면 세상에 이유 없는 실수는 없다.
“2황자 전하께서는 계속 각하께 호의적이었잖습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영제께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제이시가 위로 차 건네는 말에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2황자가 보란 듯이 제 발을 묶었어요. 이건 무언가 준비한 게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이 시점에서 그들이 일을 벌일 상대라면 전하밖에…….”
“설마요. 태자 전하께서 출정 가시는 것이 여러모로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바로크 후작의 주장으로 전하께서 출정을 나서게 되신 인과가 이렇게나 뚜렷한데요. 그 정도로 무모하게 굴 사람이라면 진작에 일을 벌이고도 남았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도 제 생각을 벗어난 한 수가 나왔다. 다른 부분에서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게다가 폐하께서 가만히 두고 보시지도 않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전하를 전장으로 몰아낸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무슨 수를 썼다가는 정말 곧장 반역으로 몰릴 겁니다.”
“분명 나도 그렇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냥, 예상외의 일들이 자꾸 생기니까 불안한가 봐요.”
그녀는 자신의 양팔을 끌어안았다.
좋지 않은 일이 너무 연달아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또 이런 식으로 발이 묶인 귀족이 누가 더 있을지 모르는 상황.
“굳이 지금 내게서 엘시어를 뺏어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요.”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 틈을 타 각하를 반쯤 강제적으로 회유하려 드는 것이겠지요.”
제이시가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라며 이 성도에서 전하의 자리를 지켜내는 데만 집중하셔도 괜찮습니다. 그것으로 각하의 역할은 충분히 해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정보실로 가야겠어요. 뭐라도 좀 훑어보다 보면 혹시 무언가 도움이 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엘렌은 이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말했다.
* * *
한차례 반역의 바람이 불고 지나간 거리.
사방에 늘어선 군인들 사이로, 은갑을 걸친 기사들이 출진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황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가 있었다.
백성들에게 명망 높은 그는 직접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출정에 나섰고, 황태자의 출정 행렬을 보러 나온 백성들은 꽃과 환호성으로 그를 배웅했다.
황도를 나서는 병력의 숫자는 고작해야 1천.
보잘것없는 병력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만큼이나 빼낸 것도 기적이라 부를 만했다.
길리언 크렘벨의 탈출 이후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황도는 도시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당장 많은 병력을 빼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그 크렘벨령의 병력을 해산시켜 흡수할 수 있었던 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크렘벨의 병력을 황도 근처에 두는 것보다는 출정을 보내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고, 그들을 이번 출정에 끼워 보내는 것이 적소라고 생각한 황제는 곧장 황태자에게 그들의 처우를 이관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황태자의 출정군이지, 사실 그것은 가장 위험한 선발대로 ‘죽으러 가라’라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병사들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황태자가 직접 이끄는 부대라는 미명에도 불구하고 출정군의 사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게다가 그것은 그들을 이끌고 있는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때나마 크렘벨 소속이었던 그 병력을, 언제나 황태자의 뒤를 지켜온 그들로서는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남부를 향하는 길목에서 차례차례 합류하기로 결정이 난 나머지 병력들도, 중앙 바덴으로 향하는 황태자가 이끌게 될 이들은 그와 적대 중인 귀족파의 바로크와 최근 황제파로 전향한 오스틴이었다.
좋지 않은 타이밍과 서로를 의심해야만 하는 아군.
그들이 얼마나 군사를 내어줄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출정군은 그렇게 묘한 껄끄러움을 느끼며 수도를 나섰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트리발로스 군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황태자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갑주를 걸치고 수도를 나섰다.
* * *
바깥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남자가 커튼을 걷고 밖을 쳐다보았다.
“눈부시기 그지없군.”
햇빛을 반사하는 은빛 갑주들의 행렬을 바라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런 남자 옆으로 다가온 클라우디스가 탁, 다시 커튼을 치며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는 정말 코앞이니 좀 조심하시지요. 크렘벨 공.”
그러자 길리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 난리 통에 이런 구석까지 쳐다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싶은데.”
“공을 찾는 군인들이 있겠지요.”
“경은 그 성질을 좀 죽이는 게 좋겠습니다. 엘렌에게 접근이라도 해 보고 싶다면.”
길리언의 지적에 약간의 모멸감을 느낀 클라우디스는 그를 한차례 쳐다보았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황도에서 병력이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출정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성문을 나서자마자 채비를 시작했다.
각자 짐을 챙기던 두 사람은, 각자의 행선지는 달랐는지 클라우디스가 먼저 채비를 마치고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사흘입니다. 거사까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부디 그 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몸을 좀 조심히 다루십시오.”
“유념하지요.”
툭, 대답하는 길리언의 태도에 살짝 빈정이 상한 클라우디스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애송이가 성질만 나빠서는.”
길리언은 그런 그가 나간 자리를 가볍게 흘긴 뒤, 자신도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는 짐을 챙겨 은신처를 나섰다.
* * *
출병 직후.
수많은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고요해진 수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밀한 사생활부터 미신적인 이야기까지, 아주 다양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황제 헤지스 이스타지오에게는 사생아가 하나 있다는 것.
그 사생아는 26년 전 어떤 하녀의 품에 안겨 나왔다거나, 그 사람을 본 이가 있다는 것.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구체화가 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이는 황제와 꼭 닮은 흑발을 가졌었다든지와 같은 것들.
그리고 최근의 이례적 가뭄과 어지러운 국운은 그런 그의 문란한 사생활이 불러온 신의 노여움 탓이라는 이야기까지.
평소였다면 곧장 황족모독으로 끌려갈 만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는 오히려 그런 소문들이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었고, 그렇게 출병 사흘 후.
수도의 병력이 돌아오기엔 멀고 북부의 병력이 도착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
깊은 밤, 성도에는 갑작스럽게 군사가 들이닥쳤다.
* * *
몰래 성문이 열리고, 수도를 메우기엔 충분한 군세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둠 속에 횃불이 오르고, 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 뒤를 쫓아 들어오는 총포 소리가 들렸다.
총화기로 무장한 머스킷병을 중심으로 밀고 들어오는 군사. 고작 몇 부대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호위를 받는 그들의 화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길리언이 사전에 비축해 두었던 것들과 2황자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실행된 계획이었지만, 수도의 점거에는 충분한 전력이었다.
수도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한 도시에 불과한 영역이다.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험한 산길을 헤쳐 말을 달리지 않고 걸어온 병력들은 기습에 성공했고, 갑작스럽게 내부에서부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한 수도군은 초반 효율적 대응에 실패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탕, 탕, 화약이 터지는 소리.
그 소음을 뚫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길리언 크렘벨 공작이다.
나는 황제 헤지스 이스타지오의 사생아이며, 그에 의해 은폐당할 뻔한 그의 야욕의 희생자다.
나는 제 치부를 지우고자 한 황제에 의해 억울하게 반역의 죄를 쓰게 된 자이며, 그로 인해 죽을 뻔했으나 형제를 안쓰럽게 여긴 크레센트 황자에게 구원받은 자이다.
나는 황위를 탐내는 것이 아니다. 백성을 기만하고 사욕으로 사람을 죽이고자 한 황제를 고발하고자 함이다.
그렇게 자신은 억울하게 반역의 죄를 쓰게 되었음을 내세우며 들이닥친 길리언 크렘벨은, 자신의 옆에 제2황자 크레센트 이스타지오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