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96화 (96/128)

<96화>

“잡아!”

일이 벌어지자 길리언의 명령에 의해 물러나 있던 호위들이 곧장 제압을 위해 달려들었다.

엘렌의 뒤를 쫓아 달려가려던 제이시가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몇 번 떨쳐내려 시도하다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달리세요, 각하!”

엘렌은 태어나 처음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음박질을 쳤다.

아스라이 들리는 제이시의 외침을 뒤로하며, 그녀는 달렸다.

이번엔 오른쪽. 다음엔 왼쪽.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벽이 몇 개인가 지나갔다.

조금만 더 가면 명확한 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빈민촌이 나온다. 그 사이로 숨어들면 한동안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녀는 도망쳐야 한다는 일념하에 계속해서 달렸다.

뒤에서 그녀를 쫓아오는 묵직한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멈춰! 엘렌!”

잡히면 안 돼. 어쩌면 이 순간으로 엘시어와 아버지의 미래가 결정될 수도 있어.

엘렌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나름 몸이 가벼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검사와 일반인의 신체가 같을 수는 없다.

누구든 궁지에 몰리면 기적 같은 힘이 발휘되고는 한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 여성이 단련된 남성을 완벽히 따돌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점점 그녀의 뒤를 쫓아오는 뜀박질 소리는 가까워져 왔고, 그러던 어느 순간.

덥석!

그녀의 뒷덜미가 강한 손아귀 힘에 덜컥 채이며, 옷자락에 목이 콱 졸렸다.

“아흑!”

길리언은 그녀의 목 졸린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제발 이야기를 좀 들어!”

“이거 놔!”

그녀는 제가 잡힌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길리언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뒤에서 꽉 끌어안아 그녀가 도망칠 수 없도록 옭아매었다.

“들어! 들으라고! 네게 정말 해를 끼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병사들을 데리고 왔을 거다!”

한참을 더 몸부림치던 엘렌은, 결국 제가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닫고는 홱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내게 무슨 제안을 하든, 필요 없어.”

“네 동생이 크레센트 황자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태도가 가능한가 보지?”

“…….”

엘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작스러운 트리발로스의 출정만 아니었어도.

그것만 아니었어도 크레센트가 그딴 핑계를 대며 엘시어를 데려가지는 못했을 텐데.

아니, 처음에 이상한 군수물자의 흐름을 보았을 때 곧장 거기까지 생각해내 대처했더라면!

그녀는 물밀듯 밀고 들어오는 ‘만약’이라는 단어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원도 하지 않은 자를 그렇게 억지로 제 기사로 임명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딴 일은 선례도 없었다. 제게 충성할 기사를 임명하는 자리에 무엇을 하러 적진의 사람을 임명한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 ‘당한다’라는 게 그런 것이다. 누구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당한다.

결국 자신이 부족했다는 소리다.

엘렌은 잇새에 꽉 힘을 주고는 짓씹듯 말을 뱉었다.

“……황자의 목적은 나나 아버지일 테지. 차라리 크레센트 황자 앞에 나를 가져다 바치는 게 어때.”

“아니야. 그건 아니지.”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황자의 목적은 그럴지언정, 내 목적은 조금 다르니까.”

그는 절대 엘렌을 놓지 않겠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더욱 그러쥐며 말했다.

* * *

엘렌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선언에 기가 차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달라?

다르면 뭐. 무엇을 어찌하겠다고.

그런 엘렌의 모습을 어찌 해석했는지, 길리언은 그녀를 죄고 있던 팔을 풀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저를 마주보게 한 그가 엘렌의 양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이제라도 내게 돌아와. 나와 함께, 내 옆에서 네 미래를 도모해.”

“……황자와 함께 한 일장 연설은 잘 전해 들었지. 그건 모두 위장이었다고 할 셈인가?”

“위장이라기보다 잠시간의 동맹이지.”

그가 엘렌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당장 황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죽고, 황자는 이 이상 제 밑천을 잃기 전에 확실히 승부를 보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요구 사항을 훌륭하게 들어주었을 뿐.”

“하, 훌륭히?”

엘렌이 노골적인 비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무엇을 얼마나 하고 그리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 말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지. 당신은 필요가 다하면, 나도 내다 버릴 사람이라는 거야.”

그러자 길리언이 소리쳤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나! 대체 그 뿌리 깊은 불신은 어디서 오는 거지? 내가 널 홀대한 것은 인정하지만, 언제 먼저 배신한 적이 있기라도 했나? 오히려 그건 네가 먼저 저지른 일이야! 냉정하게 생각하라고!”

“냉정하게 생각해서 하는 거야!”

엘렌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내가 당신 손아귀를 벗어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했겠는지! 무엇이 되었든 내가 방해된다고 판단하면, 나를 믿기보다 나를 치워버리는 것을 택하지 않았겠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네 말마따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해 보지도 않고 이러고 있을 것 같나?”

길리언은 저도 함께 감정이 격해져서는 외쳤다.

“널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그런 상황이 오면 차라리 죽여 없애야 한다고! 그런 생각은 벌써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까!”

“…….”

“나를 가장 미치게 하는 게 바로 그거야. 나는 왜 너를 놓지 못할까. 아비란 작자도 내 궁금증은 풀어줄 생각을 안 하더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도무지 해결할 방도가 없지!”

그는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 차례 마른세수를 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이제라도 내게 돌아와. 내가 지금 제안하고자 하는 건, 같이 크레센트의 뒤를 치고 이 나라의 정상에 오르자는 거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당신과 내가 손을 잡을 일은 없어.”

엘렌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녀의 반응에 가슴 한구석이 울컥했던 길리언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가장 아파할 만한 것을 들먹이고 말았다.

“……황자에게 네 동생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놀랍군.”

“개자식.”

엘렌의 욕설을 듣고서야 길리언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애써 담담한 척 변명을 이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엘시어를 인질로 잡는 건 내가 건의한 부분이 아니야. 오히려 나는 말렸지. 지금도 보면 알겠지만, 난 너와 한 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사실 이제 와서 누가 건의했는지는 중요치 않지. 내가 너무 황자를 우습게 봤고, 당했다는 결과가 있을 뿐. 팔다리를 다 잘라 놓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얼마 남지 않은 여력으로 이런 일을 꾸몄어.”

엘렌은 실소하며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이 그녀의 머리를 향했던 길리언은, 갑자기 그녀가 홱 고개를 쳐들며 하는 말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야 할 이유도 없지. 사실 일이 이렇게 된 지금, 당신이 내게 기대하는 가치는 적어도 절반 이상이 사라졌어.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황자의 앞에 나를 바친 다음, 그가 던져주는 포상이나 기다려. 그러면 당신이 걱정해 마지않는 내 동생의 안전도 확보가 될 테니.”

“아니야, 그건 아니지. 나는―”

길리언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하려는 말이 저로서도 입 밖으로 잘 나지 않는지 몇 번을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이윽고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난, 완전한 황좌를 원해. 그리고 거기엔 네가 필요하다.”

그래서 너를 황후로 두고, 내 사람으로 두어서, 나만 보는 너를 보고, 나를 향해 웃는 너를…….

그럼에도 끝내 뱉지 못한 말들을, 길리언은 제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엘렌은 냉소하며 말했다.

“내게 충성하는 군대도 미처 모으지 못하고, 지금에 와서는 인질과 함께 사로잡혀 행동마저 자유롭지 못한 내가?”

그녀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이 그런 사람에게도 가치를 둘 수 있는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일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나도 모른다.”

길리언은 무겁게 대답했다.

저로서도 이런 자신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다만, 사람은 변하지. 마치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흔들리지 않는 엘렌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되는대로 말을 주워섬겼다.

“정 믿을 수 없다면, 나와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 동생을 위해 나를 이용한다고 생각해. 원래 관계라는 게 그렇지 않나. 서로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보게 되는 법이지. 그것이 물질이든, 감정이든.”

“…….”

“나라면 동생을 구해낼 방법이 있다고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자존심을 굽혀가며 그 발을 핥았을 거다. 네가 그러지 않는 것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어쨌든 동생이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

“그도 아니면 케이든 이스타지오를 버리는 것으로 네 자존심과 가족 모두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인가?”

“……황태자를 버린다고?”

한참 침묵하던 엘렌이 처음으로 대꾸했다.

그것이 케이든 이스타지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아챈 길리언은, 참을 수 없이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한 글자 한 글자 꾸역꾸역 말을 뱉어내었다.

“그렇지. 이런 상황에 크레센트의 행동을 묵인한다는 것은, 전장에 나가 있는 케이든을 죽게 둔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 그를 죽일 심산이었어.”

“죽일 심산이었다기보다 뻔하지 않나. 이런 내전을 기획하고 있는 마당에 국경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겠나? 잘 버텨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거고 안 되면 그때 축배를 드는 거지.”

동요했던 것은 잠시. 저희의 계획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길리언을 보며 엘렌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원군은 없을 거고 아마 지원도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거다?”

“그런 셈이지. 결정이야 크레센트가 하겠지만.”

길리언이 뱉어낸 것은 그녀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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